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인간에게 보낸 편지라니.
윤재하는 천계 우편함에 떠 있는 반투명한 문장을 세 번째 읽고 있었다.
[나를 믿지 말고, 내가 왜 대답하지 않았는지 물어다오.]
“이건 신의 홍보 문구로는 영 아닌데.”
에반이 뒤에서 말했다. 그는 잠옷 대신 잘 다린 검은 조끼를 입고 있었다. 새벽 두 시에 남의 신전에 들른 악마가 왜 그렇게 단정한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당신은 이 문장도 광고로 보입니까?”
“어떤 문장인지보다 어디에 걸 것인지가 중요하지. 신전 입구에 걸면 방문객들이 질문을 쏟아 낼 거고, 담보청 앞에 걸면 경비병들이 우리를 쫓아내겠지.”
“그쪽이 더 자연스럽네요.”
릴리는 탁자에 따뜻한 물을 올려놓았다. 무진 분지에서 돌아온 뒤에도 그녀의 장화에는 마른 진흙이 묻어 있었다. 일정을 정리하느라 신전에 늦게까지 남은 사람은 재하만이 아니었다. 릴리는 탁자에 놓인 봉투를 살펴보더니 내용보다 받는 사람 칸을 먼저 보았다.
“수신인이 그냥 ‘인간’이에요. 특정한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아닌가요?”
“원본 봉투도 그렇습니다.” 누리의 목소리가 울렸다. “원시 우편로 0번에서 복원된 정보는 발신 직위, 수신 범주, 문장 두 개뿐입니다. 발신자 개인명과 전송 일자는 판독되지 않습니다.”
세리아는 자신이 가져온 감찰 수첩을 펼쳤다. “그러면 최초의 신이 정말 보냈다는 사실도 아직 검증 중이라는 뜻입니다. 직위 표시는 누군가가 나중에 붙인 분류일 수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당장 발표하면 큰일 날 뻔했네요.”
“뭐가 좋다는 거지?” 에반이 되물었다.
“아직 확신할 수 없다는 걸 알아냈잖아요.”
에반은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요즘 그는 말하지 않는 횟수가 늘었다. 그가 설계했던 옛 반환 절차 때문에 사람들이 겪은 일이 드러난 뒤부터였다. 재하는 그것이 반성인지, 새로운 사업 구상을 위한 집중인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문제는 편지보다 우편함 아래 붙은 좌표였다.
[다음 조사 대상: 첫 번째 기도의 발신지]
[공식 지도 대조: 실패]
[옛 우편로 경유 표시: 세 갈래]
세 갈래 중 어느 쪽이 발신지로 이어지는지 표시는 없었다. 가장 오래된 길은 무진 분지에서 서쪽으로 꺾여 가다가 거대한 흰 공백 앞에서 끊겼다. 재하는 공백의 가장자리를 확대했다. 산도 강도 마을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천계의 지도는 모르는 곳을 회색으로 표시하는데, 이 부분만은 종이 자체를 긁어 낸 것처럼 새하얬다.
“지도 업데이트가 안 된 겁니까?”
“삭제 흔적입니다.” 누리가 대답했다. “다만 삭제 주체와 이유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전 세계의 GPS를 믿은 게 잘못이지.”
릴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피에스요?”
“고향에서 길 잃은 사람을 더 자신 있게 길 잃게 만드는 물건이 있었어요.”
그들은 웃었지만 결론은 가볍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편지 한 통을 근거로 타인의 기록을 공개하거나 위험한 곳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세리아는 우선 원본 보관자인 무진 분지 주민회에 연락해 복원 사실과 조사 계획을 알리자고 했다. 그 결정에 재하는 즉시 동의했다.
아침이 밝자 신전 마당에 작은 탁자가 놓였다. 에반은 이미 안내장을 만들어 왔다.
[최초의 신이 보낸 미스터리 편지! 세상을 바꿀 진실 대공개!]
재하가 종이를 접었다.
“왜 접어?”
“내용에 ‘진실’이 몇 개인지도 모르니까요. ‘미스터리’ 말고 확인된 정보만 써 주세요.”
에반은 한숨을 쉬더니 새 안내장을 썼다.
[옛 우편로의 미분류 서신 관련 자료 열람 일정 안내. 일부 내용 미확인.]
“방문자가 절반으로 줄겠군.”
“절반이 사실을 알고 온다면 좋은 일입니다.”
“너는 분명 신계 마케팅의 불행이야.”
그렇게 시작된 공개 열람회에는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첫 신도 릴리의 동생 노아도 있었다. 그는 아직 무리하면 열이 오르기 때문에 치료사에게 허락받은 시간만 머물렀다. 노아는 편지를 쳐다보다가 재하의 옷자락을 잡았다.
