릴리는 성녀의 인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재하는 그 인장을 보는 순간 불안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 신도가 한 명도 없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혹시 제가 또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제 증언을 미리 확인하지 말아 주세요.” 릴리가 말했다.
재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릴리는 동생 노아가 병들었던 날을 증언하려 했다. 그 밤의 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녀였다. 하지만 천계는 성녀의 증언을 신의 대리 진술로 분류했다. 재하가 승인해야 비로소 유효한 말이 된다는 뜻이었다.
“성녀 일을 내려놓으려고요. 적어도 증언하는 동안에는요.”
“그럼 신전의 치료 지원 업무는 어떻게 하죠?”
“다른 사람이 맡도록 인수인계하면 돼요. 제 자리를 지키느라 제가 본 일을 왜곡하고 싶지 않아요.”
재하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깨달았다. 신도 수가 줄어드는 것보다, 릴리가 자신에게 실망할까 봐 무서웠다. 그러면서도 그 불안 때문에 그녀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증언 내용은 묻지 않겠습니다. 필요한 업무는 제가 책임지고 나누죠.”
릴리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신님이 제게 감사하라고 요구한 적 없다는 말도 할 거예요.”
증언 당일 어느 신관이 릴리에게 질문했다. “당신 동생을 신이 치료했습니까?”
“네.”
“그러면 신앙은 치료의 대가가 아닌가요?”
“제가 믿기로 한 건 치료를 받기 전이었어요. 그분은 밤새 물을 끓이고 동생 곁에 앉아 있었어요. 한 번뿐인 기적을 썼다는 사실에도 감사하지만, 그것이 제 미래까지 대신 선택할 권리를 주지는 않아요.”
다른 신이 물었다. “치료하지 못했다면 계속 믿었을까요?”
릴리는 오래 생각하고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날의 제가 평생을 약속한 건 아니니까요.”
재하는 방청석에서 손바닥을 꼭 쥐었다. 그 대답은 기도 포인트를 모으는 데 유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릴리 자신의 대답이었다.
에르테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 신을 믿지 않게 되더라도 그날의 돌봄은 가치가 있습니까?”
“네. 제가 떠난다고 해서 그날의 물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잖아요.”
법정이 잠잠해졌다.
그때 기록관이 새 증거를 접수했다. 전쟁신 카르도의 오래된 전쟁 보고서였다. 표지에는 그 자신이 찍은 붉은 인장이 남아 있었다.
제85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