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한 기사 네 명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삽부터 내려놓았다.
윤재하는 그 모습이 못내 씁쓸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두 물을 보며 웃었는데, 붉은 망토 몇 벌이 나타나자 어깨부터 움츠러들었다.
“누가 제3차단문을 훼손했습니까?”
세리아의 뒤에 선 기사가 물었다.
“아직 훼손한 사람은 없는데요.”
재하가 답했다.
기사는 공터를 둘러봤다. 흙더미와 삽, 조금씩 젖는 도랑이 눈에 들어왔다.
“수로를 파냈으면서도?”
“공공 도로의 흙을 걷어냈습니다. 차단문은 건드리지 않았고요.”
“그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어제 심판 때는 서명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더군요. 오늘은 땅 경계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기사는 말문이 막혔다. 세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현장부터 보겠습니다.”
그녀는 돌에 새겨진 차단문 표식을 확인했다. 뒤이어 마을 경계가 표시된 석판을 꺼냈다. 금빛 선이 두 지도 사이에서 겹쳤다.
“공공 도로 점유지는 맞습니다. 하지만 이 수로는 군사 시설입니다. 차단문을 임의로 열면 하류가 침수될 수 있어요.”
“그래서 안 열었습니다.”
세리아의 시선이 재하에게 멈췄다.
“드물게 현명한 선택을 하셨군요.”
“어제도 현명했거든요.”
“어제는 그 자리에서 상급 심판을 불러냈습니다.”
“그건 시스템이….”
“결과로 평가하는 것이 행정입니다.”
에반이 뒤에서 웃음을 참았다.
“둘이 잘 맞는다니까.”
기사는 삽을 압수하려 했다. 릴리가 앞으로 나섰다.
“그건 도란 아저씨의 물건이에요.”
“시설 무단 접근에 사용된 도구다.”
“아저씨가 직접 산 거예요. 가져가시려면 이유를 적어 주세요.”
어제 심판장에서 배운 말이었다. 재하가 자신을 보호할 때 말하던 문장. 릴리는 그 문장을 아주 또박또박 반복했다.
세리아는 릴리를 오래 바라보더니 기사에게 고개를 저었다.
“도구 압수는 보류합니다. 실제 훼손 여부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기사가 불쾌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럼 물은 어떻게 합니까?”
한 농부가 물었다.
세리아는 이마를 짚었다.
“수로 개방은 하류 조사 후 가능합니다. 적어도 사흘은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일제히 어두워졌다. 아이를 업은 여자는 항아리를 끌어안았다.
“사흘이면 우리 밭은 다 말라요.”
그 말을 들은 재하는 잠시 침묵했다. 강제로 문을 열면 당장 물을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리아의 경고가 사실이라면 홍수로 더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손쉽게 영웅이 되는 방법이 꼭 옳은 방법은 아니었다.
“세리아 조사관. 상류와 하류를 동시에 확인하면 얼마나 줄일 수 있습니까?”
“전문 기술자가 있어야 하고, 물높이 기록과 옛 설계도가 있어야 합니다.”
“옛 설계도는 어디 있죠?”
“카르도 신전 지하 기록실에 있습니다.”
재하가 입을 벌렸다.
“이번에는 안 태웠겠죠?”
세리아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 이야기는 절대 가볍게 하지 마세요.”
***
도란의 대장간은 쇳소리와 숯 냄새로 가득했다. 천장에 매달린 쇠고리들이 바람에 부딪쳐 딸랑거렸다. 도란은 작업대 아래서 아주 오래된 나무 상자를 꺼냈다.
“내 할아버지가 이 수로를 고쳤어.”
상자 안에는 녹슨 나침반과 측량 끈, 도면 일부가 있었다. 도면의 모서리에는 전쟁신 문장이 찍혀 있었지만, 그 밑에는 또 다른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작은 집과 그 위로 떠오르는 태양 모양이었다.
“무슨 문장이에요?”
릴리가 물었다.
“옛날에는 저걸 ‘공동 수호 인장’이라고 불렀대. 전쟁신이 군용으로 가져가기 전에는 이 수로를 마을들이 함께 관리했지.”
재하는 도면을 펼쳤다. 관개용 작은 수로 세 갈래가 산비탈 아래까지 뻗어 있었다. 제3차단문은 홍수 때만 닫는 긴급 시설이었다.
“그럼 문을 닫은 건 잠깐이었어야 했네요.”
“서른두 해 전 홍수가 난 뒤 계속 닫혔지.”
도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뒤 사람들은 물이 부족할수록 신전에 빌었어. 신전이 물을 조금씩 나눠 줬으니까.”
에반이 도면을 보며 말했다.
“신성 사업 모델이네. 공급을 줄이고 공급자의 권위를 높인다.”
“고의로 막았다는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재하는 에반에게 선을 그었다.
“증거를 찾죠.”