“신님은 정말 기도를 들을 수 있어요?”
“가끔. 누리한테 알려 달라고 할 때가 더 많지.”
“그럼 누리 님이 더 대단한 거네요.”
“요즘 그런 의심을 하고 있어.”
누리가 창백한 빛을 한 번 깜박였다. “칭찬으로 처리하겠습니다.”
노아는 두 번째 문장을 조용히 읽었다. 왜 대답하지 않았는지 물으라는 부탁. 아이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프던 밤에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면 무서웠을 것 같다고. 릴리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날 밤 그녀는 동생을 지키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재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겨우 한 번의 기적을 사용했고, 그 전에는 물을 끓이고 젖은 수건을 갈았다.
“맞아. 아무 대답도 없으면 무섭지.” 재하가 말했다. “그러니까 왜 답하지 못했는지 찾아보려는 거야.”
열람회가 끝나 갈 무렵, 무진 분지에서 온 우편배달부 하심이 도착했다. 그는 아흔세 살답지 않게 커다란 가죽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고 있었다. 바니가 그 뒤를 따라 뛰어왔다. 아라가 보낸 공문을 내밀기 전, 하심은 재하를 노려보았다.
“사람들 목소리를 돌려준다더니 이젠 신이 보낸 편지까지 가져갈 셈이냐?”
“가져갈 계획은 없습니다.”
“신이 하는 말을 듣고 누가 믿겠어.”
“그래서 주민회 확인을 받으려고요.”
하심은 한참 그를 보다가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낡은 우편물 열람 규정과 젖어 찢어진 거리표가 있었다. 주민회는 원본 우편로의 보관 권한을 넘기지 않는 조건으로 조사에 협력하기로 의결했다. 현장에 갈 사람도 기록을 가져가고 싶다면 사본의 필요성을 먼저 설명해야 했다.
“사본도 함부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아라의 편지 끝에 적혀 있었다. “분지 주민들의 미응답 발화와 관계가 없는 구간만 공개합니다.”
재하는 문서를 두 번 읽었다. 편지 하나 때문에 어렵게 지킨 주민들의 선택권이 다시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하심 어르신. 이 거리표는 어디에서 찾으셨습니까?”
“라온이 죽기 전 남긴 우편 자루에서. 난 한평생 그 길을 찾았지. 지도에는 없었어도 길을 지나간 사람들의 신발에는 진흙이 묻었거든.”
낡은 표에는 지명 대신 세 개의 표식이 있었다. 물방울, 빈 그릇, 손바닥. 하심은 빈 그릇을 가리켰다.
“옛날에는 저쪽을 ‘소금뜰’이라 불렀다더군. 땅에서 소금이 솟아 농사가 안 된다고. 그 뒤로 이름이 지워졌어.”
에반이 굳은 얼굴로 표를 살폈다. “소금뜰이라면 담보청에서도 출입 제한된 구역이야. 거기서 제일 먼저 집계한 기록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어.”
“무슨 집계를요?”
“신앙의 양이 아니라, 어떤 말이 기도인지 정하는 첫 분류표.”
말이 기도가 되는 기준. 재하는 무진 분지에서 본 숫자 12,408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한 당부까지 신앙 자산으로 분류했던 장치. 그 장치가 가장 처음 어떤 목소리를 기도라고 판정했는지를 알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오류가 어디서 시작됐는지도 알 수 있을지 몰랐다.
세리아는 거리표를 탁자에 올려놓고 출처와 손상 정도를 기록했다. 에반은 분류표 이야기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이렇게 신중하게 일을 진행하는 동안 바니는 작은 의자에 올라가 안내문을 읽었다.
“첫 번째 기도라면 첫 번째로 말을 한 사람을 찾아야 하나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 재하가 말했다. “처음으로 기도라고 불린 말을 찾아야 할 수도 있어.”
“그럼 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잖아요.”
“살아 계신다면 그러고 싶다.”
“죽었다면 그 사람이 남긴 말만 듣고 마음을 다 알았다고 하면 안 되는 거죠?”
재하는 바니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하심에게 배웠는지, 어린 우편배달부는 기록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누구보다 엄격했다.
점심 무렵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다툼이 벌어졌다. 돌무더기 마을에서 온 중년 남자가 자신의 어머니가 남긴 기도문을 이곳의 편지와 나란히 전시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을 앓으며 매일 작은 공책에 소망을 적었고, 아들은 그 공책이 역사적인 자료라고 믿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오래 기도하셨는데, 천계에 기록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재하는 공책을 바로 받지 않았다. 남자에게 어머니가 생전에 자신의 글을 공개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남자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식이니까 알아서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어요. 다만 어머님이 혼자 남기고 싶었던 글도 있을 수 있잖아요.”
