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이 새 광고 문구를 가져왔을 때, 윤재하는 처음으로 그 문구를 끝까지 읽었다.
[당신의 기도를 돌려드립니다. 단, 당신이 원한다면.]
“좋네요.”
“뭐?”
“좋다고요. 마지막에 ‘상담 무료’ 같은 문구도 없고.”
“그럼 칭찬을 좀 더 해 줘. 난 어제 밤을 새웠어.”
“이제 문제는 광고가 아니라 진짜로 돌려주는 방법입니다.”
에반은 새하얀 종이 뒤집어 흔들었다. 거기에는 반송 절차가 일곱 단계로 그려져 있었다. 발신자 확인, 당사자 동의, 보관 기록 대조, 복사본 위치 확인, 부당 귀속 중지 신청, 공개 범위 선택, 최종 반환 통지. 악마의 업무 수첩치고는 놀랍도록 정직했다.
“이건 내가 옛날에 삭제한 취소 버튼을 다시 만드는 일과 비슷해.” 에반이 말했다. “다만 사람들이 뭘 취소하는지 모르면 또 똑같은 일이 벌어져.”
세리아는 절차도를 보며 몇 군데에 붉은 표시를 했다. “개인이 과거에 쓴 편지가 현재 대리인에게 유효하게 위임됐는지는 별도 확인해야 합니다. 사망자의 기록과 미성년자의 기록도 다릅니다.”
“수정할게.”
“그리고 취소를 신청하지 않은 사람의 기록을 일괄 삭제해서도 안 됩니다. 역사적 피해를 증명할 자료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에반은 잠시 눈을 감았다. “광고 한 줄 만들 땐 참 쉬웠는데, 실행은 이렇게 어렵구나.”
“그게 실행의 가격이죠.” 재하가 대답했다.
무진 분지 주민회는 원시 우편로 0번에 대한 공동 열람을 승인했다. 우편배달부 하심이 지하 기초실의 열쇠를 빌려주기로 했지만 조건은 분명했다. 시설 안전을 확인할 것, 편지 원본을 옮기지 말 것, 기록의 소유권을 신격이나 외부 조합으로 바꾸지 말 것. 미라는 원래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점검하며 수문 운용 인력을 먼저 확보했다.
“수로는 오늘도 돌아가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멋진 진실 하나 찾으려다 내일 마실 물을 끊는 건 도움이 아니에요.”
재하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 사이 아라와 에반은 주민에게 공개할 반송 절차를 만들었다. 주민들이 조합의 수익 모델을 이해할 수 있도록 실제 사례를 익명으로 바꿔 설명했다. 한 사람이 아픈 동생을 위해 남긴 말이 어떤 경로로 복사됐고, 몇 번 거래됐으며, 지금 누구의 장부에 잡혀 있는지.
“왜 익명으로 써요?” 바니가 물었다.
“당사자가 공개를 원하지 않았으니까.” 아라가 말했다.
“그럼 누가 피해자인지는 모르잖아요.”
“피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이름까지 필요한 건 아니야. 나중에 그분이 원하면 직접 이야기할 수 있어.”
바니는 잠시 생각하다 공지문 끝에 작은 그림을 그렸다. 반송 우편함 위에 네모난 지붕을 얹은 그림이었다. 에반은 그것을 새 안내판에 넣고 싶다고 했다. 바니는 사용해도 좋지만 자기 이름을 넣지는 말라고 했다.
“저작자 표시도 없는데 괜찮아?” 에반이 물었다.
“그냥 사람들이 알아보면 돼요.”
“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사업 감각을 이해할 수가 없어.”
재하는 웃었다. 누구나 대가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받을지 스스로 고르는 것일 뿐이었다.
시범 운영 첫날에는 열람을 원한 주민이 일곱 명뿐이었다. 그중 세 명은 자신의 기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안도했고, 두 명은 기록이 있다는 사실만 확인한 뒤 내용을 보지 않기로 했다. 한 명은 긴 편지를 돌려받았으며, 마지막 한 명은 자신이 쓴 적 없는 문장이 자기 이름으로 등록돼 있다는 신고를 남겼다.
“일곱 명인데 결과가 일곱 가지네요.” 릴리가 말했다.
“열 명이 오면 열 가지겠지.” 에반이 답했다.
가장 마지막에 온 사람은 우물가에서 오래 일한 여성 소라였다. 그녀의 이름으로 등록된 문장은 ‘어떤 신에게든 평생 봉사하겠습니다’였다. 소라는 자기 이름도 제대로 쓰지 못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수로 공사장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했을 뿐, 영원한 봉사를 약속한 적은 없었다.
