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은 누가 썼습니까?”
윤재하의 질문에 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보관 증빙을 펼쳤다. 최초 수로 사고 당시 사용됐다는 천 조각은 섬유가 오래됐다는 감정 결과가 있었지만, 글씨가 적힌 종이는 후대에 다시 옮겨 적힌 사본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재하는 조금 안도했다. 세계의 비밀이라고 해서 모두 선명한 원본으로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럼 확실한 건 뭡니까?”
“원시 분류 기록 000000이 첫 신격 등록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라세가 말했다. “그리고 그 기록이 기도가 아니라 구조 호출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자료가 뒷받침합니다.”
세리아는 조심스럽게 날짜를 대조했다. 소금뜰의 수로 기둥, 무진 분지에서 발견한 편지, 북쪽의 도로 작업 장부. 세 기록은 서로 다른 장소에 보관돼 있었지만 같은 계절에 일어난 재난을 가리켰다. 장부의 숫자와 토렌이 전해 준 노랫말을 비교하자 새로운 가능성이 드러났다. 최초의 신이라는 이름은 사건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나중에 붙인 이름이라는 말인가요?” 릴리가 물었다.
“정확히는 칭호였겠죠.” 하나가 답했다. “그때 사람들은 이름 없는 구조자를 여러 방식으로 불렀습니다.”
카르도는 벽에 걸린 오래된 군용 지도를 바라봤다. 그 지도에서 북쪽의 수로는 작은 지류로만 표시돼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남겨진 민간 작업 장부에는 그 수로를 고치기 위해 수십 명이 동원됐다는 기록이 있었다. 군의 역사에서 사라진 노동이었다.
“승리한 사람만 적는 방식은 이곳에서도 같았군.”
“패배한 사람도 자기 이야기를 남길 수 있어야죠.” 재하가 말했다.
“승리와 패배로 구분할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카르도가 덧붙였다.
에반은 기록실 벽 한쪽에서 아주 오래된 광고 원본을 발견했다. 그가 만들기 훨씬 전의 문구였다.
[누구도 홀로 기다리지 않도록, 언제든 대답하는 하나의 존재]
“마케팅이란 참 오래된 발명품이구나.” 에반이 중얼거렸다.
“당신보다 오래됐다고 기뻐할 일이에요?” 릴리가 물었다.
“기뻐하는 건 아니고 자존심이 복잡해지는 중이야.”
광고 문구 아래에는 작은 수정 기록이 있었다. 처음에는 '가까운 사람이 대답한다'고 적혔으나 어느 날 '하나의 존재가 대답한다'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문구가 신격을 등록하고 기도를 계산하는 기초 규약으로 사용됐다. 000000은 그 전환 전에 남아 있던 마지막 공적 기록이었다.
라세는 보관인들의 승인을 받아 000000의 일부 화면을 열었다. 창에는 화려한 신탁이 없었다. 녹슨 수로와 홍수 경보의 순서, 구조에 참여한 사람의 수, 안전지대로 옮겨진 아이들의 수가 적혀 있었다. 이름 대신 당시 주민들이 합의한 역할 표시만 남아 있었다.
[구조 호출: 1건]
[최초 응답: 현장 대기자]
[후속 응답: 다수]
[신격 지정: 기록 없음]
[소유권 표시: 기록 없음]
재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신이 탄생한 날이라 불리던 사건의 장부에는 정작 신이 없었다.
“그럼 최초의 신은 이 사람들 중 한 명이었습니까?”
“알 수 없어요. 처음부터 별도의 존재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신이 없었다고 증명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 기록에 없던 신의 이름을 누군가 나중에 끼워 넣었다는 걸 확인하려는 거죠.”
그때 중앙 기록실의 외부 봉인이 흔들렸다. 마티르가 조합 대리인 자격으로 긴급 열람 중지를 요구했다. 그가 주장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초기 신격의 정당성이 흔들리면 오랜 계약이 일괄 무효가 되고, 그 계약에 기대 운영되던 치료소와 수로 공급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위험은 실제로 존재합니까?” 재하가 물었다.
세리아가 답했다. “일부 공급 계약은 원시 수신권의 적법성을 기준으로 묶여 있습니다. 즉시 전부 폐기하면 공급이 끊길 가능성이 있어요.”
“그럼 진실을 덮어야 하는 겁니까?” 릴리가 물었다.
