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하가 눈을 뜬 곳은 천계가 아니었다.
천장에 거미줄이 붙어 있었고, 문틈에서는 갓 끓인 수프 냄새가 났다. 익숙한 폐허 신전이었다. 어느새 동쪽 지붕에 새 쇠판이 얹혀 있었다.
“살았네.”
재하가 중얼거렸다.
옆에서 에반이 낡은 수첩을 덮었다.
“처음부터 죽은 신이었으니 표현이 묘하군.”
“상태는요?”
“갈비뼈 두 개 금 갔고 어깨 관절이 다쳤어. 신격의 육체라서 회복은 빠르겠지만, 포인트를 쓰지 않으면 아픈 건 똑같아.”
재하가 손을 움직였다. 손끝은 제대로 움직였지만 어깨에 통증이 몰려왔다.
“노아는?”
“멀쩡해. 릴리가 재우고 있어.”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안내창에는 예상보다 더 나쁜 문구가 떠 있었다.
[등록 신도: 15명]
[신앙 포인트: 27]
[남은 시간: 2일 18시간]
“겨우 이틀?”
“기절해 있는 동안 시간이 갔으니까.”
“누가 그 시간을 멈춰 주는 기적은 안 파나요?”
“불가능하진 않은데 네 재산으로는 영겁이 지나도 못 사.”
재하는 이불을 걷으려다 통증 때문에 다시 누웠다.
“그 기사한테는 무슨 일이 생겼어요?”
에반의 표정이 굳었다.
“카르도가 정식으로 병력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했어. 네가 곡물 징발을 방해했고 군사 명령을 모욕했다는 이유지. 심판까지 신전을 떠나지 말래.”
“마차가 먼저 넘어졌는데요.”
“그래도 책임은 네게 돌릴 거야.”
에반은 잠시 침묵하다 덧붙였다.
“또 한 가지. 너를 치료하려던 사람들이 신앙 포인트를 보내려 했어. 네가 모르면 몰래 써도 됐지.”
“안 썼죠?”
“그래. 네가 싫어할 줄 알았거든.”
재하가 눈을 감았다.
“고맙습니다.”
악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케팅 전문가에게 그 말은 비효율적인 보수야.”
***
침대 옆 작은 탁자에는 이름이 적힌 음식 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마르타가 끓인 수프, 도란이 구해 온 달걀, 안나가 만든 빵 조각이었다. 아무도 기도를 시키거나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었다.
재하가 젓가락을 잡으려 하자 어깨가 찌르르 울렸다. 에반이 그릇을 대신 받쳐 주었다.
“억울하냐?”
“뭐가요?”
“신도 없던 신이 겨우 사람을 모았더니 도로 누워 있게 생겼잖아.”
“조금요.”
재하는 수프를 삼켰다.
“그런데 노아가 안 다쳤잖아요. 그럼 괜찮죠.”
에반은 한동안 재하를 바라봤다.
“넌 참 쉬운 기준을 갖고 있어.”
“안 쉬운데요. 제가 아픈 건 그대로니까.”
“그럼 왜 후회하지 않아?”
“후회하진 않지만 다음에는 곡물 자루 옆에 아이가 서 있지 않게 해야죠. 사람 하나 구했다고 안전 문제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에반은 입을 다물었다. 신계의 영웅담은 늘 누가 누구를 구했는지만 기록했다. 어째서 그런 사고가 일어났고 다시는 어떻게 막을 것인지는 거의 쓰지 않았다. 재하의 말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사고가 재발하는 것을 막는 데 더 쓸모 있어 보였다.
노아가 방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형아 신님.”
재하는 손짓했다.
“들어와.”
노아는 부러진 나무 장난감 하나를 내밀었다. 재하가 눌려 있을 때 바퀴가 부러진 작은 마차였다.
“이거 고쳐 주세요.”
재하가 장난감을 받아 들었다. 순간 웃음이 났다.
“저 지금 어깨가 아픈데.”
“그럼 나중에요.”
아이의 대답은 너무 단순했다. 신에게 부탁한 일이라고 당장 이루어져야 하는 건 아니라는 듯했다.
“나중에 꼭 고칠게.”
노아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뛰어나갔다. 에반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저 아이는 너를 신보다 친한 이웃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게 더 편한데요.”
“천계 장부에는 없는 관계야.”
재하는 창밖을 보았다. 그곳에는 새로 고친 작은 지붕이 있었다. 이것도 장부에 값으로 올리면 얼마쯤 될까. 하지만 이 지붕을 고친 사람이 원했던 것은 다른 사람이 비를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마음까지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었다.
