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된 뒤 처음으로 윤재하에게 광고 제안서가 들어왔다.
문제는 광고주가 악마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제안서가 너무 유능하게 만들어졌다는 점이었다.
[무상의 신전 확장 전략]
[1단계: 기적의 샘 브랜딩]
[2단계: 성녀 릴리의 체험담 공개]
[3단계: 자발적 기도회 개최]
[4단계: 전국 순회 홍보]
재하는 세 번째 줄에서 멈췄다.
“자발적 기도회는 괜찮아 보이는데요.”
“역시!”
에반이 두 손을 펼쳤다.
“아주 조금만 포장을 하면….”
“첫 번째 줄부터 취소하세요.”
“왜?”
“샘에 물이 나온 건 사람들이 수로를 고쳤기 때문이잖아요. 무슨 기적의 샘이에요.”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이 나왔잖아. 틀린 표현은 아니지.”
“사람들이 저를 믿으러 왔다가 수로 관리 방법 대신 헛된 주문만 배우면 어떡합니까?”
에반이 허공에 손짓했다.
“신성 시장의 수요를 너무 모르는군. 사람들은 복잡한 사정이 아니라 한 문장의 설명을 원해.”
“그 한 문장이 거짓말이면요?”
“그래서 시장에 진실을 조금 섞는 거야.”
그 말에 릴리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전 세 번째 줄도 싫어요.”
두 사람이 릴리를 돌아봤다.
“왜요?”
“제 동생 이야기를 모든 사람 앞에서 해야 하잖아요. 노아가 아팠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제가 얼마나 돈이 없었는지요.”
재하는 입을 다물었다. 제안서에는 ‘성녀 릴리의 눈물과 구원의 밤’이라는 제목까지 붙어 있었다.
에반이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원하지 않으면 안 해도 돼. 강요할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왜 제 이야기를 쓰기 전에 묻지 않으셨어요?”
에반의 입이 닫혔다.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에요. 앞으로 누군가의 경험을 알리는 건 그 사람 동의를 받은 다음에 합시다.”
악마는 제안서를 말없이 접었다. 멋진 계획을 누군가 스스로 버리는 장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더구나 그는 남에게 버리라고 강요받고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좋아. 캠페인 수정.”
그는 새 종이를 꺼냈다.
[무상의 신전 운영 원칙]
[기도하기 전에 설명을 읽으세요.]
[돈을 내지 않아도 출입할 수 있습니다.]
[도움을 받은 사실을 홍보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재하가 놀라서 물었다.
“그렇게 쓰면 사람이 올까요?”
에반은 빙긋 웃었다.
“그걸 이제 네가 물어?”
***
에반의 수첩에는 새로 적은 원칙만 남았다. 그는 자신이 찢어버린 옛 전단지를 바라보다, 한쪽 구석에 작게 적힌 문장을 읽었다.
‘인간은 기적보다 기적을 줄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에 먼저 반응한다.’
그것은 한때 자신이 자랑하던 문구였다. 신격 관리 회사에 갓 입사한 악마들에게 강의할 때도 썼다. 그러나 릴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허락 없이 공개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그 문장은 더 이상 현명해 보이지 않았다.
“신님.”
에반이 재하를 불렀다.
“또 왜요?”
“네가 지금 하는 식으로는 성장 속도가 느릴 거야.”
“압니다.”
“천계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장면을 골라 보여 주는 신이 많아. 어떤 장면을 숨겨야 영웅처럼 보이는지 알고 있지.”
재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우리도 불리한 장면을 숨겨야 하나요?”
“아니.”
에반이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직접 볼 수 있게 만들자. 네가 못 하는 것까지. 그래야 누가 와서 속였다고 따져도 할 말이 있지.”
재하는 에반의 손에서 수첩을 받아 들었다. 그 안에는 ‘기적 사용 내역’, ‘봉헌금 사용처’, ‘해결하지 못한 요청’이라는 세 항목이 적혀 있었다.
“세 번째까지 공개한다고요?”
“뭘 못 했는지 알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찾아올 수도 있잖아.”
이번에는 재하가 먼저 웃었다.
“악마치고 꽤 괜찮은 생각인데요.”
“그 말 칭찬으로 받아야 하냐?”
“그럼요. 아주 드문 칭찬입니다.”
그날 에반은 폐허 신전 벽에 작은 나무판을 붙였다.
[현재 해결하지 못한 일]
[1. 제17보급대 생존 확인]
[2. 하류 수로 안정화]
[3. 방직 작업장 계약 조사]
맨 아래에는 연필로 써 둔 한 줄이 있었다.
