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 분지의 마지막 우편배달부는 아흔세 살이었다.
이름은 할머니 하심. 돌문 마을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 떨어진 산기슭에 살았고, 매일 새벽 우편함 세 개를 닦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았다. 주민들은 그가 은퇴했다고 말했지만 할머니는 단호히 부정했다.
“편지가 없어야 은퇴하지. 아직 안 간 편지가 있는데 어떻게 은퇴해?”
윤재하는 낡은 우편가방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가방에는 구멍이 몇 개 나 있었고 끈은 세 번이나 기워 붙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봉인된 잠금쇠만큼은 반짝였다.
“할머니, 그 가방에서 신성 반응이 나온다는데요.”
“가방이 아니라 안에 있는 종이에서 나오겠지.”
“열어 봐도 됩니까?”
“너한테 온 건 있어?”
“없습니다.”
“그럼 왜 열어?”
재하는 입을 다물었다. 에반은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신이 됐는데도 매일 상식 교육을 받는군.”
“반복 학습이 중요하죠.”
하심은 오래전 분지의 우편로를 관리하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소녀였을 때는 아직 떠나지 않은 몇몇 신전의 사제가 마을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중 하나는 기도를 옮겨 주겠다며 사람들의 사연을 수집했다. 사람이 울면서 털어놓은 말도, 아이가 쓰다 찢어 버린 편지도 모두 가져갔다.
“기도는 우편이 아니라고 말했지.” 하심이 말했다. “그런데 사제가 웃더라. 우편은 반송할 주소라도 있지만 기도는 없으니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그때부터 보관하기 시작하셨어요?” 릴리가 물었다.
“돌려주려고.”
할머니는 벽에 걸린 작은 나무표 하나를 가리켰다. 표에는 ‘반송 희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편지를 쓴 사람이 주소를 잊었거나 보내지 않기로 마음을 바꿨을 때, 우편국은 편지를 버리기 전에 보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송과 폐기 사이의 선택은 발신자 몫이었다. 할머니의 우편국에선 그 규칙이 가장 중요했다.
“누군가 기도라고 부르면서 가져간 말도 마찬가지예요.” 릴리가 조용히 말했다.
하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입 밖에 낸 말은 전부 하늘의 재산이 아니야. 어떤 말은 그저 누가 곁에 있어 주길 바라는 소리였지.”
그날 오전 아라는 하심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미응답 발화 12,408건을 자산으로 취급한 보관조합, 12,500건이 되면 자동으로 관리신을 배정하는 계약, 오염된 우물을 이용해 추가 발화를 유도하는 정황. 하심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우편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와서 그 짓을 다시 하다니.”
그녀는 가방의 잠금쇠를 열지 않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에는 예전에 돌려받기로 했던 한 사람의 마지막 편지가 있어. 그 사람이 나한테 직접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지.”
“누구입니까?” 재하가 물었다.
“처음으로 이 마을에서 ‘아무 신도 우리 말을 가져가지 못한다’고 선언한 사람. 내 어머니의 스승이었던 서기 라온.”
에반이 눈을 크게 떴다. “라온? 그 이름은 신앙 담보청의 초기 해지 신청 목록에서 봤어.”
“유명한 사람이에요?” 바니가 물었다.
“유명해지면 안 되는 사람이었지.” 하심이 말했다. “사람들을 대신해서 계약에 서명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그 이름이 명부에서 지워졌거든.”
재하는 가방을 바라봤다. 신이 된 뒤 이름이 지워진 사람의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중앙 장부에서는 사라진 이름이 지방 우편가방 안에서는 살아 있었다. 그 차이를 만든 건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우편을 포기하지 않은 한 사람이었다.
“그 편지, 지금 열 수 있습니까?” 세리아가 물었다.
“조건이 있어.”
하심은 우편함 밑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그 안에는 라온이 직접 쓴 보관 의뢰 문구가 남아 있었다. ‘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다시 오거나, 우리 마을 사람들이 공개 열람을 결의하면 보여 주시오. 어떤 신의 명령만으로는 열지 마시오.’
“그럼 주민회의를 열면 되는군요.” 재하가 말했다.
“회의만으로 충분한가요?” 세리아가 물었다. “당사자는 이미 사망했을 수 있고, 유족의 권리도 검토해야 합니다.”
“그건 아라에게 물어봐야죠.”
아라는 기록을 검토하더니 공개 범위를 먼저 정했다. 편지의 개인적인 내용까지 모두 읽을 필요는 없었다. 자동 관리신 배정과 관련된 부분만 주민위원회의 감독 아래 확인하기로 했다. 유족이 있는지 확인할 시간도 정했다. 하심은 그 절차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늙었지만 급하다고 남의 편지를 찢어서 보여 주는 바보는 아니야.”