그날 저녁 신전으로 찾아온 사람은 의외로 카르도의 기사였다.
하얀 붕대를 감은 오른팔로 투구를 든 기사는 문 앞에서 한동안 망설였다. 거대한 갑옷은 금 간 바닥에 어울리지 않았다.
“어제의 일은….”
기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내 이름은 로웬이다. 제17보급대 출신이지.”
재하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 부대요?”
“베르만의 명령에 따라 네게 검을 겨눴다. 하지만 마차가 쓰러지자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노아가 다치지 않았으니 됐습니다.”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로웬은 무릎을 꿇으려 했다. 재하가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무릎 꿇으면 나중에 저도 답해야 할 것 같아요.”
기사는 멈칫했다.
“신은 사죄를 어떻게 받아야 하느냐?”
“잘못한 일을 다시 안 하겠다고 정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로웬은 한참 있다가 투구를 무릎 위에 올렸다.
“제17보급대에는 토마스라는 병사가 있었다.”
재하가 자세를 고쳤다. 통증을 참느라 얼굴이 찡그려졌다.
“브렌 씨 아들이요?”
“그는 전투에서 죽지 않았다. 보급이 끊긴 뒤 사병들이 서로를 도와 살아남았다. 하지만 정식 귀환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북쪽 산맥 너머 제17감시초소.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으로는 아직 살아 있어.”
재하의 가슴이 뛰었다.
“그럼 왜 기록에서 지워졌어요?”
“부대는 해산됐다고 발표됐다. 그런데 실상은 보급 비용을 청구하면서 병사들에게 지급하지 않았다.”
로웬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신께 기도할수록 관리관의 창고만 채워졌지.”
재하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식량 자루가 마을을 돌고 있었던 이유도, 장부가 불탔던 이유도. 살아 있는 부대의 이름을 빌려 신성 보급을 계속 청구하려면 병사들이 돌아와서는 안 됐다.
“세리아 조사관에게 말씀해 주세요.”
“내 증언은 군율 위반으로 처리될 거야.”
“그래도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로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기겠다. 하지만 그 전에 북쪽 초소로 가는 보급 마차부터 멈춰야 해.”
“왜죠?”
“내일 새벽 그곳에 ‘장부 정리반’이 출발한다. 병사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초소를 폐쇄하러 가는 거야.”
한순간 신전 안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
재하는 밤이 깊자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는 릴리, 에반, 도란, 브렌, 로웬, 그리고 뜻밖에도 세리아였다. 세리아는 불청객이 아니라 정식 증언을 접수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북쪽 초소까지 도보 이틀 거리입니다. 정상적으로 가서는 장부 정리반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세리아가 지도를 펼쳤다.
에반이 손가락으로 강을 가리켰다.
“수로를 따라 보급선이 하나 더 있어. 옛 수문을 통과하면 반나절 만에 북쪽 다리까지 갈 수 있지.”
도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제3차단문은 완전히 열지 않았어.”
“그래도 보트 한 척은 지나갈 수 있어.”
“거길 무턱대고 열면 아래 마을이 물에 잠길 수도 있다니까!”
재하는 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다른 방법을 찾죠. 급하다고 사람들을 위험하게 할 수는 없어요.”
브렌이 물었다.
“내 아들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오?”
“확답은 못 합니다.”
“그 말 듣는 게 이렇게 안심되는 날도 오는구려.”
그는 낡은 편지를 재하 앞에 놓았다.
“전엔 다들 반드시 구해 준다고 했소. 그러고는 내게 더 내라고만 했지.”
세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별도 경로로 정리반의 이동을 중지시키겠습니다. 증거 보존 번호 C-1704에 근거한 긴급 명령을 올리면 시간을 벌 수 있어요.”
“상관이 막으면요?”
“그때는 제 직위를 걸겠습니다.”
재하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세리아는 어제 자신이 했던 말을 되돌려 주었다.
“틀렸으면 공개적으로 책임지겠습니다.”
***
새벽에 세리아가 서둘러 돌아왔다. 긴급 중지 요청은 기각되었다. 대신 그녀에게 내려온 것은 직무 정지 명령이었다.
“감찰실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즉시 모든 증거를 상급기관에 이관하랍니다.”
재하는 그녀의 손에 든 종이를 보았다.
[감찰관 세리아: 직무 정지]
[증거 번호 C-1704: 전쟁신 중앙청 인계]
“그 증거를 넘기면 정말 안전합니까?”
