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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0화
PAYLUA ORIGINAL · 제60화

60화. 신에게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323자

오프라인 책장
윤재하는 신이 된 뒤 처음으로 기적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을 기억했다. 릴리의 동생 노아가 아팠을 때였다. 그때 그는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고, 마침내 한 번뿐인 기적을 사용했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됐다. 누군가를 돕겠다는 마음으로도 그 사람의 의사를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진 분지의 지하 기초실에서 그의 눈앞에 숫자가 떠 있었다. [미응답 발화 자산 등록: 12,410] [자동 관리신 지정까지: 90건] “시간이 없어요.” 릴리가 말했다. 미라는 열두 번째 종의 받침대를 살폈다. 종은 없었지만 밑면에서 아주 약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바니가 자신의 말을 주민에게 돌려받겠다고 선언한 뒤 생긴 반응이었다. 외부 조합의 자동 장치가 그것을 제거하려 들고 있었다. 세리아는 종이 위에 세 줄을 적었다. “지금 필요한 건 세 가지입니다. 재분류 집행의 근거를 다투는 일, 우편로의 실제 소유와 관리 범위를 확인하는 일, 그리고 주민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원본을 보존하는 일.” “우선 뭐부터 합니까?” 재하가 물었다. “사람을 밖으로 내보내죠.” 미라가 대답했다. “장치가 과열되면 이 지하실은 피난 통로가 아니에요.” 재하는 피식 웃었다. 가장 급한 법적 싸움 앞에서도 미라는 안전을 먼저 챙겼다. 그가 신이라고 해서 무너지는 천장을 떠받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민회의는 어린아이와 고령자를 먼저 밖으로 안내했다. 바니는 남고 싶다고 떼를 썼지만 아라가 손을 잡았다. “네 목소리는 이미 기록에 남았어. 이제 우리가 책임지고 확인할게.” “그래도 제가 선택한 건 제가 말해야 하잖아요.” “맞아. 그래서 네가 선택한 내용을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바니는 잠시 생각하다 올라갔다. 하심도 몸을 돌렸지만 라온의 목소리를 두고 나가는 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재하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원본을 갖고 나가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확인만 할게요.” 하심은 오래 바라보다가 열쇠를 아라에게 건넸다. “그 말은 지켜.” 지하에는 재하, 릴리, 아라, 세리아, 에반, 미라와 주민 기록관리자 두 명만 남았다. 누구도 신의 명령으로 남은 것이 아니었다. 각자 맡은 일이 있었다. 이 작은 차이가 기초실을 지켜 줄 거라고 재하는 믿고 싶었다. 작업에 앞서 그들은 임시 역할표를 벽에 붙였다. 미라가 기계 안전, 세리아가 법적 근거 확인, 주민 기록관리자 두 명이 원본 보관, 아라가 주민회의의 권한 범위를 확인했다. 릴리는 지상과 통신하며 부상자가 생기면 즉시 구조를 요청할 준비를 했다. 재하의 칸에는 ‘강제 귀속 조항의 분리 검토’라고 적혔다. 에반의 칸에는 ‘옛 설계 도면 대조’가 적혔다. 에반은 자기 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상하네. 옛날엔 설계자라면 모든 키를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행히 없군요.” 세리아가 대답했다. “너무 기뻐하지 마. 비밀번호를 몰라서 수리 못 하는 상황도 생길 수 있으니까.” “그럴 때는 주민회의에 복구 범위를 다시 요청하면 됩니다.” 재하는 역할표를 바라봤다. 한 사람의 도장으로 모든 결정이 내려지던 천계 회의장과 달리, 이번에는 각자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적혀 있었다. 완벽한 규칙이란 없겠지만, 적어도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설명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미라는 바닥에 분필 선을 그었다. 선 안쪽은 기술자만 들어갈 수 있는 구역, 바깥쪽은 기록 확인자 자리였다. 출입 통로에는 걸리지 말라고 작은 종을 매달았다. 재하는 천계의 웅장한 종보다 이 작은 안전 종이 더 마음에 들었다. “우리 신전에도 하나 달까요?” “신전 출입구 높이가 낮으니 달면 다들 머리를 부딪힐 거예요.” 미라가 말했다. “그건 종을 달 이유가 아니라 문을 고칠 이유네요.” 릴리가 웃었다. 웃음은 짧았지만 그들이 아직 사람으로서 판단할 여유가 있다는 표시였다. 누리는 금빛 새싹을 통해 기초실의 임시 기록을 신전 쪽 보존함에 복제하지 않겠다고 확인했다. 원본이 마을에 남는다는 조건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밖에서는 바니가 우편함 그림이 그려진 안내판을 세우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래 가져가지 않겠다는 약속이 글씨가 아니라 현장에서 지켜지는지, 주민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표지였다. 