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를 공개해 달랬더니, 장부가 불타고 있었다.
윤재하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신의 능력보다 발이 빠른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뛰어요!”
그의 외침에 릴리가 먼저 달렸다. 세리아는 붉은 망토를 걷어 올리고 뒤를 쫓았다. 에반만 한 박자 늦게 출발했다. 그는 가로수에 걸린 자기 망토의 단추를 떼어 내느라 잠깐 시간을 낭비했다.
“이건 맞춤 제작이라고!”
“장부가 먼저예요!”
마을 중앙의 신전 뒤편, 군량 창고의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안뜰에는 무장한 신전병들이 줄지어 있었고, 문 앞에는 기름통이 넘어져 있었다. 바닥으로 흐르는 기름 위에 불씨가 떨어지면 창고 전체가 타 버릴 판이었다.
세리아가 신분패를 들어 올렸다.
“카르도 신전 청렴감찰실! 즉시 문을 열어라!”
경비병은 흔들리지 않았다.
“심판관 베르만의 명령입니다. 내부는 성전 준비를 위해 폐쇄되었습니다.”
“성전 준비가 왜 군량 장부를 불태우는 건데?”
재하가 묻자 경비병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계약 외 신격은 발언권이 없다.”
“그 말은 오늘 세 번 들었습니다. 다른 문장은 없습니까?”
세리아가 재하를 가로막았다.
“이곳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녀는 발치의 땅에 붉은 문장을 찍었다. 바람이 사방으로 밀려나고 창고 문을 묶은 쇠사슬이 탕 하고 떨렸다.
[감찰 권한 발동]
[긴급 증거 보존 명령]
쇠사슬이 풀린 순간, 안에서 뜨거운 공기가 쏟아졌다. 창고 선반 절반에 이미 불이 붙어 있었다. 성인 남자 둘이 타다 남은 두루마리를 불구덩이에 던지고 있었다.
“멈춰!”
세리아가 소리쳤다.
남자 하나가 뒤돌아볼 틈도 없이 재하는 바닥의 물통을 집어 들었다. 신이 되어서도 그런 물통은 무거웠다. 그는 어깨에 물통을 걸고 불길 앞까지 달렸다. 그러나 통 안에는 바닥에 겨우 고일 정도의 물밖에 없었다.
“이게 전부예요?”
“군량 창고니까 물보다 곡물을 보관하지!”
에반이 답했다.
그 말에 릴리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재하는 불타는 선반에서 기록 묶음을 끌어내렸다. 손끝이 뜨겁게 저렸다. 신격이 있으면 불에 안 타는 줄 알았는데, 현실은 달랐다.
“윽!”
작게 비명을 지르자 에반이 피식 웃었다.
“기본 육체형 신격은 감각이 살아 있어. 고통 면역도 유료 옵션이야.”
“이 미친 천계!”
그때 릴리가 돌아왔다. 그녀 뒤에는 도란과 마을 사람들이 물통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낮에 창고가 불탄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노파 마르타도 끌고 온 작은 손수레에 물통을 실어 왔다.
“그쪽으로 부으세요!”
릴리가 지시했다.
창고의 돌바닥은 순식간에 진흙탕이 됐다. 도란이 쇠갈고리로 불길이 옮겨붙은 선반을 넘어뜨렸다. 세리아는 문에 신성 봉인을 걸어 불길이 바깥으로 번지지 못하게 막았다.
불은 한참 뒤에야 꺼졌다.
그 사이 장부의 절반은 재가 되었다. 살아남은 것은 푸른 표지의 두꺼운 책과 석판 세 장이었다. 재하는 그을린 책장을 넘기다 토마스의 이름을 발견했다.
[제17보급대 병사 토마스 브렌]
[군량 지급 기록: 지속]
[최종 전투 기록: 없음]
[유족 공여 계약: 활성]
“있네요.”
브렌이 뒤늦게 창고에 도착했다. 그의 왼손이 책장 위에서 멈췄다.
“우리 아들 이름이… 살아 있구려.”
“기록에 살아 있다는 뜻이지, 실제 생사를 확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재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브렌은 한참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를 품었다가 무너지는 일을 몇 번이나 겪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고맙소. 이름 하나라도 찾았으니까.”
[자발적 신앙 관계 생성: 브렌]
[등록 신도: 4명]
[신앙 포인트: 4]
새 창이 떴다. 재하는 숫자를 보며 아차 싶었다. 유족의 슬픔을 신도 모집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는데도, 시스템은 이런 순간까지 기록하고 있었다.
세리아는 증거를 봉인하며 설명했다.
