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신 카르도는 병사들에게 행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장부를 들고 오라고 했다.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곳에 군대를 들이밀 순 없다.”
라그온은 군사 지도를 펼쳤다. 무진 분지는 높은 산과 좁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었다. 북쪽 도로를 막으면 물 공급이 끊기고, 남쪽 고개를 봉쇄하면 환자를 외부 치료소로 옮길 수 없다. 전투가 아니라 도로의 안전만 확보해도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전하, 담보청 측에서 무진 분지의 새 관리신 등록을 승인해 달라는 요구가 왔습니다.”
“내가 왜 그걸 승인해야 하지?”
“그들은 군의 민간 구호 협약이 효력을 갖기 위해 후견 신격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카르도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나는 군 보급을 책임진다. 남의 기도를 소유할 권한은 없다.”
라그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씀이 신앙 담보청의 기록에 남아도 괜찮습니까?”
“남겨라. 내 부하가 굶을 때도 남긴 기록이다. 남의 물통 때문에 마음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 아침 무진 분지에 군용 물통이 도착했다. 나무 상자에는 전쟁신의 붉은 문양이 붙어 있었지만 상자 속 물에는 어떤 신앙 계약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아라는 상자를 열기 전에 물품 수령서를 읽었다. 반납해야 하는 손수레, 반환하지 않아도 되는 비상 물통, 파손 시 비용을 따로 계산해야 하는 여과 장치. 모두 명시돼 있었다.
“이건 참 이상한 경험이네요.” 아라가 말했다.
“뭐가요?” 재하가 물었다.
“전쟁신의 군대가 와서 전쟁을 하지 않고 납품 명세서를 보여 주다니.”
재하는 멀리 서 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수로 옆에서 짐을 나르는 병사 토마스가 있었다. 예전에 담보청 문제를 두고 그에게 질문을 던졌던 병사였다. 토마스는 재하를 발견하고 경례 대신 물통 하나를 내밀었다.
“신님도 하나 드시겠습니까?”
“저는 나중에요. 필요한 분들이 먼저 받아야죠.”
“우리도 먼저 마신 뒤 내놓으면 문제가 되긴 합니다.”
토마스는 옆 병사와 번갈아 물을 마셨다. 군용 물통의 배급량이 충분한지 확인해야 하는 사람들도 인간이었다. 재하는 무조건 양보만 요구하는 게 정답은 아니라는 걸 또 배웠다.
식수 배급은 생각보다 질서 있게 진행됐지만 작은 문제가 계속 생겼다. 군용 물통 하나의 뚜껑이 맞지 않아 물이 샜고, 도르래를 당기던 병사가 손바닥에 물집이 잡혀 교대를 요청했다. 재하는 순간적으로 신성으로 상처를 낫게 하겠다고 말했다가 그 병사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습니다.” 병사는 손을 뒤로 숨기지 않았다. “의무병이 보는 게 더 편해요.”
“그렇군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실망하셨습니까?”
“아뇨. 사실 제가 할 수 있는 기적도 별로 없거든요.”
병사가 웃었다. “그럼 신님이랑 저랑 비슷하군요. 저도 할 수 있는 건 물통 들기밖에 없는데.”
그 말이 재하에게 오래 남았다. 누구든 자신의 능력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이 맡은 일을 다른 사람이 이어받을 수 있도록 알려 주면, 물통은 계속 앞으로 간다.
한편 군의 지원을 불편하게 여기는 주민들도 있었다. 백팔십삼 년 전 신전이 떠나갈 때 군이 제대로 지켜 주지 않았다는 기억 때문이었다. 주민 한 사람이 라그온에게 대놓고 말했다. “당신들 상관도 그때 우리 조상들을 외면했어. 지금 와서 왜 도와주는 거지?”
라그온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때의 기록을 확인하겠습니다. 지금 지원을 받기 싫으시다면 다른 운송 수단을 선택할 수 있도록 주민회와 협의하겠습니다.”
“전쟁신의 부하가 그렇게 쉽게 물러선다고?”
“우리도 모든 선택에서 강해 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재하는 나중에 라그온에게 물었다. “카르도가 들으면 좋아하겠네요.”
“전하가 좋아하시진 않을 겁니다.” 라그온이 담담하게 답했다. “하지만 보고받을 겁니다. 불편한 보고를 받지 않는 지휘관에게는 오래 남을 병사가 없습니다.”
릴리는 주민회가 군 지원 물자를 확인할 때 쓰는 표를 하나 더 만들었다. 상자에 그려진 전쟁신 문양과 관계없이 이 물자는 어떤 신앙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굵게 적었다. 한 주민이 물었다. “정말 그러면 신성 포인트가 줄지 않나요?”