‘해결 가능한 사람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에반은 한참 그 문장을 들여다봤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기만 하게 만드는 광고와, 사람들이 직접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안내문의 차이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같은 날 오후, 마을 광장에 또 다른 소문이 돌았다.
‘무상의 신전에서 기도하면 하루 만에 부자가 된다.’
‘그 신은 전쟁신을 벌써 이겼다.’
‘성녀가 죽은 아이를 살렸다.’
“이건 누가 퍼뜨린 겁니까?”
재하는 소문을 적은 쪽지를 한 장씩 읽었다. 모두 내용이 달랐지만 끝에는 같은 문장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무상의 신전에 문의하십시오.]
신전 앞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마을 밖 상인들이 몰려왔고, 자기 이름이 새겨진 작은 목걸이를 들고 온 사람도 있었다. 어떤 남자는 재하에게 금화를 쥐여 주려고 했다.
“제 사업에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저는 그런 축복은 못 합니다.”
“금화가 부족하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사업 내용을 모르잖아요.”
상인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좋은 사업인지 확인하고 축복하는 겁니까?”
“제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적어도 속임수인지는 알아봐야죠.”
남자는 재하를 한참 바라보다 금화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장사가 안 되겠군.”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에반이 재하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영업 전화가 와서 직접 끊어주는 상담원 같은 신이라니.”
하지만 재하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금화가 아니었다. 신전 뒤편에 웅크린 아이였다.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부자가 된다’는 쪽지를 구겨 쥐고 있었다.
“무슨 일 있니?”
아이는 손을 감추었다.
“돈이 필요해요.”
“누구나 그렇긴 하지.”
“우리 누나가 일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데리러 가려면 통행세가 필요해요.”
재하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름이 뭐니?”
“미로요.”
“누나는 어디로 갔어?”
“붉은 신전의 방직 작업장이요.”
미로는 종이를 펼쳤다. 고용계약서였다. 임금 대신 신전의 빚을 차감하고,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출입을 제한한다는 조건이 적혀 있었다. 종이 아래에는 미로의 누나가 남긴 엄지 도장이 있었다.
“계약을 할 때 빚이 얼마였는데?”
“은화 다섯 닢이요.”
“지금은?”
“서른두 닢이래요. 숙소비랑 식사비가 붙었대요.”
에반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계산했다.
“정상적인 이자율은 아니네.”
“여기에도 정상적인 게 있긴 합니까?”
재하가 대꾸했다.
릴리가 다가와 미로에게 물을 건넸다. 아이는 물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어른들에게 떠밀려 다니다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신님. 누나를 꺼내 줄 수 있어요?”
재하는 서둘러 ‘그렇다’고 답하지 않았다.
“네 누나가 직접 돌아오고 싶은지 먼저 물어야 해. 그리고 서류를 살펴봐야 하고.”
“누나는 돌아오고 싶어 해요.”
“네가 들었어?”
미로가 품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거기에는 실로 네 글자가 꿰매져 있었다.
‘집에 가고파.’
재하는 천 조각을 조심스럽게 돌려주었다.
“같이 가자.”
***
방직 작업장은 마을 서쪽 높은 담장 안에 있었다. 방직기 소리는 거친 비가 내리는 것처럼 끊임없이 울렸다. 문지기는 재하의 얼굴을 알아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또 무상의 신전인가?”
“찾는 사람이 있어서요.”
“노동 계약으로 묶인 자들은 면회가 금지돼 있다.”
재하는 계약서를 펼쳤다.
“그 조항이 어디 있습니까?”
“계약 첫 장에 있다.”
“첫 장에는 외부인 방문 제한이라고 써 있는데요. 가족 면회 금지는 없네요.”
문지기가 표정을 바꿨다. 에반이 재하의 옆구리를 찔렀다.
“너 대체 회사에서 무슨 일을 했길래 계약서를 그렇게 읽어?”
“남들이 안 읽는 조항 때문에 야근을 많이 했죠.”
잠시 후 키 큰 여자가 작업장 안에서 나왔다. 미로는 그녀를 보자 달려가 안겼다.
“누나!”
여자의 이름은 안나였다. 그녀의 손끝은 잉크와 물집으로 얼룩져 있었다. 눈 밑에는 잠을 못 잔 흔적이 짙었다.
“저를 도와주신다고요?”
재하가 계약서를 보여주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 맞습니까?”
안나는 잠시 문지기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하지만 빚을 갚지 못했어요.”
