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뻗은 길 위에 검은 인장이 떠오른 순간, 윤재하는 아주 오래된 회사 회의가 떠올랐다.
배송 일정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치료소에도 곧장 전달됐다. 릴리는 대체 일정을 숨기지 않고 설명했다. 예정이 늦어지는 이유와 가능한 조치를 함께 알리자 사람들의 불안도 조금 줄어들었다.
고객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담당 부서들이 먼저 모여 해결 비용을 누가 받을지 다투던 풍경이었다.
“저 길을 막을 권한이 있다고요?” 재하가 소리쳤다.
검은 인장은 아무 감정 없이 문장을 내보냈다.
[수신권은 원시 수신권 조합이 보유합니다.]
[최초 회신이 전달될 경우 채권 청구액 재산정 필요]
[검증 전 전달 정지 요청]
“재산정이 아니라 사람이 뭘 말했는지 확인하는 길입니다.”
[계약 분쟁에 해당합니다.]
재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 수백 년 동안 전하지 못했던 말을 지금 겨우 전달하려는데, 다시 계약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흥분해서 권능을 휘두르면 주민들이 어렵게 지킨 원본의 보관 권리를 침범할 수도 있었다. 그는 손을 내리고 세리아를 바라봤다.
“지금 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뭡니까?”
세리아는 이미 집행 신청서를 읽고 있었다. “길을 즉시 열라고 명령할 수는 없지만, 임시 정지 요건을 다툴 수 있습니다. 조합이 원본 수신자의 의사를 대리한다는 근거가 없거든요.”
“그럼 그 부분부터 합시다.”
미라는 빛나는 수로의 가장자리에서 지면을 확인했다. 형체가 실체인지, 오래된 기계가 만든 기록 영상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이 발을 디뎌서는 안 되는 불안정한 길이었다. 그녀는 기술병들에게 손짓해 진입선을 표시하게 했다.
“빛난다고 다리가 되는 건 아닙니다.”
“명언이네요.” 재하가 말했다.
“명언 아니라 안전 지침이에요.”
카르도는 병사들에게 마을 출입로만 지키라고 명령했다. 조합의 집행관이 나타나더라도 먼저 공격해서는 안 됐다. 그는 전쟁신이었지만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힘은 싸움을 참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배워 가고 있었다.
소금밭의 형체는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토렌이 '여기 있다'고 답했을 때 처음 나타났던 밝은 선이 검은 인장에 눌려 희미해졌다. 재하는 형체가 진짜 사람이라면 얼마나 답답할지 생각했다. 그에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 수없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가 말을 할 수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형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종을 한 번 울렸다.
“우리 말을 들었다는 표시 같아요.” 이다가 말했다.
“동의하지 않고도 듣기만 했다는 뜻일 수 있겠죠.” 세리아가 덧붙였다.
그들은 일단 질문을 멈췄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형체는 종을 두 번 울렸다. 바위섬에서 발견한 규칙에 따르면 '지금은 건너갈 수 없음'이었다. 세 번째 종소리가 이어졌다. 기다려 달라. 그러더니 네 번째로는 종이 울리지 않았다. 형체가 등불을 들어 올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네 번째 신호가 없군요.” 재하가 말했다.
토렌은 고개를 저었다.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아직 못 찾았을 뿐.”
기다리는 동안 다른 문제가 터졌다. 조합이 회신 전달을 멈추게 하기 위해 인근 치료소의 신성 공급 경로에 ‘사전 검증 부담’을 부과한다는 공문을 보냈다. 재하가 직접 운영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공동 공급망에 연결돼 있어 우회 운영이 필요해졌다. 릴리는 치료 담당자에게 현재 보유량과 대체 지원 가능 시간을 확인했다.
“수로가 고장 나도 환자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릴리가 말했다.
에반은 조합의 비용 청구서를 읽다가 코웃음을 쳤다. “옛날 계약 방식 그대로야. 서류가 해결되기 전까지 돈을 예치하라고 하고, 나중에 못 돌려주면 수수료를 붙여.”
“그럼 이건 실제 공급 비용이 아니라 소송 비용을 환자에게 떠넘기는 거군요.”
“그럴 가능성이 커. 다만 조항을 더 봐야 해.”
에반은 한때 자신이 작성했던 비슷한 조항을 찾았다. 거기에는 이용자의 신앙 관계를 계약의 안정성을 위한 보증으로 처리하는 문장이 있었다. 그가 이전에 일부 반환을 도왔지만 여전히 남아 있던 방식이었다. 이번에는 피해가 새로 생기지 않게 해야 했다.