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아가 재하를 찾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허가증 하나와 줄자로 묶은 붉은 도면을 가져왔다.
“하류 조사에 한해 임시 공동 작업을 승인받았습니다. 단, 군사 시설 본체는 건드리지 마세요.”
“조사관님이 허가를 받아 오셨어요?”
“당신들 손에 맡겨 두면 분명 뭔가 터질 것 같아서요.”
에반이 끼어들었다.
“이 정도면 실질적인 팀원인데?”
“저는 감시자입니다.”
“우리 팀 감시자.”
세리아는 그를 무시했다.
***
하류를 따라 걷자 수로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물길은 무너진 돌벽을 지나 남쪽 평야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다시 세 갈래로 나뉘어 작은 마을들을 통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바닥에 마른 흙이 갈라져 있었다.
한 노인이 삽자루를 짚고 그들을 바라봤다.
“서른두 해 만에 수로에 다시 사람이 왔군.”
그는 예전에 수로지기였다고 했다. 이름은 펠로. 어깨가 굽고 오른쪽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물길의 높낮이는 누구보다 정확히 기억했다.
“차단문을 바로 열면 안 돼. 상류 바닥에 돌이 쌓였을 거야. 한번에 밀려오면 남쪽 둑이 무너진다.”
재하는 메모를 했다.
“그러면 어디부터 치워야 하죠?”
펠로는 웃었다.
“신이 묻는 말치고는 실용적이군.”
“신이 된 지 얼마 안 돼서요.”
“그럼 더더욱 잘 배워.”
그들은 오후 내내 돌아다녔다. 도란이 녹슨 쇠수문을 고쳤고, 릴리는 아이들이 작업 구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줄을 쳤다. 에반은 어디서 구했는지 작은 종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을 모았다.
“공짜로 파는 행사입니다! 모두 안전하게 삽질하세요!”
“공짜로 판다는 말 자체가 이상하거든요!”
재하가 외쳤다.
“아, 신님. 문장 하나하나에 너무 예민해.”
그러나 에반이 만든 안내문은 의외로 쓸모가 있었다. 작업 순서, 쉬는 시간, 물 확보 방법이 적혀 있었고,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삽과 물통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에반의 재능이 단순히 사람을 속이는 데만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해가 기울 무렵, 펠로가 마지막 측량을 마쳤다.
“천천히 열면 돼. 한 치씩. 첫날엔 남쪽 작은 수로만.”
세리아는 보고서에 서명했다.
“제3차단문 임시 시험 개방을 승인합니다.”
문을 잡은 도란이 재하를 돌아봤다.
“신님. 돌리시겠소?”
재하는 손을 내저었다.
“이건 도란 아저씨와 펠로 할아버지가 하셔야죠.”
“신께서 기적을 행해야 사람들이 믿지 않겠소?”
“오늘 기적은 당신들이 하루 종일 안 포기한 거 아닙니까.”
도란이 한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웃으며 쇠바퀴를 돌렸다.
끼이익.
차단문이 손가락 하나만큼 열렸다. 물이 진동하며 쏟아져 나왔다. 펠로가 소리쳤다.
“천천히! 남쪽 도랑부터!”
물줄기는 마른 수로 바닥을 따라 움직였다. 사람들은 처음에 어리둥절해하다가, 발치까지 도착한 물을 보고 환호했다. 울던 아이가 웃었고, 늙은 농부가 맨발로 도랑 안에 내려섰다.
재하는 떠오르는 안내창을 바라봤다.
[자발적 신앙 관계 다수 형성]
[등록 신도: 11명]
[신앙 포인트: 18]
“열여덟.”
그가 조용히 말했다.
에반이 어깨를 두드렸다.
“백까지 멀지 않았네.”
“아직 여든두 점이나 남았습니다.”
“원래 첫 매출이 제일 어려운 거야.”
***
사람들은 수로에 흐르는 물을 눈으로 확인했지만, 다 마셔도 되는 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펠로는 젊은이들에게 물을 처음 흘려보낸 구간에 흙탕물이 섞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릴리는 항아리 옆에 짧은 글을 붙였다.
‘식수는 검사를 마칠 때까지 끓여 드세요.’
“이런 글은 누구나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에반이 문구 옆에 불을 피우는 그림을 그렸다. 릴리는 그림이 예쁘지 않다며 다시 그렸고, 노아가 옆에서 태양을 하나 덧붙였다. 몇몇 농민은 그 광경을 보고 웃었다.
물을 길어 가려는 노파가 재하에게 작은 동전 하나를 내밀었다.
“가져가거라. 나도 도움을 받았으니 뭐라도 보태야지.”
재하가 거절하려 하자 노파는 눈썹을 세웠다.
“네가 나를 가난하다고 생각해 무조건 못 내게 하려는 게냐?”
그 말에 재하는 순간 멈칫했다.