세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에반이 혀를 찼다.
“그럴 줄 알았어. 똑똑한 사람들이 만든 제도는 똑똑한 사람들이 무너뜨리기도 하지.”
그때 릴리가 손을 들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재하는 그녀를 보았다.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더 생각해 보려고요.”
릴리는 작업장에 있던 안나에게서 배운 방식을 떠올렸다. 방직 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천 조각에 짧은 문장을 꿰매어 정보를 나누었다. 사람이 한 장의 편지를 들고 다니면 붙잡힐 수 있었지만, 여러 사람이 조금씩 나누어 전하면 한꺼번에 없애기 어려웠다.
“증언을 마을마다 나눠서 보내면요?”
도란이 무릎을 쳤다.
“수로 작업에 참여한 농민들한테 부탁하면 되겠군.”
세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증거 원본을 함부로 복사하면 효력이 떨어집니다.”
“원본은 조사관님이 가지고 계세요. 우리는 목격한 사실과 사람 이름만 전하죠. 소문이 아니라 증언으로요.”
재하가 조심스레 물었다.
“릴리 씨, 정말 괜찮겠어요?”
“노아가 아팠을 때 아무도 제 말을 믿어 주지 않았어요. 그때 신님은 들어 줬잖아요. 이번에는 제가 다른 사람 말을 전하고 싶어요.”
에반이 수첩에 문장을 적었다.
‘누군가를 믿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사람이 직접 확인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건 네가 만든 광고보다 낫다.”
그가 릴리에게 말했다.
릴리는 미소 지었다.
세리아가 마지막 봉인을 채우는 동안 재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제 권능은 왜 이렇게 자꾸 계약만 읽을까요? 치료 기적은 한 번밖에 못 썼는데.”
“치료에는 신성의 공급이 필요하지만, 계약의 진위를 보는 일은 결이 다릅니다.”
“무슨 뜻입니까?”
세리아는 수정판에 두 줄을 적었다.
[신성 생산]
[신성 배분 및 소유권 기록]
“신들은 보통 앞의 것만 권능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천계의 규정은 뒤의 것으로 세계를 움직입니다. 강제 헌납이 기록되면 포인트는 이미 누군가에게 귀속되었다고 처리되죠.”
“그럼 제가 헌납을 취소해도 원래 생겼어야 할 신앙이 바로 돌아오는 건 아니군요.”
“맞습니다. 회계가 취소되는 것과 자발적 신뢰가 어디에 정산되는지는 다른 문제니까요.”
에반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네 권능은 받은 돈을 되돌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돌려주고 남은 신뢰를 누구 것이라고 써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재하는 안내창을 확인했다. 눈에 익은 문구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미귀속 신뢰 기록: 존재]
[정산 조건: 미확인]
“이건 뭐죠?”
“나도 처음 봐.”
세리아가 답했다.
에반은 갑자기 경계하는 눈이 되었다.
“천계가 모든 신앙을 소유물로 계산하는데, 소유자를 지정할 수 없는 신뢰가 있다는 뜻이잖아. 그걸 기록하는 장부가 따로 있다는 것도 이상해.”
“나중에 확인합시다.”
재하가 말했다.
“지금은 사람부터 찾아야 합니다.”
세리아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어떤 신이라면 새로운 힘의 단서를 위해 모든 일을 멈췄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에게는 눈앞의 병사들이 더 중요했다.
그날 오후까지 열두 마을에 사실 확인 요청이 보내졌다. 누구도 누군가를 신도라고 적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이 본 것, 들은 것, 모르는 것을 구분해 기록했다.
신앙 포인트는 느리게 올라갔다.
[등록 신도: 26명]
[신앙 포인트: 47]
[남은 시간: 1일 14시간]
재하는 올라간 숫자보다 한 줄의 답장에 더 오래 눈을 두었다.
[북쪽 초소에서 돌아온 증언: 토마스 생존 확인]
재하는 답장을 네 번 읽었다. 생존 확인은 기뻤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토마스가 살아 있는 곳의 이름을 알아냈다면, 이제 살아서 돌아올 길을 만들어야 했다.
“브렌 씨에게 먼저 알려야겠어요.”
“그분은 이미 편지를 붙잡고 울고 계셔.”
릴리가 신전 마당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브렌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재하는 창밖으로 한참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나 바로 다음 줄은 기뻐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제17감시초소: 동틀 무렵 폐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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