재하의 눈앞에 푸른 실들이 드러났다. 안나의 손목에 얇은 사슬처럼 감겨 있었다. 실에는 숙소비, 식사비, 신성 보호비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헌납 성격의 비용 17건 감지]
[자유 의사 확인 필요]
“어떤 비용을 알고 동의했습니까?”
안나가 하나씩 대답했다. 대출 원금 다섯 닢은 인정했다. 숙소비는 일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성 보호비’는 듣지 못했다. 식사비는 하루 두 끼를 먹었다는 기록으로 청구됐으나 실제로는 한 끼를 받았다고 했다.
재하는 구분해서 말했다.
“빌린 돈은 정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대신 동의하지 않은 비용까지 떠안을 필요는 없겠죠.”
안나가 울먹였다.
“정말 그런 게 가능해요?”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재하는 천천히 눈을 감고 권능의 이름을 떠올렸다.
‘무상의 약속.’
푸른 실들 사이에서 억지로 이어 붙인 매듭이 보였다. 재하는 매듭 중 하나를 손끝으로 짚었다.
툭.
[강제 헌납 계약 11건 무효]
[잔여 계약금: 원금 5닢 및 사전 동의된 비용]
[강제 귀속 포인트 반환 처리]
안나는 자기 손목을 내려다봤다. 신성한 빚이 사라지자 피부 아래 희미하게 빛나던 붉은 문양이 지워졌다.
문지기는 소리를 질렀다.
“무허가 권능이다! 작업장의 자산을 침해했다!”
재하는 안나에게 물었다.
“집에 가실 겁니까?”
안나는 동생의 손을 꽉 잡았다.
“네.”
그 순간 문지기는 길을 막을 수 없었다. 남은 실제 채무는 작업장 소유주와 별도로 정산하도록 조치했지만, 신앙으로 몸을 묶는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안나는 문밖으로 나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신앙 포인트: 29]
[등록 신도: 17명]
재하는 의아했다. 안나와 미로 외에 여러 명이 그를 믿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작업장 안에서 작은 박수 소리가 들리더니 하나둘 커졌다.
“대체 몇 명이나 보고 있었던 거지?”
에반이 웃었다.
“열일곱 명이 전부 너를 따라오겠다는 뜻은 아니야. 누군가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신이 있다는 걸 믿기 시작한 거지.”
그 말은 기뻤다. 하지만 재하는 여전히 망설였다. 안나 한 사람을 구했다고 아직 안의 모두가 안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안나는 문밖에서도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작업장에 들어올 때는 통행증이 있었고, 나갈 때에는 관리자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제 그 허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몸은 오래된 명령을 기억하고 있었다.
미로가 손을 잡아끌었다.
“누나, 가자.”
안나는 그제야 한 걸음 내디뎠다. 돌바닥에 닿은 발소리가 작게 울렸다.
“집에 가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아세요?”
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잠을 자고 싶어요. 아무도 일어나라고 소리치지 않는 곳에서요.”
“그럼 푹 주무세요.”
그녀는 잠깐 웃었지만 곧 얼굴이 어두워졌다.
“안에 남은 사람들은 어떡하죠?”
“우리가 계약을 한 장씩 확인해야겠죠. 다만 모두가 나오고 싶은 건지도 직접 물어봐야 해요.”
“어떤 사람은 거기서 벌어 가족을 먹여 살려요.”
“그러면 일을 계속할 권리도 지켜야죠. 나가고 싶은 사람을 가두는 일이 잘못이지, 일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니까.”
안나는 재하를 똑바로 바라봤다.
“신님은 왜 늘 일을 어렵게 만들어요?”
“저도 쉬운 게 좋은데요.”
“그런데 어려운 쪽을 고르잖아요.”
재하는 잠깐 생각했다.
“쉬운 길을 택하면 누군가 대신 힘들어지는 경우가 있어서요.”
그 말에 안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미로의 손을 꽉 잡고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일행이 돌아서려는 순간, 작업장 윗층에서 문이 열렸다. 하얀 장갑을 낀 관리자가 계단에 섰다.
“윤재하 신격.”
그는 재하의 이름을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신전의 자산을 줄인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재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람이 왜 자산입니까?”
“사람이 아니라 계약입니다.”
관리자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당신이 없앤 신성 포인트는 이미 상급 기관의 담보로 잡혀 있습니다.”
그의 손에서 검은 인장이 빛났다.
[천계 신앙 담보청: 미회수 채권 발생]
재하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권능이 건드린 것은 사제의 금고 정도가 아니었다. 누군가 인간들의 빚을 한데 묶어 더 큰 기관에 팔아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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