하심은 라온의 편지를 공개하기 전, 먼저 우편가방 안쪽에 보관된 낡은 이름표들을 꺼냈다. 이름표마다 반송 기한이 달랐다. 어떤 건 이미 주인이 찾아갔고, 어떤 건 가족들이 보존을 원한다는 표시를 남겼다. 대부분은 단지 ‘당사자 확인 대기’라는 작은 표식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하심이 바니에게 물었다.
“산길 올라오는 거요?”
“그것도 어렵지. 하지만 나는 기다리는 게 더 어렵더라. 편지 주인이 언젠가 찾으러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버릴 수도 없고, 누가 훔쳐 갈까 봐 잠도 잘 못 자.”
바니는 빨간 끈이 달린 이름표를 하나 가리켰다. “이건 왜 빨간색이에요?”
“그 사람은 절대로 가족에게도 보여 주지 말라고 했거든. 다만 자기가 다시 찾으러 오면 주라고.”
“그 사람이 안 오면요?”
“그럴 때를 위해 마을에서 보존 기간을 정해 놨어. 자기 뜻을 가장 적게 어기는 쪽으로.”
재하는 그 대화를 들으며 조금 안심했다. 하심이 모든 편지를 영원히 쥐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돌려주지 못했을 때의 책임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라는 회의에 앞서 우편국의 운영 비용을 공개했다. 낡은 가방을 기우는 데 든 천값, 잠금쇠 수리비, 긴 편지를 보관할 때 필요한 건조제, 겨울에 우편함까지 눈을 치울 사람의 식비까지. 비밀스러운 기적은 없었다. 주민들이 조금씩 낸 공동기금으로 굴러가는 시설이었다.
“정말 돈이 많이 드네요.” 릴리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아흔세 살이 되도록 일을 하잖아.” 하심이 농담했다. “새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아무도 내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니 문제야.”
바니가 벌떡 손을 들었다. “제가 배우면 돼요!”
“그러다 너도 한 세기 동안 일하게 될 텐데?”
“그럼 신님도 같이 배우면 되죠.”
재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한 세기 근무 계약이라면 휴가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웃는 동안 하심은 라온의 봉투를 바라봤다. 그녀가 계속 지키던 건 죽은 사람의 종이 한 장만이 아니었다. 말을 했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영원한 빚을 지지 않을 권리였다.
오후 늦게 주민들이 모였다. 맑은 물을 나르는 사람들이 회의 시간을 비울 수 있도록 배급 순서를 조정한 뒤였다. 주민회의에서 편지 일부의 열람이 승인됐다. 하심은 낡은 봉투를 꺼냈다. 종이는 황갈색으로 변했지만 글씨는 또렷했다.
‘우리가 신전을 닫는 날, 열두 종의 소리를 모두 묻어 두지 말자.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은 남겨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신의 빚으로 계산하지는 말자.’
편지에는 당시 주민들이 만든 작은 장치의 설계가 첨부돼 있었다. 신전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공동 우편로를 남겨 두려는 계획이었다. 특정 신에게 가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내는 구조 신호였다.
“그러면 12,408건은 원래 이 우편로에 쌓인 겁니까?” 미라가 물었다.
하심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부는 아닐 거야. 우리 사람들은 편지를 서로 전달해 왔어. 누군가가 중간에서 복사한 기록이 섞여 있겠지.”
에반은 설계도를 보며 손가락을 떨었다. “여기 이 문구를 봐.”
[수신 거부 시 발화권 원소유자에게 복귀]
[보관 조합 및 신격이 임의로 수신인을 지정할 수 없음]
“지금의 자동 관리신 계약과 정반대네요.” 재하가 말했다.
“애초에 수신인을 찾는 게 목적이 아니었던 거야. 사람의 말을 사람에게 돌려주는 게 목적이었어.”
하심은 한 가지를 더 보여 줬다. 우편가방 바닥의 얇은 천을 들어내자 작은 금속 열쇠 하나가 나왔다. 열쇠에는 열두 종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 0이라는 숫자가 있었다.
“이걸 가져가라는 뜻입니까?” 재하가 물었다.
“아니.” 하심은 열쇠를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어디에 쓰는지 알려 주는 거야. 가져가려면 내가 허락할지부터 정해야지.”
에반이 웃음을 터뜨렸다. “할머니가 재하를 완벽하게 조련하시는군.”
“조련은 무슨. 물어보고 가져가라는 말을 하는 데 아흔세 해나 걸려서 그렇지.”