“아뇨.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난 내 마음대로 내고 싶다. 대신 어디에 쓰는지만 알려 줘.”
그는 동전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동전 한 개를 어디에 쓸지 적어 두기로 했다. 자발적인 봉헌까지 막는 것은 또 다른 강요가 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선택권을 존중한다는 건 받지 않을 권리뿐 아니라 기꺼이 줄 권리도 존중하는 일이었다.
“이건 수로를 청소할 삽을 사는 데 쓰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다음에 와서 삽이 생겼는지 물을 게다.”
“꼭 물어보세요.”
노파가 떠나자 에반이 재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야 회계 장부를 만들겠다는 거야?”
“만들어야죠. 남이 믿어 준다고 우리가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에반은 한 장짜리 지출표를 내밀었다. 표 위에는 수로 보수, 신전 지붕, 병자용 장작, 공동 식량이라는 항목이 적혀 있었다. 재하는 그중 ‘신전 지붕’을 맨 아래로 옮겼다.
“비 오기 전에 고쳐야 할 텐데.”
“여기 비는 잘 안 온다면서요.”
“그건 지붕 없는 사람들의 상식이지. 지붕이 있어야 비를 기다릴 수도 있어.”
에반의 말에 재하는 잠깐 웃었다. 그러고는 수로를 따라 흘러가는 물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물을 나눠 쓰는 데는 신의 권능보다 의논과 장부가 더 필요할지도 몰랐다.
물길이 열린 지 한 시간 뒤,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터졌다.
붉은 신전의 병영에서 청동 나팔 소리가 울렸다. 군마를 씻기던 병사들이 물이 약해졌다며 항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류의 물이 갈라지면서 병영 수조에 들어가는 양이 줄어든 탓이었다.
세리아가 지도를 펴 들었다.
“시험 개방량을 유지하려면 병영 쪽 배급을 조정해야겠군요.”
재하가 말했다.
“다 같이 나눠 쓰는 게 정상 아닌가요?”
“전시 규정상 군마 급수가 우선입니다.”
“지금 전쟁 중입니까?”
세리아는 답하지 않았다.
도란이 끼어들었다.
“큰 전쟁은 끝난 지 일 년이나 됐어. 다만 국경 충돌이 아직 있다고 하더군.”
재하는 병영을 바라봤다. 담장 안에는 충분히 깨끗한 물이 있었고, 밖에서는 항아리를 든 사람들이 물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마에게 물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우선순위가 아니라 필요한 양을 조사해야겠죠.”
“말이 쉽지.”
세리아가 차갑게 답했다.
“당신은 신이라서요. 군량 부족 때문에 병사가 죽으면 누가 책임집니까?”
“그러면 사람도 말도 살 수 있게 다시 계산합시다.”
세리아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이 신은 자신의 편을 들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굶기고 다른 누군가를 살리는 쉬운 정의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시험 개방이 끝난 뒤에도 도란과 펠로는 수문 곁에 남아 있었다. 해가 지면 물높이를 다시 재고, 한밤중에는 돌이 끼지 않는지 확인해야 했다. 수로를 연 날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재하는 두 사람 옆에 앉아 남은 빵을 나눠 주었다.
“신님은 돌아가서 쉬시지.”
“괜찮아요. 저도 확인할 게 있어서요.”
“뭘?”
“제가 없어도 이 수문이 계속 돌아갈 방법이요.”
펠로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은 질문이야. 수로는 누가 왕이든, 누가 신이든 계속 흘러야 하니까.”
그날 밤 마을마다 한 사람씩 차례를 정해 수문을 지키기로 했다. 신전의 이름이 아니라 마을 이름을 적은 당번표가 만들어졌다. 재하는 그 표를 바라보며 뿌듯해했다.
그날 밤, 재하가 신전으로 돌아오자 천계 안내창에 붉은 글씨가 떠 있었다.
[잔여 시간: 4일 21시간]
[경고: 관리신 영역 내 신앙 흐름 재분배 발생]
[카르도 측 수입 감소: 3.1%]
[원인 신격: 윤재하]
“돈의 흐름이 바뀌는 걸 실시간으로 보여 주네요.”
에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이상해.”
“뭐가요?”
“네 신도는 열한 명뿐인데 카르도의 수입이 삼 퍼센트나 줄었어. 그 정도면 마을 한두 개가 통째로 기도를 끊은 수준이야.”
안내창 아래에 알 수 없는 글씨가 한 줄 더 나타났다.
[봉헌 이탈량 중 미귀속분: 96%]
재하는 문구를 읽고 에반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뜻인데요?”
에반이 낮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카르도에게 바치던 믿음을 거두고 있어. 그런데 그 믿음이 너한테도 오지 않았다는 뜻이지.”
멀리 병영의 종이 세 번 울렸다. 재하는 잠깐 웃었다.
“그럼 그 믿음은 지금 어디 있죠?”
에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진짜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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