재하는 웃었다. “저한테는 아무 포인트도 안 들어옵니다. 그리고 안 들어오는 게 맞아요.”
그 말을 들은 주민은 비로소 상자를 집으로 가져갔다.
그날 오후 세리아는 천계 관리기관으로부터 강제 출석 통지를 받았다. 무진 분지에서 발생한 기도 12,408건의 ‘미등록 잠재 신성’을 보전하라는 명령이었다. 신 없는 땅의 기도에 신을 지정하지 않으면, 천계가 회계상 손실을 보게 된다는 논리였다.
“제가 이해한 게 맞습니까?” 재하가 물었다. “남이 보내지도 않은 편지를 장부에 자산으로 적어 놓고, 그게 돈이 안 된다고 손실이라는 겁니까?”
“그쪽 계산법은 그렇습니다.” 세리아가 대답했다. “다만 행정명령은 정식으로 발급됐습니다. 대응하지 않으면 자동 배정 절차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아라는 분명히 말했다. “우리 마을은 신격 지정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의사는 기록에 남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존 시스템이 반대 의사까지 미응답 발화로 취급한다는 거죠.”
“안 돼도 기록은 해야 합니다.” 릴리가 말했다. “그걸 포기하면 나중에 우리가 어떤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주민회는 비상 공개 심리를 열기로 했다. 장소는 돌문 마을이 아니라 남쪽 수문 앞의 넓은 공터였다. 수문이 오염의 출발점이었고 그곳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환자와 고령자들을 위한 그늘막도 설치됐다.
하지만 회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담보청 측 집행관들이 나타났다. 검은 제복을 입은 여섯 명과 서류로 된 새 세 마리. 새들은 지붕을 압류하던 회수체와 닮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날개 끝에 푸른 인장이 달렸다.
“본 회의는 미등록 신성 자산의 처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선두 집행관이 말했다. “공식 관리신이 지정될 때까지 발언을 중지하십시오.”
카르도의 군복을 입은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라그온은 집행관에게 통행 허가서의 적용 범위를 물었다. 집행관은 우편로와 보관소에 대한 권한을 보여 줬다. 공터의 주민 집회까지 중단할 권한은 적혀 있지 않았다.
“여기는 군의 구호 협약상 개방된 민간 통행로입니다.” 라그온이 말했다. “적법한 봉쇄 명령이 없다면 병사가 사람들의 이동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집행관이 비웃었다. “전쟁신 카르도에게 군사적 불이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카르도의 목소리가 군기에서 울렸다. “불이익은 내가 감당한다. 내 이름으로 민간인을 위협하지 마라.”
마을 사람들은 놀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카르도는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말은 붉은 군기에서 전달됐지만 그 어떤 사람의 머리 위에도 신도 등록 창이 뜨지 않았다.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집행관은 군기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러다 마지막 서류를 꺼냈다.
[기도 관리신 자동 배정 청문]
[발화 12,500건 충족 시 즉시 집행]
[현재 충족률: 99.3%]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발언할 수 있다.” 집행관이 말했다. “그러나 발언은 기도로 간주되어 접수된다.”
공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말을 해야 막을 수 있는데, 말하는 순간 상대가 원하는 숫자가 올라간다. 주민들의 입을 막는 데 이보다 교묘한 방법은 없었다.
아라는 입을 열려다가 멈췄다. 하심이 그녀의 손등을 잡았다.
“말하고 싶은 사람을 협박해서 입을 다물게 하는 게 규칙이라면, 그 규칙이 먼저 틀린 거야.”
재하는 무상의 약속을 떠올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누구의 자유로운 계약도 아니었다. 발언권 행사에 신앙 귀속을 강제로 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권능으로 집행관을 지워 버릴 수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불법으로 연결된 조항을 분리하는 일이었다.
“세리아. 원계약에 자기 의견을 밝히는 행위가 신앙 수입으로 처리된다는 조항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그 연결 부분만 다툽시다.”
재하는 공터 한가운데서 손을 들었다. 손끝에 약한 금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강제 계약을 취소하듯 번쩍이는 빛이 아니라, 두 장의 서류를 구분하는 얇은 선이었다.
[무상의 약속: 강제 귀속 관계 검토]
[원계약상 발언 권리: 독립]
[집행관의 추가 조건: 출처 불명]
집행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격 하나가 천계의 자산을 흔드는가?”
“아니요.” 재하가 말했다. “사람이 입을 연다는 이유로 기도 장부에 올리는 걸 멈춰 달라는 겁니다.”