“아니요. 수로와 치료소를 멈추지 않으면서 계약을 정정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재하는 자신이 경험한 문제들이 처음부터 같은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담보청은 누군가의 이름을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이름을 안정적인 자산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려면 수많은 사람이 서로를 돕는 복잡한 세상보다, 모든 도움을 한 신에게서 받은 것처럼 정리된 세상이 편리했을 것이다.
“아무 신도 책임지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재하가 마티르에게 말했다. “진짜 책임진 사람을 숨기지 말자는 겁니다.”
마티르는 차갑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당신의 신격도 위험해질 텐데요?”
“제 신격도 확인해 봐야죠.”
“그걸 대체 누가 원합니까?”
“제가요.”
재하 자신도 놀란 대답이었다. 릴리는 옆에서 조용히 그의 소매를 잡았다. 그녀는 그가 신이라는 사실보다 아픈 동생 옆에 남아 있었던 일을 기억했다. 그 장면을 빼앗을 수 있는 장부가 세상에 있을까. 그녀는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했다.
정정 절차에 관한 회의는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세리아는 원시 규칙 0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과, 그 규칙이 오늘날 모든 신앙 계약에 곧바로 적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 서로 다르다고 설명했다. 전자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후자는 별도의 심리와 영향 검토가 필요했다. 누군가가 오래전부터 잘못된 방식으로 수익을 얻었다면 피해 회복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잘못된 체계 아래서도 실제로 환자를 돌본 치료사와 수로를 수리한 기술자가 있었다.
“그분들 일까지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죠.” 릴리가 말했다.
하나는 치료소의 공급 장부 일부를 내놓았다. 과거 한 병원은 수로의 빚 때문에 폐쇄될 위기에서 신성 공급 계약을 맺었고, 그 덕분에 실제 환자들을 치료했다. 하지만 계약 뒤에는 환자의 미래 기도까지 수수료의 근거로 계산하는 조항이 붙어 있었다. 도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부당한 조항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둘 중 하나만 말하면 전체 이야기를 놓치게 된다.
“그럼 실제 치료비는 어떻게 합니까?” 재하가 물었다.
“별도 계산이 필요합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청구할 수 있는 비용과 소유할 수 없는 권리를 구분해야 해요.”
에반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제 와서 그 회계를 전부 다시 한다니, 천계의 회계사들이 나를 원망하겠군.”
“이미 여러 번 원망할 일을 하셨잖아요.” 릴리가 대꾸했다.
“이번에는 고칠 명분이라도 생겼지.”
카르도는 자신의 신전에서 지원하던 부상 병사들의 치료 기록을 조사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군의 보급 담당자가 우려를 표했다. 과거 계약이 무효라는 말이 퍼지면 납품 업체가 공급을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르도는 우려를 인정했다. 잘못된 계약을 바로잡되 실제 납품 대금과 물자 운송비는 지급하겠다는 잠정 원칙을 세우고,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신앙을 담보로 잡지 않는 새 조항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이번엔 총이 아니라 장부를 다루시는군요.” 재하가 말했다.
“장부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카르도가 답했다.
그 말에 웃던 재하는 잠시 침묵했다. 진짜였다. 사람들의 이름이 담보로 묶여 빚이 늘어나면, 어느 날 그 빚을 받으러 군인이 올 수도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카르도는 그런 체계의 강력한 집행자였다. 오늘 그는 그 체계를 수정하는 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있었다.
회의실 밖에서는 비오가 작은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맡긴 편지의 배송 진행 상황을 확인하러 왔다. 아직 수신인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답을 듣자 실망했지만, 편지가 외부 조합에 넘겨지지 않았다는 설명에는 안도했다. 비오는 재하에게 물었다.
“신님은 엄마를 찾아줄 수 있어?”
재하는 한참 생각하다 답했다. “내가 마음대로 뒤지면 안 되니까, 네가 동의한 범위에서 우편국에 확인해 달라고 할 수는 있어.”
“그러면 엄마가 어디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어?”
“그것까지는 장담할 수 없어.”
비오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이전처럼 '그럼 왜 신이야'라고 묻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맡긴 편지의 상태를 어떻게 확인하는지 배우려고 했다. 나헬은 아이에게 본인이 지정한 숫자표를 보여 줬다. 다른 사람은 숫자만 보고 편지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이 번호가 네 편지의 진행 상태를 확인할 방법이야.”