“그냥 지워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세리아는 바로 지우지 않았다. 삭제하기 전에 위조 경로를 증명할 증거를 별도로 보존해야 하는지 설명했고, 소라에게 그 기록을 볼 사람과 보관 장소를 선택할 수 있다고 알렸다. 소라는 공개는 싫지만 조사에는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주민회 기록관리자는 이를 구분해 접수했다.
“말이 어렵네요.” 소라가 중얼거렸다.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못 만든 사람이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어요. 그래서 저희가 질문을 쉽게 정리하는 중입니다.”
에반은 상담대 앞에 칠판을 놓았다. ‘당신은 이 말을 한 적 있나요?’ ‘누가 볼 수 있게 할까요?’ ‘돌려받고 싶나요, 보존하고 싶나요?’ 세 질문이었다. 법적 절차가 그 질문 세 개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주민이 자기 뜻을 밝히는 출발점은 될 수 있었다.
그날 첫 반환 영수증이 나왔다. 문서를 돌려받은 사람은 기뻐하면서도 머뭇거렸다. “신님, 비용이 얼마죠?”
“이 신청에 대해서는 별도 비용을 받지 않습니다. 운영 비용은 주민회의가 승인한 지원금에서 나갑니다.” 재하가 답했다.
“그럼 감사의 기도라도….”
“감사는 받아도 돼요. 하지만 갚을 의무는 없습니다.”
그 사람은 결국 기도 대신 손수 만든 작은 빵 두 개를 두고 갔다. 에반은 그것을 장부에 기부로 기록해도 되는지 당사자에게 물었다. 재하는 잔돈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물을 신앙 포인트로 계산하지 않는 세상이 얼마나 편한지 새삼 느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마을 안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외부에서 온 신이 사람들의 기도를 훔쳐서 몰래 팔고 있다.’ ‘악마가 아이들 이름을 모아 신앙 포인트로 바꾼다.’ ‘우물 오염은 신전이 들어오기 위한 자작극이다.’
소문은 날카로웠다. 실제로 재하는 무명의 신격이었고 에반은 신앙 장부를 설계하던 악마였다. 주민들이 두 사람을 의심할 근거는 충분했다. 누군가 그 근거에 허위 사실을 보탰다고 해서, 의심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반박 전단을 뿌리면 됩니다.” 에반이 말했다.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죠.” 재하가 답했다. “우리 쪽에서 주민 정보를 누군가에게 보여 준 적이 있는지요.”
세리아는 열람 기록을 점검했다. 마을 주민들이 승인한 범위 외에는 개인 기록을 복사하지 않았고, 에반의 업무 계정에는 여전히 개인정보 열람 권한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위험한 흔적이 발견됐다. 외부 조합이 아라의 공개 회의 일정과 임시 식수 배급표를 입수한 것이다. 배급표는 주민회가 스스로 공개한 정보였지만, 조합은 이를 이용해 물이 가장 부족한 구역을 정확히 겨냥할 수 있었다.
“공개 정보도 악용될 수 있군요.” 릴리가 말했다.
“그렇다고 전부 숨기면 주민들이 배급을 감시할 수 없어요.” 아라가 대답했다. “구역별 총량은 보여 주고, 한 집의 구체적인 사정은 빼야겠네요.”
재하는 소문을 정면으로 반박할 기회를 받았다. 회관 앞 공개 질의 시간이었다. 누군가 물었다.
“신격님, 당신이 이곳에서 신도를 모집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믿습니까?”
“말만 믿지 마십시오.” 재하가 대답했다. “제 권한으로 무슨 명부를 열었는지 확인하실 수 있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방법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규칙으로 정하는 겁니다.”
“그게 말장난 아닌가요?”
“가능합니다. 저도 말장난처럼 들릴 때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마을 분들이 저희 팀의 출입과 기록 접근 권한을 언제든 정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주민들은 웅성거렸다. 한 노인이 손을 들었다. “그러면 지금 당장 돌아가라고 하면 갑니까?”
“네. 다만 식수 운반을 맡은 저희 사람이 어디까지 인계하고 돌아갈지는 협의해야 합니다. 중간에 물을 버리고 가는 건 곤란하니까요.”
노인은 한동안 재하를 보다가 말했다. “듣기 좋은 말보다 어려운 약속이군.”
그날 밤 에반은 소문을 퍼뜨린 출처를 찾았다. 누가 최초로 말했는지 알아내는 대신, 여러 장의 전단에 똑같이 인쇄된 오탈자부터 살폈다. 옛 인쇄 기술자는 작은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기도’라는 글자의 마지막 획이 유난히 길었다. 이는 신앙 담보청 전신 기관에서 사용한 목제 활자의 특징이었다.
“소문까지 제조한 겁니까?” 재하가 물었다.
