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 우물에서 검은 물이 나왔다.
돌문 마을 사람들은 우물가에 몰려들었지만 누구도 먼저 물을 마시지는 않았다. 아라가 첫 번째로 한 일은 급히 달려온 노인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물 곁에 커다란 나무판을 세우는 일이었다.
‘음용 금지. 원인 조사 중.’
“왜 독이라고 안 써요?” 바니가 물었다.
“독인지 아직 모르니까.” 아라가 말했다. “거짓 경고도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어.”
윤재하는 나무판을 읽고 미라를 바라봤다. 미라는 우물에서 뜬 물을 유리병 세 개에 나누어 담았다. 병마다 채취 시각과 위치를 적었다. 아무도 물을 만진 손으로 다른 물통을 잡지 않도록 장갑을 갈아 끼웠다.
“이거 신성 오염입니까?” 재하가 물었다.
“현재는 단정할 수 없어요. 흙탕물과 닮았지만 반응이 이상해요.”
한 병에는 가라앉는 침전물이 생겼고 다른 병의 물은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세 번째 병에서는 얇은 금빛 거품이 일었다. 재하는 거품을 보며 자신의 권능과 비슷하다고 느꼈다가 즉시 생각을 지웠다. 닮았다는 이유로 원인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때 누리가 나타났다.
[무진 분지 외부 회선 접근 증가]
[미등록 발화 예상 발생량: 92건]
[기도 수요 조정 계수: 1.4]
“이건 대체 무슨 계산입니까?” 재하가 물었다.
세리아는 숫자가 적힌 영역을 확대했다. “수요를 조정한다는 말은 위기의 빈도나 영향을 변수로 취급한다는 뜻입니다. 실제 조작 여부는 독립 증거가 필요합니다.”
에반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맞아. 숫자만으로 누군가 우물을 더럽혔다고 고발할 순 없어. 하지만 이 표는 마음에 안 들어. 아주 오래전에 내가 보던 매출 예측표랑 똑같이 생겼거든.”
“당신이 만든 겁니까?” 아라가 물었다.
“아니. 하지만 어디를 찾아야 하는지는 알아.”
그들이 찾아간 곳은 남부 수문의 녹슨 사다리 아래였다. 물길에 연결된 배수관 바깥쪽에서 낡은 전신선이 나왔다. 미라는 전신선을 손전등으로 비추고 말했다. “수문 기계실에서 우물까지 이어져 있어요. 한 가닥은 끊어졌지만 다른 가닥은 지금도 신호가 흐릅니다.”
“물을 바꿀 수 있는 선입니까?”
“선 자체는 물을 바꾸지 못해요. 연결된 밸브를 움직일 수는 있겠죠.”
재하는 그제야 이해했다. 조작자는 하늘에서 무서운 기적을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시설에 아주 평범한 장치를 숨겼다. 신전이 없어도 신앙을 만드는 방법은 남아 있었다.
수문 안쪽 작은 철문은 낯선 도장으로 잠겨 있었다. ‘무소유 기도 보관조합.’ 허가받지 않은 회사가 설치한 시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문은 마을 공동시설에 붙어 있었고, 열면 분지 전체에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아라는 운영위원회 결정을 받아 철문을 봉인한 뒤, 기술 안전 확인을 거쳐 열기로 했다.
그 사이 재하는 천계 기록관에게 보관조합의 법적 근거를 요청했다. 상급 기관의 답신은 놀랍도록 빠르게 도착했다.
[무소유 기도 보관조합]
[사업 유형: 신앙 미수금 유동화]
[보유 자산: 미응답 발화권]
[미확정 상품: 장래 미응답 발화 수익권]
“유동화라는 단어가 왜 또 나옵니까?” 재하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에반은 두 손으로 허공에 작은 과자를 하나 그렸다. “상상해 봐. 누가 내일 과자를 구워 줄 거라고 약속하면, 그 약속을 오늘 팔 수 있겠지.”
“네.”
“그런데 아무도 과자를 굽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 다만 배고파질지도 모르는 사람의 명단이 있어. 그 명단을 근거로 미래의 과자 수익을 지금 팔아 버린 거야.”
재하는 과자 그림을 보다가 말했다. “그거 그냥 사기잖아요.”
“기분 나쁘지만 명쾌한 정리야.”
아라는 장부의 용어를 다시 읽었다. 기도가 누군가에게 도착하지 않았을 때, 보관조합은 ‘미수금’이 발생했다고 처리한다. 정작 발화자는 계약한 적이 없다. 그런데 미수금에는 이자가 붙고, 이자가 미래의 신앙 수익을 담보로 잡는다. 그리고 그 상품을 산 기관은 자신이 산 만큼 ‘기도할 사람’을 확보하려고 한다.
“그래서 위험을 만드는 거군요.” 릴리가 말했다.