금빛 선은 잠시 집행관의 서류를 가르다가 멈췄다. 권능이 실패한 게 아니라 검증할 자료가 부족했다. 세리아가 바로 원계약의 마렌 증언과 비서명자 의견 통로 복원 판결을 제출했다. 아라는 마을 규약과 주민회의 기록을 내놓았다. 하심은 오래된 우편망의 원본 보관 의뢰서를 꺼냈다.
하나씩 증거가 쌓이자 금빛 선이 다시 움직였다. 먼저 주민회의 발언을 미응답 발화로 자동 계산하는 회선이 끊어졌다. 이어 집행관의 강제 침묵 명령이 효력 보류 상태로 바뀌었다.
[주민 발언의 자동 기도 환산: 임시 정지]
[미등록 미응답 발화 총량: 12,408 유지]
[기존 기록의 법적 분류: 미확정]
공터에서 사람들이 숨을 내쉬었다. 아라는 맨 앞에 나와 말했다.
“저희는 신이 필요 없다는 선언을 다시 합니다. 다만 도움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말을 우리가 결정한 사람에게 전해 줄 권리를 지키고 싶습니다.”
재하는 물통 하나를 곁에 내려놓았다. 하심이 아라에게 물을 건넸다. 집행관은 말없이 자리를 떠났지만 마지막 종이 새 한 마리는 공터 위에 남았다.
주민회의의 발언이 기도로 자동 환산되지 않는다는 임시 결정이 내려지자, 공터의 사람들은 하나둘 손을 들었다. 그러나 모두가 관리신 배정을 반대하는 건 아니었다. 한 젊은 남자는 오염된 물 때문에 아버지가 쓰러졌다고 말했다. 어떤 신이든 와서 병을 고쳐 준다면 기꺼이 믿겠다는 것이었다.
아라는 그를 꾸짖지 않았다. “그 선택을 하실 권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선택 때문에 이 마을 사람들 전부가 같은 계약을 맺게 할 순 없어요.”
“그럼 우리 아버지는요?”
릴리가 곁으로 가서 의무실에 남아 있는 응급 치료 물품과 외부 이송 경로를 설명했다. 재하는 그 남자의 손을 붙잡으려다가 멈췄다. 위로를 받는 것조차 원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남자는 릴리의 설명을 들은 뒤 환자 수레를 준비하러 떠났다.
“방금 저분이 신을 믿겠다고 말했는데, 신도 숫자는 왜 안 늘었습니까?” 에반이 작게 물었다.
“저분이 저를 믿는다고 한 적은 없잖아요.” 재하가 말했다. “그리고 누구를 믿든 그건 지금 아버지를 돌보는 일과 별개로 존중받아야겠죠.”
세리아는 공개 심리의 회의록을 정리했다. 반대 의견 64건, 찬성 의견 19건, 보류 의견 11건. 숫자는 당일 자리에 참석해 의견을 낸 사람들만을 의미했다. 분지 전체 인구의 뜻인 것처럼 쓰지 않도록 표제에 분명히 적었다.
“이런 숫자는 오해받기 쉽겠네요.” 재하가 말했다.
“그래서 모집단을 적는 겁니다.” 세리아가 대답했다. “주민 전체 투표가 아니라 공개 청문 의견 접수라고요.”
집행관의 새는 검은 날개를 접고 있었지만, 여전히 공터 위에 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그 광경이 무서워 발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라는 회의 끝에 별도의 서면 의견 접수 기간을 열겠다고 했다. 당장 말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재하는 그 결정을 지지했다. 하지만 얼마 뒤 누리가 알려 준 새 신호는 아직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의 말까지 값으로 환산하려는 기계가 남아 있음을 보여 줬다.
누리가 그것을 가리켰다.
[집행 유예 후 대체 계산 방식 탐색 중]
[과거 미응답 발화 원본 재분류 시도]
“왜 아직 떠나지 않죠?” 릴리가 물었다.
“새로 말하는 걸 못 세면.” 에반이 낮게 말했다. “옛날 말을 새로 계산하려는 거지.”
그 말이 끝나자 남쪽 수문의 철판 아래에서 오래된 목소리 아흔두 개가 동시에 울렸다.
우편망의 회수 기록을 관리하던 주민이 급히 종을 쳤다. 잘못 울린 경보가 아니었다. 땅 밑에서 금속이 울리는 소리는 천계의 종과 달리 날카롭고 불규칙했다. 카르도의 병사들도 무기를 꺼내지 않고 주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통행로를 비웠다. 지금 필요한 건 적을 공격하는 손이 아니라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이끄는 손이었다. 새롭게 누군가가 기도한 게 아니었다. 오래전에 남긴 말을 다시 올려 적으려는 자동 장치가 깨어나고 있었다.
제5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