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녹기 전이라니. 북쪽에선 사실상 기한이 없는 거 아닙니까?”
윤재하의 질문에 에반은 찻잔을 들고 잠깐 고민했다.
“아니지.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도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큰일 나. 기한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때가 제일 무서워. 보험 약관 같거든.”
숙소 주인은 두 사람을 보더니 미지근한 물을 더 가져다줬다. 그는 이곳에 오는 신들이 대개 비슷한 대화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신은 자기 이름을 적은 간판을 세우려 하고, 어떤 신은 기적을 무료로 보여 주겠다고 제안한다. 대부분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간다.
“도시가 신을 쫓아냅니까?” 릴리가 물었다.
“그렇진 않소. 여기선 신이라는 이유로 말을 먼저 듣거나, 먼저 믿어 주지 않을 뿐이지.”
재하는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새삼 공정한 도시였다. 대접을 못 받아서 약간 서운할 정도로.
아침이 되자 세리아가 어젯밤의 종이를 검토했다. '마지막 질문'이 무엇인지, 누구에게 답해야 하는지, 자료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사칭을 의심할 이유가 충분했다. 나헬은 자신의 이름으로 그런 종이를 보낸 적이 없다고 확인해 줬다.
“그럼 익명의 협박입니까?” 재하가 물었다.
“협박이라고 판단할 근거도 부족합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다만 공식 기록실의 문장이 아니니 그걸 출입 허가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도시 광장으로 나갔다. 눈은 옅게 내렸고 회랑 아래에는 사람들이 익숙한 걸음으로 움직였다. 빵집 앞의 작은 종은 손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빵이 구워졌다는 표시였고, 수리점 앞 나무패에는 주인이 직접 쓴 비용표가 붙어 있었다. 이름 없는 도시라고 해서 사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름표를 붙여야 할 필요가 없는 물건이 많을 뿐이었다.
광장 북쪽에는 수백 개의 작은 우체통이 있었다. 대부분 손바닥 크기였다. 유리문이 달린 것, 돌로 만든 것, 천 조각을 덮은 것까지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그 앞에 선 사람들은 편지를 넣기도 하고 다시 가져가기도 했다. 아무도 누가 무엇을 넣는지 들여다보지 않았다.
“여기가 기록 000000이 있는 장소입니까?”
“아뇨.” 나헬이 답했다. “여긴 보내지 않을 권리를 연습하는 곳입니다.”
“우체통인데요?”
“우체통에 넣으면 반드시 보내야 한다고 누가 정했죠?”
에반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 도시의 서비스 운영 방식은 좀 충격적이군.”
나헬은 가장 낡은 우체통 하나를 가리켰다. 그 상자에는 보내는 구멍이 없었다. 여닫는 문과 작은 자물쇠만 있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사람들의 이름과 기도 기록을 모았다고 한다. 편지를 넣으면 수신인을 정하기 전에 기록부터 남았다. 그 기록은 결국 신앙 수요로 계산됐고, 조합이 장부에 적은 순간부터 돌려달라고 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체통을 없앴습니까?”
“반대로요. 자기 편지를 자기가 보관할 수 있는 우체통을 만들었습니다. 여기 상자는 주인이 직접 열쇠를 갖습니다.”
재하는 한참 그 장면을 바라봤다. 누군가에게 말하기 위해 쓰는 편지와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같은 모양의 종이에 적힐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새로웠다.
그때 릴리가 발을 멈췄다. 길가에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뒤집힌 나무 상자 위에 앉아 있었다. 아이의 왼손에는 검은 잉크가 묻어 있었고, 오른손은 소매 속에 감췄다. 아이는 작은 종이를 열 번쯤 접었다 펴다가 결국 찢으려 했다.
“도와줄까?” 릴리가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읽어 주지 않을게.”
“아는 글자도 없는데?” 아이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릴리는 옆에 앉았다. 아이는 한참 후에야 자신을 '비오'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다. 그게 진짜 이름인지 별명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재하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궁금하다고 해서 다가갈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뭘 쓰려던 거야?” 릴리가 물었다.
“엄마한테 보낼 편지.”
“엄마는 어디 계셔?”
“몰라. 내가 안 적어서.”
아이는 손바닥만 한 종이에 주소를 쓰기 시작했다가 매번 지워 버렸다. 누군가 주소를 알게 되면 어머니가 다시 낡은 장부에 등록될까 두려웠다는 것이다. 과거 가족의 이름이 수로 유지 계약에 묶여, 어머니가 병원에서 진료받을 때마다 '신성 공급 비용'이 추가되었다고 했다. 비오는 어느 날 더는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도시로 왔지만, 어머니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다고 편지를 안 쓰면 엄마가 여기 있는 걸 모르잖아.” 비오가 울먹였다.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둘 다 걱정되는구나.”