“그렇게 의심할 정황이 생겼어요.” 세리아가 강조했다. “실제로 누가 어떤 시설을 조작했는지 찾아야 합니다.”
아라는 창밖의 주민들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빈 물통을 들고 줄을 서 있었다. 재하가 말한 의심을 마을 전체에 알릴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아직 확인되지 않은 범인을 지목하면 증거를 숨길 시간을 줄 수 있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위험만 먼저 공지하겠습니다.” 아라가 결정했다. “오염 가능성과 식수 확보 계획. 외부 장치에 대해서는 분리 작업 시각을 공표하죠.”
그날 오후 회관 옆 작은 방에 새로운 장부가 생겼다. 신앙 장부가 아니라 식수 장부였다. 누가 언제 물통을 받았는지, 가정마다 필요량이 얼마인지, 배급이 잘못됐으면 어디에 이의를 제기할지 적었다. 한 사람이 세 차례 받았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않고, 집에 아픈 사람이 있는지 먼저 물었다. 이름 없이 물을 받을 수 있는 긴급 배급 구간도 만들었다.
에반이 장부를 보고 중얼거렸다. “기적을 팔지 않으니 예상 외로 손이 많이 가는군.”
“실제로 사람을 돕는 건 원래 그렇습니다.” 릴리가 대꾸했다.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의 세 번째 검사가 끝났을 때, 미라는 예상과 다른 결과를 얻었다. 검은색은 신성 반응이 아니라 금속성 침전물에서 나왔다. 수문 기계실의 낡은 철판이 특정 시간에 움직이며 우물로 찌꺼기를 밀어 넣은 흔적이 있었다. 누군가 오염된 물을 ‘신성 결핍’이라고 설명하려 했지만 그 설명은 검증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법이 아니라 밸브로 우물을 더럽혔다는 겁니까?” 재하가 물었다.
“누가 밸브를 움직였는지는 아직 몰라요. 기계가 고장 나면서 자동으로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고요.” 미라가 답했다. “하지만 제어 신호가 분지 바깥에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으니 조사할 이유는 충분하죠.”
아라는 마을 기술자들에게 같은 검사를 반복하게 했다. 외부에서 온 기술자의 말만 믿지 않기 위해서였다. 검사 결과가 일치하자 주민회는 밸브를 교체하고 수문을 수동 모드로 운영하기로 했다. 그동안 물을 끌어올리는 비용은 공개 장부에 적어 누구든 확인하게 했다.
반면 보관조합의 회계 자료를 들여다본 에반은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합은 원시 우편로에 쌓인 발화를 ‘기다리고 있는 신앙’이라는 항목으로 표시했다. 그 항목에는 실존하지 않는 신격의 이름이 미리 준비돼 있었다. 실제 관리신이 등록되는 순간 그 이름을 채워 넣도록 만든 빈칸이었다.
“어느 신을 세울지는 이미 정해졌다는 겁니까?” 세리아가 물었다.
“아직 이름은 없어. 하지만 계약상 권리를 가진 회사가 지정하는 구조야. 주민들이 선택하는 신도 아니고, 기도를 남긴 사람의 의사를 확인하는 신도 아니지.”
재하는 그 문장을 듣고 1화의 자신을 떠올렸다. 신도가 없어 폐허 신전에 떨어졌을 때 그는 무조건 자기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 지금 무진 분지에 들어오려는 관리신에게도 비슷한 유혹이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숫자를 위해 주민의 말을 빼앗는 순간, 그 신은 자신이 처음 혐오했던 천계의 장사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쪽 신도들이 떠나도 괜찮으냐고 제게 물었던 적이 있어요.” 재하가 말했다.
“그랬지.” 릴리가 답했다.
“그때 저는 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숫자가 적어지는 것보다 무서운 일이 뭔지 알겠습니다.”
“뭔데요?”
“사람이 싫다고 말할 수 없는 신전이 되는 거요.”
세리아는 그 말을 기록하지 않았다. 공식 판결에 넣기엔 개인적인 다짐이었기 때문이다. 릴리만 그 문장을 작게 따라 말했다. 마을의 가장 큰 종은 저녁 무렵 울렸지만, 이제 누구도 그 소리를 신에게 기도하라는 신호로 착각하지 않았다.
무진 분지의 저녁 하늘에 검은 종 하나가 떠올랐다. 수문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외부 신앙 회선이 만들어 낸 가상 종이었다. 종이 울리자 장터 중앙의 사람들 눈앞에 작은 창이 나타났다.
[신성 정화수 즉시 배급 가능]
[대가: 무기명 기도 접수 동의]
[동의 클릭 시 오늘 분량 무료]
사람들은 놀라 손을 뻗었다. 물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유혹이었다. 재하는 창을 없애고 싶었지만 본인의 기적이 모든 사람의 선택을 덮어 버릴 수 있었다. 그보다 먼저 아라가 회관 종을 울렸다.