“조합의 주장과 별개로 공급 담당자들에게 실제 비용을 공개하자.” 에반이 말했다. “주민들이 필요한 돈을 낼 수 있다면 정당한 비용은 낼 수 있어. 하지만 없는 빚은 내지 말자.”
릴리는 치료소의 장부를 공개할 수 있는 범위로 정리했다. 개별 환자의 이름은 가리고, 필요한 소모품과 운송비만 적었다. 카르도는 군 비축품 중 의료 지원에 사용할 수 있는 물량을 확인했다. 원래 계약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긴급 상황에 대응할 방법을 찾았다. 재하는 신성 포인트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기보다 누가 무엇을 실제로 운반할 수 있는지부터 물었다.
그런데 신전 내부에서 반대가 일어났다. 한 신도는 재하에게 신성 포인트가 있다면 지금 당장 전부 써서 회선을 열라고 요구했다.
“신님이시면 할 수 있잖아요!”
“원본의 주인이 아닌데 마음대로 열 수는 없습니다.” 재하가 답했다.
“그럼 신의 권능은 어디에 쓰려고 가지고 계십니까?”
“그 권능이 남의 문을 허락 없이 여는 데 쓰이지 않도록 하려고요.”
그 신도는 화가 나서 자리를 떠났다. 재하는 붙잡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걱정하던 환자가 누구인지는 확인했다. 어린 손자가 치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하는 아이에게 약을 보내 줄 경로를 찾았다. 신도를 유지하려고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신전의 치료소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료 지원 물량을 계산하던 릴리는 밤늦게까지 장부를 붙잡고 있었다. 원시 수신권 조합의 집행 신청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공급 담당자들이 불안해하며 물자를 보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법원의 결정이 아닌 시장의 반응이었다. 누군가가 내일 책임을 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늘의 약을 보내지 않았다.
재하는 릴리 옆 의자에 앉았다. “제가 뭘 도울까요?”
“이 물품 목록을 두 번 대조해 주세요. 환자 이름은 가려 놨어요.”
그는 조용히 수량을 확인했다. 전쟁신의 창고에서 지원할 수 있는 붕대, 주민들이 보유한 소독약, 무진 분지에서 보낼 수 있는 깨끗한 물. 그중에는 납품 시기가 맞지 않는 물품도 있었다. 무리하게 약속하면 치료소의 믿음을 잃게 된다. 그는 빈칸에 '도착 미확인'이라고 적었다.
릴리가 물었다. “신님은 처음부터 이런 일을 하실 줄 아셨어요?”
“아뇨. 원래는 손에서 빛만 내면 신이 되는 줄 알았죠.”
“그때 빛이 정말 고맙긴 했어요.”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그 말은 서로에게 필요했다. 그가 기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아이의 열이 내렸던 밤은 그대로 소중했다. 다만 그 순간을 빌미로 다른 사람의 삶을 소유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을 뿐이다.
잠시 뒤 카르도가 들어왔다. 그는 무거운 보급 명세서를 탁자에 놓았다. 검은 표지에 찍힌 군인 인장이 선명했다.
“지원할 수 있는 건 여기에 적었다. 하지만 이 물자를 빼면 국경 초소의 겨울 대비가 늦어진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부 받으면 안 되겠네요.”
“군의 책임도 계산해야 하니까.”
릴리는 가장 급한 환자에게 필요한 품목만 표시했다. 나머지는 다른 경로를 알아보기로 했다. 누구도 모든 것을 해결하는 척하지 않았다. 카르도는 명세서 한 장이 수많은 군인의 겨울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전쟁신이 과거처럼 명령으로 물자를 빼앗아 오겠다고 했다면 해결은 빨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빠른 해결 뒤에 누군가가 굶을 수도 있었다.
에반은 회의가 끝나자 종이에 큰 글씨를 적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당신의 평생 기도가 아니라 오늘 도착할 소독약입니다.]
“광고는 싫다니까요.” 재하가 말했다.
“광고가 아니라 공급 요청서야. 보낼 곳에만 보낼 거라고.”