“신님이 해결할 수 있어?”
비오는 릴리 뒤에 선 재하를 보았다. 재하는 거의 반사적으로 '해결해 주겠다'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남의 주소를 마음대로 찾아서 알려 주는 행위 자체가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바로 해결할 수는 없어. 대신 네가 원하는 방식이 있는지 물어볼 수는 있어.”
아이는 재하를 노려봤다.
“그럼 당신은 왜 신이야?”
“그 질문을 벌써 스무 번쯤 들었습니다.”
“대답은?”
“아직 잘 모르겠어.”
비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릴리가 웃음을 터뜨리자 아이도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나헬은 비오에게 두 가지 방법을 설명했다. 도시의 독립 우편망으로 수신인이 직접 요청한 우편물만 전달할 수 있었고, 중계소에 메시지를 맡겨 어머니가 원할 때 찾게 하는 방식도 있었다. 어느 쪽도 어머니가 살아 있는지, 편지를 받을 수 있는지는 보장하지 못했다. 비오는 한참 고민하다 두 번째를 택했다.
“엄마가 원하면 읽어도 돼.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
비오는 편지를 한 줄만 남겼다.
'난 아직 기다리고 있어.'
에반이 우편 요금표를 확인했다. 이상하게도 비싼 것은 배송료가 아니라 기록을 외부에 제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보호 장치였다. 누군가에게 말을 전하는 자유를 지키는 일에도 사람과 재료가 들어갔다.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를 두고 도시 주민회에서도 오래 논쟁했다고 한다.
“그럼 이 시스템도 공짜는 아니네요.” 에반이 말했다.
“공짜가 아닙니다.” 나헬이 답했다. “대신 값을 치른 사람이 편지의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지요.”
재하는 그 말을 적었다. 과거 자신의 신전은 무료 치료를 내세웠다가 공급이 끊길 뻔한 적이 있었다. 선의만으로 운영되지 않는 일은 많다. 그러나 비용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사람의 미래 전체를 담보로 잡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비오가 편지를 맡긴 뒤, 릴리는 아이의 손에 묻은 잉크가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비오는 그것이 도시 밖에서 가져온 계약용 잉크라고 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종이에 손을 대다가 묻었다는 것이다. 잉크가 묻은 자리에서는 작은 문양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재하는 본능적으로 권능을 쓰려다가 멈췄다. 아이가 동의했는지, 그것이 해로운 물질인지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릴리는 먼저 잉크 때문에 아프거나 가려운지 물었다. 비오는 따갑지는 않다고 했다. 나헬은 의료 담당자를 불러 피부 상태를 살폈고, 세리아는 잉크가 원래 어떤 계약의 일부였는지 확인했다.
“예전에 이런 잉크를 본 적 있어요.” 에반이 말했다. “서명한 종이가 없어져도 손에 남은 표식으로 계약자를 찾는 장치였죠.”
“그럼 지금도 추적할 수 있다는 겁니까?” 재하가 물었다.
“가능성을 확인해야 해. 잉크가 남아 있다고 무조건 추적되는 건 아니야.”
에반은 공개 장부에서 계약용 잉크의 생산 시기와 용도를 찾아왔다. 오래된 감시 장치 일부는 이미 폐기됐고, 도시 안에서는 자동 인식이 막혀 있었다. 다행히 비오의 손에 남은 잉크가 즉시 위치를 송신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의 의사와 무관하게 식별표가 남아 있다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비오는 손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이거 지우면 엄마가 나 못 찾는 거 아니야?”
릴리는 그 말을 듣고 급히 지우려고 했던 마음을 바꿨다. 잉크는 아이에게 두려움이면서 동시에 어머니가 자신을 알아볼 마지막 표식이었다. 그는 의료 담당자와 함께 위험 여부를 확인해 주되, 제거 시점은 비오가 정하도록 했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돼.”
“근데 내 손이 다른 사람한테 보여도 괜찮을까?”
“보여 줄 사람을 네가 정할 수 있지.”
비오는 소매를 내렸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재하에게 자기가 쓰던 펜을 보여 줬다. 낡은 나무펜 끝에는 작은 글씨로 '나중에'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가 일이 바쁘다고 자꾸 편지를 나중에 읽겠다고 해서 화가 난 날, 아이가 붙여 놓은 이름이었다.
“여기에 오기 전엔 나중에가 싫었는데, 지금은 나중에도 괜찮을 것 같아.”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으니까.”