“증거가 아니라 단서야. 같은 활자가 쓰였다는 건 같은 인쇄소나 오래된 틀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지.”
“오늘은 추정이라고 말하는군요.”
“세리아가 너무 많이 고쳐 놨어.”
에반은 자신이 설계했던 중계소의 옛 주소를 조사했다. 무진 분지 밖 삼거리의 폐허 인쇄소. 그곳에는 작은 포장 상자가 남아 있었다. 상자에는 ‘미응답 발화 보관 안내’라고 찍혔지만, 실제로는 동의 버튼을 누르게 하는 가짜 편지가 들어 있었다. 주민들이 자기 기록을 돌려받으려면 먼저 신앙 정보의 수집에 동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환불받으려면 먼저 새 계약을 하라는 거군요.” 재하가 말했다.
“가장 더러운 방식 중 하나지.”
에반은 상자에 손을 대지 않았다. 독립 증인을 부르고 위치를 기록한 뒤 공문으로 보전 신청을 했다. 그 과정에서 재하는 에반의 손끝이 떨리는 걸 봤다. 악마가 두려워하는 건 자기 과거가 드러나는 순간만이 아니었다. 예전의 자신이 만든 방식을 누군가 지금도 사용한다는 사실이었다.
“에반.”
“왜?”
“이걸 바로잡는다고 당신이 했던 일까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알아.”
“하지만 바로잡을 필요는 있잖아요.”
에반은 조금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아.”
소문을 바로잡는 회의에서 에반은 자신이 왜 주민회의를 설득하기 어려운지 직접 설명했다. 과거 그는 담보청과 연결된 기업의 설계를 맡았고, 사람들의 반환 통로를 닫는 데 기여했다. 그 책임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신을 왜 믿어야 합니까?” 주민 한 사람이 물었다.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반이 답했다. “제가 쓴 프로그램이 지금 어디에 연결돼 있는지는 독립 검사로 확인하세요. 위험이 발견되면 제 접근 권한을 막으시면 됩니다.”
그 남자는 당황했다. 그는 에반이 말재주로 자신을 설득하려 할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재하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반이 자신의 이름으로 답할 문제였다.
아라는 주민회 기록을 손으로 넘겼다. “그럼 조사할 때 조건을 붙이겠습니다. 에반 씨는 개인 기록 원문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인쇄 방식과 설계 연결만 조사합니다. 결과는 세리아 씨와 마을 기술자에게 교차 확인받습니다.”
“그렇게 하죠.”
“조사가 끝나도 면책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알아.”
뒤쪽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그런데 제 우편을 누가 훔쳐 봤는지는 알려 줄 수 있어요?”
아라는 외부 조합과의 분쟁에서 확보한 접속 기록을 보여 줄 수 있는 범위부터 설명했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확인 중이라고 표시했다. 사람들은 모든 답을 그날 얻지 못했다. 하지만 틀린 답을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보다, 아직 찾고 있다고 말하는 쪽을 조금 더 오래 들어 주었다.
회의가 끝나자 에반은 잠시 바깥으로 나왔다. 재하가 옆에 섰다.
“잘하셨네요.”
“칭찬하지 마. 빚 갚는 일인데.”
“빚을 다 갚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도 오늘은 도망치지 않았으니까요.”
에반은 오래전보다 훨씬 지친 얼굴이었지만 웃었다. “내 광고 생애에서 이렇게 판매가 안 된 날도 드물 거야.”
“대신 반품 창구가 생겼죠.”
“그건 인정해야겠네.”
그날 자정, 지하 기초실에서 붉은 신호가 올라왔다. 바니가 그날 그려 놓은 작은 우편함 그림이 회관 벽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원시 우편로가 새 주소를 인식한 것이다.
[수신인 자동 배정 반대 신청 접수: 1건]
[발신인: 바니]
[의사 표시: 제 말의 주인은 저예요]
재하가 웃는 사이 더 많은 우편함이 반짝였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는 이유로, 자기 말을 새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리가 급히 경고했다.
[새로운 발화 감지]
[미응답 발화 총량 증가 가능]
[12,500건 자동 배정 조건 접근]
에반이 입을 벌렸다. “잠깐만. 우리가 반대 신청을 받는 순간 그걸 또 새로운 기도라고 계산하면….”
재하는 불빛을 바라봤다. 회의장 밖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가 남긴 기록이 있는지 묻고 있었다. 그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말을 하면 장부가 채워지고, 말을 하지 않으면 부당한 계약을 다툴 수 없다. 양쪽 모두 조합이 유리한 선택지가 되어 버렸다. 그는 그 사실을 종이에 그대로 적어 아라에게 건넸다. 반환을 요구하는 말까지 수익으로 잡는 구조. 누군가는 사람들에게 침묵하거나 빚을 지는 것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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