“군량을 지급한 기록이 남았다는 건, 누군가 토마스 병사의 배급을 수령했다는 뜻입니다. 병사가 살아 있는지, 타인이 수령했는지는 따로 밝혀야 합니다.”
“그럼 누가 수령했는지 알아봐 주세요.”
“제 권한으로 군량 회계 담당자까지는 조회할 수 있습니다.”
재하가 희망을 품은 순간, 세리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기록의 소유자는 전쟁신 카르도입니다. 제 상관이 직접 열람 중단을 명하면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럼 지금까지 한 게 헛수고 아닙니까?”
“아닙니다. 타기 전에 정식 보존 번호를 부여했으니까요.”
세리아는 기록의 모서리를 가리켰다. 작은 금속 문장 하나가 붙어 있었다.
[증거 보존 번호: C-1704]
“이 번호가 있는 증거를 폐기하면, 상급 심판에서도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에반이 혀를 찼다.
“생각보다 좋은 사람인데, 당신.”
“저는 규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드문 거야.”
세리아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재하를 바라봤다.
“당신의 방식도 위험합니다. 사람들에게 기대만 남기면, 나중에 그것이 가장 잔인한 기적이 됩니다.”
“알아요.”
재하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래서 결과를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확인하겠다고만 했죠.”
그 대답에 세리아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
창고에서 건져낸 책의 표지에는 이상한 색의 실이 남아 있었다. 재하가 손을 대자 가느다란 금빛 글자가 솟아올랐다.
[장부 수정 이력]
[수정 전: 전몰 추정, 유족 보상 보류]
[수정 후: 생존 여부 미확인, 신앙 공여 청구 유지]
“이 두 문장은 서로 모순 아닙니까?”
재하가 묻자 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은 중지하면서 공여만 계속 청구했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회계 상태를 달리했군요.”
“수정한 사람 이름은요?”
“상급 신성 서명이 지워져 있습니다. 일반 사제는 수정할 수 없는 방식이에요.”
그녀는 손가락을 허공에 올렸다. 지워진 부분 아래로 다른 기록이 보였다.
[조회 요금: 신앙 포인트 10]
“이건 또 뭐죠?”
“원본 서명을 조회하려면 사용료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재하는 헛웃음을 흘렸다.
“남의 기록을 몰래 바꾸고 누가 바꿨는지 알려면 돈을 내라고요?”
“그 돈을 받는 기관이 기록을 관리하니까요.”
에반이 수첩을 덮었다.
“관리 비용 명목을 붙이는 건 내가 잘 아는데, 저건 나도 좀 부끄럽네.”
세리아는 기록을 봉인 상자에 넣었다. 상자를 닫기 전에 재하는 한 번 더 브렌의 이름을 확인했다. 작은 글씨 하나를 찾으려고 여러 사람이 불 속에 뛰어들었다. 장부가 왜 중요한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기록을 가진 사람이 현실을 지우는 데 익숙해진 세계에서는, 누군가가 계속 기록을 읽고 질문해야 했다.
“브렌 씨에게 바로 말씀드려야겠어요.”
“아직 토마스 씨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록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희망이 아니라 사실을요.”
세리아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란은 불에 젖어 검게 변한 재하의 소매를 보고 꾸중했다.
“불길 속에 들어갈 거면 나를 불렀어야지. 신이라고 다치지 않는 줄 아나?”
“안 다칠 줄 알았는데요.”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만 다친 다음에도 모르면 바보다.”
재하는 조용히 타다 남은 소매를 걷어붙였다. 화상은 이미 희미해졌지만 피부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도란은 약초를 갈아 연고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을 바르는 동안 재하는 자신의 손이 다른 사람의 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이튿날 새벽, 신전으로 돌아온 재하는 또 다른 소란을 만났다. 폐허 신전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마을 사람뿐 아니라 인근 농촌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손에 항아리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맨 앞에 선 여자가 말했다.
“물을 나눠 준다고 해서요.”
“누가요?”
“여기 신전에서요. 기적의 샘을 만든다고….”
재하는 에반을 돌아봤다. 악마는 창고에서 젖은 구두를 말리다 말고 손사래를 쳤다.
“이번엔 내가 아니야.”
릴리가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누군가 밤사이 신전 앞에 작은 표지판을 꽂아 두었다.
[무상의 신전: 원하는 만큼 물을 가져가세요.]
재하는 글씨를 읽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물도 없는데.”
마을에는 오래된 우물이 세 개 있었지만 하나는 말랐고, 하나는 카르도 신전의 군마 전용이었고, 나머지 하나에는 어른이 두 시간씩 줄을 서야 했다. 멀리 외곽 농민들은 물을 구하러 하루를 썼다. 누군가 소문을 악의적으로 퍼뜨렸거나, 간절한 사람이 듣고 싶은 대로 이야기를 바꾸어 전한 모양이었다.