비오는 잠시 그를 보더니 두 번째 종이를 꺼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에게 쓰는 편지였다. 글자는 아직 서툴렀지만 그는 그것을 개인 우체통에 넣기로 했다. 우체통은 보내지 않으면 어디에도 가지 않는 상자였다. 재하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편 서비스였지만 비오에게는 처음으로 자기 마음을 지킬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 사이 우체통 관리소는 사흘 전 도착한 외부 편지 한 통을 배송하지 않고 있었다. 수신인이 누군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리인은 재하에게 그 사본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왜 지연됐는지 절차를 설명했다. 발신인은 '이름이 사라진 최초 도시의 사람들'이라고만 적었고, 수신 대상은 '우리 말을 들은 모두'라고 돼 있었다. 지나치게 넓은 수신 범위 때문에 개인 편지를 함부로 열 수 없었다.
재하는 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만큼 받기 싫어하는 마음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처음 신이 됐을 때는 누군가 기도해 주기만을 바랐는데, 이제는 모든 기도를 듣는 일이 과연 축복인지 의문이 들었다. 상대가 자기에게 말하지 않은 내용까지 알아내며 좋은 신이 될 수는 없었다.
에반은 우체통의 비용표 아래 작게 광고 문구를 하나 적었다가 릴리에게 들켰다.
[당신의 비밀, 합리적인 가격에 안전하게 보관]
“이것도 판매하려고요?”
“사람들이 서비스가 있는 걸 알아야 쓰지.”
“비밀을 맡기는 서비스를 광고하면 그 광고를 보고 누가 왔는지 추적할 수도 있겠죠?”
에반은 펜을 내렸다. 잠시 뒤 광고판 대신 안내문을 새로 만들었다. 우체통이 실제로 제공하는 기능, 이용 비용, 편지 삭제 방법, 기록이 남는 범위가 나란히 적혔다. 장식 문구는 없었다.
“이게 더 낫네요.” 릴리가 말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건조한 카피야.”
“그래도 누군가는 읽고 안심할 거예요.”
에반은 그 말에 조금 오래 머물렀다. 누군가를 끌어들이는 광고가 아니라, 누군가가 오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그런 문장을 쓰는 일은 그에게 여전히 어려웠다.
점심 무렵, 우체통 관리실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검사관 둘이 나타나 우체통의 목록과 외부 배송 기록을 요구했다. 그들은 원시 수신권 조합의 위임장을 제시했다. 북방 도시에서 유통되는 무기명 우편이 기록 000000과 관련된 보존 자료를 은닉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명분이었다.
“법원 명령입니까?” 세리아가 물었다.
“긴급 조사권입니다.” 검사관이 말했다.
“그 권한으로 사적인 편지까지 열람할 수 있습니까?”
검사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사이 우체통 주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누구는 자료 제출에 찬성했다. 과거 계약에 피해를 본 사람이 있어도 조사할 수 없다면 정의롭지 않다는 이유였다. 누구는 자기 편지를 공개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재하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려다 자신이 누구 편에 설지 당장 판단하지 못했다. 조사할 정당한 사유가 있을 수 있었다. 동시에 전혀 관계없는 편지를 모두 뒤지는 것은 과도했다.
나헬은 우체통의 주인들이 모여 지정한 보존 대리인에게 조사 범위를 검토하게 했다. 사전 봉인이 필요한 자료와 개인의 동의가 필요한 자료를 분리했다. 검사관에게는 실제로 조사에 필요한 문서 번호를 요구했다. 그들이 제시한 번호는 000000이 아니었다.
[요구 자료 번호: 000000-A]
[자료 종류: 이름 회수 동의 신청서]
“이름 회수요?” 재하가 물었다.
나헬의 표정이 굳었다. 그 이름을 듣자 주변의 노인 둘이 조용히 일어났다.
“그 양식은 이 도시에 남아 있으면 안 돼.” 한 노인이 말했다.
세리아가 물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이 아니오.” 노인이 답했다. “돌려받을 이름을 이미 갖고 있지.”
그는 아주 오래된 문서를 내놓았다. 겉면은 깨끗했으나 속표지에는 여섯 개의 작은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내 이름을 돌려받기 위해 내 이름을 남에게 넘기지 않는다.'
재하는 문서의 표지를 넘기려다 손을 멈췄다. 주인의 허락을 먼저 구해야 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속표지 안에는 지우개로 지운 흔적이 아니라 애초부터 쓰이지 않은 빈칸이 있었다.
[000000-A: 최초의 거절]
[거절 사유: 발화자의 이름은 신앙의 담보가 아님]
그 순간 우체통 관리실의 오래된 송수신기가 스스로 켜졌다. 잡음 사이로 소년인지 노인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름을 갖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물어라.”
재하가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한 번 더 말했다.
“대답이 없으면, 모른다고 적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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