“엄마 이름은 안 적혀 있는데도요?”
“그래. 네가 보내지 않기로 한 건 우리가 억지로 써 넣지 않으니까.”
비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는 처음 신도가 0명이라는 통계 때문에 겁먹었던 때를 떠올렸다. 누군가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은 무관심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상대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래서 000000의 빈칸이 점점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후 늦게 기술자 샤브가 수로의 공급 대체 계획을 제시했다. 원래는 조합의 신성 발전망이 전부를 책임졌지만, 도시 자체의 수동 펌프와 군의 보조 난방 장비, 주민 기술조의 겨울 연료를 결합하면 최소한의 생활 유지가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안정적 공급 설비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 비용은 아직 정확히 계산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규칙을 정정하면 바로 천국이 되는 건 아니네요.” 재하가 말했다.
“어쩌면 잠깐 더 불편할 수도 있어요.” 샤브가 답했다. “잘못된 연결을 떼어 내고 다시 연결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처음 신이 됐을 때 신격 유지 점수 100을 채우기만 하면 편해질 줄 알았다. 100을 넘은 뒤에는 다음 장부가 나타났고, 다음 장부 뒤에는 더 오래된 장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이제 예전처럼 절망스럽지 않았다. 숫자 하나로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면, 숫자 하나를 맞추지 못했다고 누군가의 삶이 전부 틀리는 것도 아닐 테니까.
저녁 식사 때 에반은 별안간 종이 한 장을 돌렸다.
[긴급 회의 후 간단 만족도 조사]
릴리는 의심스럽게 물었다. “이것도 동의를 수집하려는 거예요?”
“아니, 오늘 저녁 수프의 간을 물어보는 거야.”
“왜 꼭 설문을 해야 해요?”
“내가 요리했거든. 너무 짜면 다음에 덜 넣으려고.”
재하가 한 숟갈 먹고 물을 찾았다. 수프는 엄청나게 짰다. 그는 진지하게 종이에 적었다. '개선 필요, 생존 여부 확인.' 에반은 항의하려다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적을 수 있도록 종이를 가운데 놓아두었다. 동의 없는 조사보다 바꾸고 싶은 것을 직접 말할 수 있는 설문이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왔다.
오후 늦게, 조합이 새로운 절충안을 제시했다. 000000 원본의 일부 내용을 인정하되 공개는 금지하고, 윤재하를 임시 통합 관리신으로 지정한 다음 미래 신앙 부담금을 재산정하자는 것이었다. 에반은 계약서를 펼쳐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문장만 바뀌었지 수익 구조는 그대로야.”
나헬은 보관인들의 의견을 확인했다. 기록실은 원본의 공개 범위를 지키면서도 허위 소유권 표시는 정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당장 시도하면 조합이 중앙 송수신망을 끊을 위험이 있었다. 그때까지 주민들의 물과 등불을 어떻게 지킬지 계획이 필요했다.
재하는 보관인들에게 말했다.
“제가 여러분 기록을 공개하라고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허위로 붙은 소유권 표식을 떼어 내는 데 동의하시면, 실제 필요한 부분만 함께 확인할 수 있을까요?”
하나는 긴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보관인들은 각각 다른 조건을 달았다. 복구 전에 사본이 어디에 남는지, 누가 나중에 열람할 수 있는지, 복구 절차 자체를 중단할 수 있는지 명확해야 했다. 재하는 모두 적었다. 처음 신이 되던 날처럼 안내창에서 '동의'라는 글자 하나만 누르는 방식은 더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누리가 오래된 명령을 찾아냈다.
[원시 분류 규칙 0: 응답을 소유권으로 변환하지 말 것]
[원시 분류 규칙 1: 응답을 신격 자산으로 적산할 것]
[규칙 0 비활성화 승인자: 미상]
“누군가 규칙을 뒤집었군요.” 재하가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그리고 왜 규칙 0을 지웠는지 기록이 부족합니다.”
화면이 다시 깜박였다.
[규칙 0 재가동 요청 가능]
[필요 요건: 원본 보관인 승인, 공급 대체 계획, 최초 응답자의 동의]
재하는 마지막 문구를 몇 번 읽었다.
“최초 응답자라면 지금 살아 있을 리 없잖아요.”
누리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생존 여부: 확인되지 않음]
[응답 위치: 도시 지하 0층]
그때 기록실 아래에서 사람의 발걸음처럼 느린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제7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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