릴리가 남자에게 공책을 돌려주며 먼저 가족끼리 보존 범위를 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자는 서운한 얼굴로 돌아섰다. 재하는 그를 붙잡아 억지로 설득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뒤 남자는 다시 찾아와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한 장만 동네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일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 장에는 병이 낫게 해 달라는 말 대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비가 오면 우산을 챙겨라'라고 쓰여 있었다.
“어머니는 저한테 하신 말씀인데, 저는 기도라고만 생각했네요.”
재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 문장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소중했다. 굳이 신앙 점수로 바꾸지 않아도 됐다.
반대편 책상에서는 세리아가 분류표를 만들고 있었다. 확인된 원본, 후대 복제본, 개인의 해석, 출처 미확인. 사람들은 비슷해 보이는 자료를 한데 쌓으려 했지만 그녀는 구분선을 지웠다 다시 그리는 일을 반복했다. 노아는 종이를 기웃거리다가 물었다.
“이 칸은 왜 비었어요?”
“아직 당사자의 의사를 듣지 못한 기록을 위해 비워 둔 거란다.”
“그럼 저기에 아무것도 안 써도 돼요?”
“그럴 수 있지.”
노아는 한참 생각하더니 작은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접었다. 릴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아이는 자기만 보겠다고 했다. 재하는 장난스럽게 입을 막는 시늉을 했다. 무진 분지에서 배운 규칙을 신전의 아이도 금방 이해했다. 처음에는 신도가 늘어나는 숫자를 보며 안도했지만 지금은 아이가 자기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는 모습에서 더 큰 안도를 느꼈다.
열람회 정리를 마친 뒤 릴리는 방문자 수를 집계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예 집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의자와 물컵이 몇 개 필요한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석 인원과 신앙 관계를 자동으로 연결하지 않기로 했다. 에반은 유입률을 분석할 수 없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럼 보고서에는 뭘 써?”
“설명서를 몇 장 더 인쇄해야 하는지요.”
“가장 재미없는 보고서군.”
“가장 쓸모 있는 보고서일 수도 있죠.”
에반은 처음엔 자신이 숫자를 세는 방식을 완전히 버리기 어렵다고 인정했다. 재하는 숫자가 잘못된 게 아니라 그 숫자를 누구의 허락으로 어떤 목적으로 쓰는지가 문제라고 말했다. 에반은 한참 수첩을 보다가 그 말을 가장 위에 적었다.
그날 처음으로 에반은 방문자 수 대신 질문을 받지 못한 사람의 수를 세었다. 마음이 바뀐 사람도 있었고, 질문을 적었다가 돌려받은 사람도 있었다. 응답하지 못한 질문은 새 장부에 남겼다. 다만 질문자의 이름까지 필요하지는 않았다. 재하는 그 장부를 보며 웃었다. 마케팅 전문가가 마침내 청중을 잠재 고객이 아니라 말을 가진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에반은 옛 업무용 장부를 뒤지고 돌아왔다. 무진 분지의 외부 조합과 다른 오래된 기관명이 발견됐다고 했다.
[원시 분류원]
[최초 발화 판정 기록실]
[현황: 폐쇄]
[입구: 소금뜰 서측 검문소]
“지도가 지워져도 입구를 완전히 없애진 못했군요.” 재하가 말했다.
“없애면 장부의 빚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도 증명할 수 없으니까.”
에반은 서류를 접었다. 늘 농담을 하던 그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자신이 몸담았던 담보청보다 오래된 기관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 순간 누리가 갑자기 낮은 경보음을 냈다.
[원시 우편로 0번에 외부 열람 요청 발생]
[요청 명칭: 최초의 신의 회신권]
[열람 신청자: 최초 기도의 채권자]
“채권자?” 재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기도도 빚이 됐다는 겁니까?”
누리가 대답했다. “그 주장이 유효한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빈 우편함 위로 처음 보는 붉은 인장이 떠올랐다. 손바닥 모양이지만 손가락이 여섯 개였다.
에반은 그 문양을 보는 순간 종이를 떨어뜨렸다.
“저건 담보청보다 오래된 표식이야.”
“누구의 것이죠?”
“기도를 듣는 신이 아니라, 듣기 전에 값을 매긴 자들의 표식.”
재하는 열람 요청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럼 그분들께 먼저 물어봐야겠네요.”
“뭘?”
“남이 보낸 편지를 왜 자기 돈이라고 생각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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