외부 집행관은 우편로 끝에서 목소리를 보냈다. “미응답 발화는 영구적으로 방치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관리해야 합니다.” “관리와 소유는 다릅니다.” 아라가 답했다. “누가 책임지는가?” “저희 주민회가 원본을 보관하고, 원하는 사람에게 돌려주는 절차를 운영합니다. 이미 해 오던 일이에요.” “신격이 없는 기관은 천계 장부상 책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재하는 손을 들었다. “그럼 천계 장부의 분류가 틀린 거군요.” “그것이 바로 본 기관이 결정할 문제다.” “네. 그래서 판단 근거를 같이 봅시다. 처음부터 신이 지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유권을 빼앗을 수 있다는 조항이 어디 있는지요.” 에반은 원시 우편로 설계도를 펼쳤다. 서기 라온의 서명 아래에는 열두 개의 빈칸이 있었다. 열한 개는 각 마을 우편관리자에게 연결됐고, 마지막 하나는 언제나 비어 있었다. 누군가 답하지 않을 권리를 선택했을 때 그 빈칸을 대신 채울 수 없도록 한 구조였다. “이게 바로 원본 설계의 마지막 잠금장치입니다.” 에반이 말했다. “나중에 보관조합은 이 칸을 오류라고 보고 삭제했죠.” “어떻게 원본임을 증명하지?” 집행관이 물었다. “세 경로의 기록을 대조하면 됩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마렌의 원계약 증언, 침묵항 00000번 보존 회선, 라온의 보관 의뢰서입니다. 서로 독립된 시기에 보존된 세 자료가 같은 문구를 가리킵니다.” 그때 숫자가 다시 움직였다. 12,411. 자동 장치는 다른 곳에서 복사된 옛 기록을 끌어와 자산으로 환산하고 있었다. 열두 번째 받침대에서 얇은 균열이 났다. 미라는 즉시 경고했다. “장치가 전력선을 통해 계속 작동하고 있어요. 기록을 함부로 끊으면 수문 쪽 제어기까지 멈출 수 있습니다.” 재하는 벽을 바라봤다. 수문과 기록망을 뒤섞어 놓은 것이야말로 조합의 가장 교묘한 장치였다. 사람들에게 선택하라고 하지만, 거부하면 물과 구조 신호가 함께 멈추게 되어 있었다. “분리할 방법이 있습니까?” “있어요. 하지만 원본 보존 회선을 다른 곳에 연결해야 해요.” “어디로요?” 미라가 열두 번째 받침대를 가리켰다. “저기요. 설계상으로는 독립 반송선이 남아 있거든요. 그런데 기계가 오래돼서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라는 주민 기록관리자에게 확인을 구했다. 두 사람은 안전 위험과 기록 손실 가능성을 들은 뒤 임시 연결에 동의했다. 미라는 받침대의 금속판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그 사이 릴리는 지상으로 긴급 연락을 보냈다. 만약 지하 전원이 내려가면 수문 운영자들이 수동 잠금으로 전환하도록 준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재하는 두 손을 폈다. 무상의 약속은 기적을 만드는 권능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물길을 고치지도, 모든 기록을 한꺼번에 지우지도 못했다. 다만 부당하게 연결된 두 개의 약속 사이에 선을 그을 수는 있었다. “누리. 확인 가능한 강제 귀속만 보여 주세요.” [조사 범위 제한] [원본 우편 소유권: 지역 보관기관] [외부 조합의 수익권: 다툼 중] [발화자의 직접 동의: 확인되지 않음] 금빛 선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하늘을 가르지 않았다. 낡은 기계의 아주 작은 나사 사이로 내려왔다.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과 ‘그 말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로 묶인 연결 부위였다. 재하는 그 부분에만 권능을 집중했다. “기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주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 빛이 번쩍였다. 숫자가 12,412에서 멈췄다. [강제 귀속 연결: 임시 분리] [자동 신격 지정: 집행 보류] [원본 발화 기록: 삭제하지 않음] 하지만 받침대가 크게 흔들렸다. 미라가 외쳤다. “이대로면 회선이 끊어져요!” 아라는 하심이 맡겼던 마지막 열쇠를 돌렸다. 옛 기계 안쪽에서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소리는 천계의 장엄한 종과 달랐다. 새벽에 우편배달부가 걸어가며 흔드는 작은 손종 같은 소리였다. 원시 우편로가 새로운 통로를 열었다. [발화 원권리자에게 반송 경로 안내] [수신 거절 및 침묵 선택 가능] [지역 보관기관 임시 관리: 주민회 의결 확인] 벽에 쌓였던 목소리들은 더 이상 숫자로 변하지 않았다. 일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답을 기다리는 말도, 누구에게도 전하고 싶지 않은 말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어느 것도 자동으로 신의 재산이 되지 않았다. 집행관의 형상은 흔들렸다. “이 결정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보관조합의 손실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 재하는 대답했다. “실제로 유효한 계약이 있다면 검토해야겠죠. 하지만 아무도 약속하지 않은 수익을 잃었다고 사람들에게 갚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천계의 권위를 부정하는가?” “기록을 고쳐 달라는 겁니다.” 