열쇠는 마을 중앙에 묻힌 첫 번째 종탑의 기초실을 여는 물건이었다. 신전이 떠난 뒤 종탑은 헐었지만, 지하 기록실은 공동 우편망의 중심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은 식수 관로가 위를 지나가고 있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미라가 도면을 살폈다. “이 위치라면 남쪽 수문의 오염 회선도 여기로 이어질 거예요. 하지만 들어가려면 물길을 잠시 바꿔야 해요.”
“조심해서 합시다.” 아라가 말했다. “서류 하나 찾겠다고 마을의 물을 또 끊을 순 없으니까.”
재하는 하심에게 고개를 숙였다. “필요한 순간에 열쇠를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마을이 원하고 안전이 확인되면.”
하심은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러고는 재하에게 뜻밖의 질문을 했다.
“너는 신이지?”
“네.”
“그럼 사람들의 모든 부탁을 다 들어줄 수 있어?”
“아뇨.”
“그럴 수 없는데 왜 기도를 자기 이름으로 받으려 하지?”
재하는 잠시 웃었다. “저도 그랬던 적이 있어서 할 말이 없네요.”
“이제는?”
“누가 저를 찾는지부터 확인합니다. 안 찾는 분들께는 신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소개하고요.”
하심은 마음에 들었는지 가방 끈을 고쳐 맸다. “좋아. 그럼 편지 배달하는 사람 하나 늘어난 셈이지.”
열람을 마친 뒤 하심은 새로 뽑힌 우편 담당자에게 가방을 건넸다. 아직 완전히 맡길 생각은 없었지만, 동네에는 자신 말고도 원본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젊은 담당자는 가방을 여닫는 법부터 배우려 했다.
“먼저 배워야 할 건 잠금쇠가 아니야.” 하심이 말했다. “편지를 받아도 되는지 물어보는 일이야.”
재하는 배달부가 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적어 보았다. 주소를 알아보는 눈, 길을 잃어도 돌아오는 능력, 편지를 읽고 싶어지는 마음을 견디는 힘. 마지막 조건이 가장 어려워 보였다.
“신님도 같이 배워요.” 바니가 말했다.
“좋지. 다만 나는 아직 어느 집이 누구 집인지 몰라.”
“그래서 지도부터 외우는 거예요. 기도는 잘 듣는지 몰라도 길은 못 찾으시잖아요.”
에반이 배를 잡고 웃었다. “신이 우편배달 시험에 떨어지겠군.”
하심은 가볍게 웃고 나서 바니의 손에 빈 편지봉투 하나를 쥐여 줬다. “여기에는 네가 전하고 싶은 말을 써 봐. 하지만 누군가에게 꼭 보내야 하는 건 아니야. 쓰고 싶지 않으면 비워 둬도 돼.”
바니는 한참 봉투를 들여다보다 작은 글씨를 남겼다. ‘오늘은 물이 다시 깨끗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멈췄다.
“이거 기도로 잡혀요?”
재하는 봉투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지금은 네가 쓰는 편지일 뿐이야. 누가 멋대로 이름을 붙일 순 없어.”
“그럼 받는 사람은 누구로 해요?”
“정하지 않아도 돼.”
바니는 봉투를 닫지 않고 하심에게 내밀었다. 하심은 그것을 곧장 가방에 넣지 않았다. 보관해 달라는 뜻인지, 그냥 읽어 달라는 뜻인지 다시 물었다. 바니는 자기가 간직하겠다고 했다. 첫 배달은 그렇게 아무것도 옮기지 않고 끝났다.
그 모습을 보던 릴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재하가 신도 없이 시작한 신전에서 배우지 못했던 일이 여기에는 있었다.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을 받지 않는 일. 작은 봉투 하나가 그걸 알려 주었다.
밤이 되어 하심의 우편함 아래에 작은 빛이 켜졌다. 편지 한 통이 분지 바깥에서 도착한 것이다. 누리가 발신 경로를 추적하자 서고 어디에도 등록되지 않은 오래된 노선이 나타났다.
[원시 우편로 0번]
[등록 책임자: 라온]
[현재 연결 상태: 열림]
[최근 수신자: 무진 분지 전 주민]
봉투에는 긴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하심은 그것을 바로 뜯지 않았다. 우편함에 도착한 편지라고 해도 누가 열어야 하는지는 따로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라는 주민들이 공유할 경고문인지 먼저 확인했고, 누리는 바깥에 보이는 문장만 읽을 수 있게 조절했다. 주민들은 그 작은 절차를 기다렸다.
‘12,500개의 이름을 채우기 전에, 열두 번째 종의 받침대를 확인하라.’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미 지워진 줄 알았던 라온의 서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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