그의 말처럼 이번 종이는 마을 공지판 대신 이미 협력 중인 의료 물자 창고에 전달됐다. 필요한 수량과 도착 기한, 운송비가 적혀 있었다. 기부를 원하는 사람은 할 수 있었고,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됐다. 릴리는 그 문장 뒤에 다른 표를 붙였다. 공급이 확정되지 않은 물품은 환자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말자는 주의였다.
재하는 장부를 덮었다. 자신에게 모인 신앙 포인트로 전부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예전에는 부끄러웠다.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스스로 돕기 시작하면 신이 모든 문제의 주인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미라는 그 사이 운송로의 다리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며칠 전 임시로 놓았던 판자는 여전히 사용할 수 있었지만, 무거운 약품 마차가 한꺼번에 지날 만큼 튼튼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화물을 두 번 나누어 보내라고 권했다. 릴리는 서둘러 한 번에 보내 달라는 요구를 철회했다. 약이 하루 늦게 도착하는 것이 불안했지만, 무너진 다리 아래로 약과 사람이 함께 떨어지는 것은 더 끔찍한 일이었다. 안전과 속도가 충돌할 때 누가 어떤 근거로 결정했는지도 장부에 남겼다.
그때 한 약품 관리자가 신전으로 연락해 왔다. 그는 조합의 경고문을 보고 물자 배송을 보류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실제로 법적 운송 금지 명령이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세리아가 공문을 대조한 뒤 확인된 내용을 설명했다. 관리자는 곧바로 배송을 재개했다. 거창한 기적 없이 공문의 의미를 정확히 읽는 것만으로도 한 대의 마차가 길을 나선 것이다.
오후가 되자 세리아가 조합의 임시 집행 신청에 대한 이의 답변을 받았다.
[정지 요청 일부 인용]
[원본 회신 내용의 열람: 보류]
[현장 통신 경로의 물리적 방해: 금지]
[수신권 주장에 관한 별도 심사 개시]
“적어도 길을 막지는 못하게 됐네요.” 재하가 말했다.
“열람이 허용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리아가 강조했다. “누가 내용을 볼 자격이 있는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그날 해 질 무렵 바위섬의 형체가 다시 일어섰다. 종소리가 한 번 울리더니 오래된 구리선이 진동했다. 길을 열 수는 없지만 방해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형체는 드디어 말을 했다.
“나는 대답을 운반하려던 사람이다.”
그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았고 오래된 녹음처럼 갈라졌다.
“누구에게?” 재하가 물었다.
“저쪽의 아이에게.”
“왜 가지 못했습니까?”
형체는 한참 침묵했다. 그 사이 바람이 소금 먼지를 날렸다. 마을 사람들은 말없이 기다렸다. 이제 말을 할 수 없는 기록을 대신해서 누군가 멋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건너가려 했을 때, 분류원이 길을 바꿨다.”
“분류원이요?”
“내가 하려던 말은 구조 신호였고, 그들은 내가 하려던 말을 신의 응답이라고 분류했다. 그러고는 서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재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주 작은 일의 시작이었다. 한 사람에게 ‘여기 있다’고 알려 주면 됐는데, 누군가 그 일을 계약으로 바꾸었다.
“당신은 그 뒤 어떻게 되었습니까?”
형체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저 아이에게 가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아이를 구했다.”
“누가요?”
“그건 기록실에도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이름을 남기지 않았으니까.”
토렌이 숨을 들이켰다. 자기 마을의 노래에는 이름 없는 사람이 마지막에 건너간다는 구절이 있었다. '건너오지 마, 내가 갈게.' 그 문장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형체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는 헤른이다. 최초의 회신을 맡은 전달인. 하지만 최초로 대답한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가 등불을 들자 빛 속에서 짧은 문장이 나타났다.
[최초 회신 작성자: 이름 미기재]
[회신 내용: 기다려. 내가 간다.]
재하는 자신도 모르게 소금밭 쪽으로 한 걸음 나갔다. 미라가 즉시 붙잡았다.
“실제로 갈 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알아요.”
그는 멀리 형체를 바라봤다. 신이 처음 한 말이 누군가를 믿어 달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간다'였을지도 모른다.
헤른은 등불을 내렸다. 그러자 원시 우편로가 마지막 표식을 남겼다.
[회신 원본 전달 실패 사유 정정 요구]
[정정 청구인: 사망한 전달인 헤른의 보존 기록]
재하는 오래전의 실패가 이제야 공식적인 질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아직 가장 큰 의문이 남아 있었다. 아이를 구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 사람은 왜 후대에 '최초의 신'이라 불리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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