“지금 뜬 계약은 마을 운영위원회가 확인한 적 없는 외부 제안입니다!”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하는 노인을 위해 내용을 큰 소리로 읽었다. 어떤 사람이 창을 누르고 싶다면 강제로 막지는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자동 연장과 장래 기도 권리까지 함께 넘길 수 있다는 점은 알려야 했다.
재하는 제단이 없는 장터 한복판에서 아라가 목이 쉴 때까지 설명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에게 신성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주민들을 보호하는 힘은 그녀의 구체적인 말에서 나왔다.
재하는 거절하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떠넘기는 계약이 얼마나 쉽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했다. 빈 물통을 든 주민들 중에는 오늘 밤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 ‘자발적 동의’라는 말만 들이밀면 공정해지는 것일까. 세리아는 동의를 검토할 때 다른 선택지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살펴야 한다고 했다.
“강제라는 게 꼭 칼을 들이대는 건 아닙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대안을 모두 없애 놓고 하나만 남기면 겉으로는 선택하는 모습이 됩니다.”
에반은 무언가를 적다가 종이를 구겼다. “내가 예전에 만들던 가입 화면이 꼭 그랬지. 제일 큰 단추에는 ‘계속하기’라고 적고, 작은 글씨로 자동 연장을 숨겼어.”
“버튼 크기가 사람의 운명을 바꾸네요.” 재하가 말했다.
“그럴 정도로 사람들이 급할 때를 노렸으니까.”
릴리는 커다란 종이를 가져와 계약 조항을 간단한 말로 옮겨 적었다. ‘물을 받으면 오늘만 내는 비용인가’, ‘내일도 계약이 이어지는가’, ‘거절하면 앞으로 치료받는 데 불이익이 생기는가.’ 주민들은 종이를 읽으며 서로 다른 질문을 했다. 어떤 사람은 자녀가 대신 동의할 수 있는지 물었고, 어떤 사람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했다.
재하는 그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계약서의 문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질문할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상대가 빨리 서명하라고 재촉할수록 질문은 더 필요했다. 아라는 바니의 도움을 받아 ‘지금 동의하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표지판을 입구에 세웠다.
그날 저녁 작은 불편함도 드러났다. 주민회의 임시 물 배급은 줄이 길었고, 사람들은 오래 기다려야 했다. 조합의 화면은 단 한 번 누르기만 하면 된다고 유혹했다. 편리함만 비교하면 조합 쪽이 압도적으로 나아 보였다. 재하는 그래서 기다리는 시간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선택지가 형편없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사람들이 나쁜 계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바니가 손을 들었다. “그런데 저기에 표시된 무료 물, 진짜로 줄 수 있는 건가요?”
미라가 빠르게 물었다. “공급 위치와 수질 검사 기록이 있니?”
“아뇨.”
“그럼 물을 준다는 약속 자체도 확인해야지.”
창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깜박였다. 몇몇은 동의를 누르기 직전 멈췄다. 다른 몇몇은 절박한 얼굴로 계속 손을 올렸다.
누리가 재하에게 경고했다.
[외부 신격 승인 없는 일괄 계약 진행 중]
[기존 시범 복원 결정과 충돌 가능]
[기록 보전 권한: 사용 가능]
재하는 무상의 약속을 사용하는 조건을 확인했다. 타인이 강요하거나 오인시킨 신앙 귀속에는 개입할 수 있지만, 모든 자발적 선택을 일괄 취소할 수는 없다. 그가 먼저 한 일은 계약을 막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숨겨진 자동 연장 문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금빛 선이 창 가장자리를 찢고 나타났다.
[숨겨진 조항 표시]
[향후 30년간 미응답 발화의 우선 수취권 설정]
“30년?” 군중에서 비명이 터졌다.
창을 누르려던 사람들의 손이 멈췄다. 일부는 그래도 물을 받겠다고 했다. 재하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대신 공급처가 실제로 물을 갖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계약 체결을 보류해 달라는 주민회의의 요청을 전달했다.
검은 종이 울음을 그쳤다. 그러자 우물가 전신선 끝에 새로운 숫자가 떠올랐다.
[무소유 기도 보관조합 자산 확보 목표]
[현재 확보량: 12,408]
[목표 수량: 12,500]
[추가 확보 필요량: 92]
에반이 창백해졌다. “92건. 아까 예상 발생량이랑 같아.”
“목표를 채우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재하가 물었다.
누리는 답을 찾는 동안 아주 오래 침묵했다. 그 긴 침묵 끝에 안내창이 바뀌었다.
[12,500건 충족 시 무주 기도 자산 자동 관리신 등록]
[예정 관리신: 지정 대기]
누군가 신 없는 땅에 사람의 동의 없이 신을 세우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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