“돌려보낼까요?”
릴리가 물었다.
재하는 그들의 항아리를 바라보았다. 항아리 바닥에는 마른 진흙이 굳어 있었다. 여자의 뒤에서는 어린아이가 허기진 눈으로 손가락을 빨았다.
“물 한 방울 없는 신전이라는 말은 사실대로 해야겠죠.”
재하가 줄 앞으로 나섰다.
“저희 신전에는 기적의 샘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낡은 외투를 걸친 남자가 화를 냈다.
“그럼 우릴 속인 거요?”
“저희가 쓴 표지판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신 분들에게 길을 안내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무슨 길?”
재하는 마을 지도를 펼쳤다. 어젯밤 창고에서 보았던 오래된 석판이 떠올랐다. 군량 배급 기록의 뒤편에는 물길 표시가 있었다. 이 지역에는 과거 군용 수로가 있었다. 현재는 붉은 신전 소유지로 등록돼 있었다.
“강으로 이어지던 수로가 있었어요. 지금도 물이 흐르는지 확인해 봅시다.”
“카르도 신전이 막았는데?”
도란이 대꾸했다.
“그걸 열면 무단 침입 아니야?”
재하는 지도를 자세히 보았다. 수로 전체가 신전 소유인 것은 아니었다. 공공 도로 아래로 이어지는 구간이 있었다.
“그럼 공개 구간부터 확인하죠. 땅을 파는 것도 허락받을 수 있는 곳에서만요.”
에반이 팔짱을 꼈다.
“미친 짓이야. 기적 쓰는 신이 삽질부터 하게 생겼잖아.”
“포인트가 없으니까요.”
“그걸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마!”
***
그날 정오, 신전 뒤편 공터에는 열세 명이 모였다. 도란이 삽을 빌려 주었고, 릴리는 작업자를 위한 물통을 마련했다. 마르타는 자신이 아는 옛 수로의 위치를 설명했다. 브렌도 한 팔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작은 돌을 치웠다.
재하는 작업 시작 전에 말했다.
“이 일에 참가한다고 신도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저를 믿지 않아도 괜찮아요. 대신 누가 어디서 다쳤는지 바로 알려 주세요.”
한 남자가 삽을 들고 물었다.
“그럼 신님은 여기서 뭘 얻습니까?”
“물길이 열리면 신전도 물을 쓸 수 있죠.”
사람들이 웃었다. 그 말은 화려한 약속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땅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몇 년 동안 누군가 일부러 돌과 진흙을 메워 두었던 것 같았다. 무너진 배수관 옆에서는 오래된 금속 봉인 하나가 나왔다.
[군용 수로 제3차단문]
[전쟁신 카르도 관리]
[유지 목적: 인근 민간 농경지 보호]
재하는 문구를 두 번 읽었다.
“농경지 보호용 시설이면, 왜 농경지로 가는 길이 막혀 있습니까?”
도란이 봉인을 손톱으로 긁었다.
“예전에는 비가 오면 둑이 무너졌어. 제3차단문을 닫으면 홍수는 막을 수 있었겠지. 그런데 그 뒤에 아무도 다시 열지 않았어.”
재하는 함부로 봉인을 부수지 않았다. 이곳에는 알지 못하는 물길이 있을 수 있었다. 대신 나무 막대기로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세 시간 뒤, 땅속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누군가의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흙 사이로 차가운 물이 스며 나와 도란의 장화 끝을 적셨다. 작업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물이야!”
릴리가 두 손을 입에 모았다.
“정말 흐르고 있어요!”
하지만 물줄기는 손가락 굵기에 불과했다. 재하는 환호하는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아직 마실 수 있는 물인지 모릅니다. 수로 안에 쌓인 흙을 더 걷어내고 확인해야 해요.”
에반이 그를 쳐다봤다.
“기적이라고 소문낼 기회인데?”
“모르는 물을 먹였다가 탈이 나면요?”
“세상에서 네가 제일 이상한 신이야.”
그때 재하의 눈앞에 두 개의 문구가 동시에 떠올랐다.
[공동 행동에 의한 자발적 신뢰 형성]
[신앙 포인트: 9]
그리고 바로 아래.
[미등록 신성 시설을 훼손한 혐의로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신고자: 전쟁신 카르도 신전]
[조사관 출동 예정]
재하는 젖은 장화를 내려다봤다.
“아니, 우린 흙만 팠는데.”
멀리서 붉은 망토가 보였다. 이번에는 세리아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로 무장한 기사 네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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