형상은 곧 사라졌다. 청문은 연기됐고, 서류는 독립 심사로 넘어갔다. 그날 무진 분지에 새 관리신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곳의 모든 문제가 끝난 것도 아니었다. 우물은 여전히 검사해야 했고, 수문을 고치려면 며칠이 더 필요했다. 주민들이 편지를 돌려받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상으로 올라온 재하를 바니가 맞았다. 소녀는 품에 작은 우편함 모형을 안고 있었다. “신님. 이제 기도해야 돼요?” “누구한테?” “신님한테요.” “네가 하고 싶으면 하면 돼.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바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저는 안 할래요.” “좋아.” “대신 내일 우체국에서 편지 나르는 거 도와주세요.”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할 수 있겠다.” 에반이 옆에서 작은 팻말을 꺼냈다. [신에게 기도하지 않는 마을에서 일하는 신. 첫 배달 무료!] “광고하지 말라니까.” 재하가 말했다. “이건 구인 공고야.” “그럼 시급은요?” “네가 신이잖아.” “무급 노동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점은 아직 고쳐야겠네요.” 아라와 릴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멀리 공용 우물에서는 주민들이 새 여과 장치를 시험하고 있었다. 아직 마실 수 있는 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검은 침전물은 줄어들고 있었다. 돌문 마을에서는 큰 축하 행사가 열리지 않았다. 대신 우편국 옆 공지판이 새것으로 교체됐다. ‘본인이 쓴 말의 열람과 반송은 신청할 수 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라는 이 문장을 하루 세 번 읽어 주기로 했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심은 다음 주부터 새 배달부에게 길을 가르치기로 했다. 바니는 우편함을 닦는 일을 맡았다. 재하는 본인이 동행할 수 있는 날을 손가락으로 세었다.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본래 신전의 치료소, 수로 공동계획, 90일간 조건부 유지된 보호 계약의 점검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 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아라가 물었다. “처음에는 제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을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재하가 말했다. “지금은 제가 없는 날에도 잘 굴러가는 게 더 좋아요.” 미라는 남쪽 수문 고장 수리 일정을 남겼다. 외부 조합이 심사에서 패소하더라도 훼손된 쇠판과 오염된 관은 저절로 고쳐지지 않는다. 릴리는 의무실에 충분한 식수가 공급되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에반은 반송 안내문 아래 광고를 붙이지 않겠다고 서명했다. “왜 저만 별도 서명이죠?” “가장 필요한 분이니까요.” 세리아가 대답했다. 그들은 짧게 웃었다. 재하에게 가장 뜻깊은 건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은 저녁이었다. 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필요하면 연락하세요’라고 말하는 소리는 골목 곳곳에서 들렸다. 그날 밤 재하는 신전에 돌아와 누리에게 물었다. “무진 분지의 기록은 이제 얼마나 남았습니까?” [원본 미응답 발화: 12,408건] [추가 중복 등록 시도: 4건, 집행 보류] [자동 관리신 지정: 정지] [반송·열람·보존 선택 절차: 개시] “숫자는 그대로군요.” “숫자가 줄어들어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리가 대답했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의 기록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기록이 여전히 사람의 것이라는 증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안내창을 본 순간 그의 표정이 굳었다. [원시 우편로 0번 복원 완료] [과거 미발신 편지 1건 수신] [발신자 직위: 최초의 신] [수신인: 인간] [편지 내용: 나를 믿지 말고, 내가 왜 대답하지 않았는지 물어다오.] 재하는 오래도록 그 문장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그는 사람이 신에게 남긴 말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세계의 가장 오래된 우편로에는, 신이 인간에게 보낸 답장하지 못한 편지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 옆에서 또 하나의 문장이 빛났다. [다음 조사 대상: 첫 번째 기도의 발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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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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