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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54화
PAYLUA ORIGINAL · 제54화

54화. 식수 한 통에 신전을 끼워 팝니다

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194자

오프라인 책장
돌문 마을 회관에 하늘에서 온 제안서가 떨어졌을 때, 사람들은 처음으로 신격 윤재하를 바라보며 웃었다. 물론 반가워서 웃은 건 아니었다. [천계 협력 구호 계획] [무진 분지 남부 수문 긴급 복구] [신성 정화수 지원: 무료] [조건: 임시 신전 설치 및 현장 관리신 지정] [계약 연장 조항: 자동] “이렇게까지 친절한 계약은 오랜만이네요.” 재하가 말했다. 아라는 제안서를 책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물 좀 준다면서 신전을 세워 달라는 거군요.” 에반은 계약 맨 아래를 손톱으로 긁었다. “무료라고 써 놨지만 연장 뒤엔 요금을 청구할 수 있어. 첫 달 무료 체험과 비슷하지.” “그 광고는 당신 전문이겠네요.” 아라가 쏘아붙였다. “그래서 더 잘 알아. 이건 악마도 함부로 못 내미는 계약이야.” 그날 아침 돌문 마을의 공동 식수통 세 개에서 이상한 흙냄새가 났다. 수문 오작동의 영향이 예상보다 컸다. 주민들은 식수통을 봉쇄했고 학교와 의무실에서는 끓인 물만 사용했다. 그러나 장작도 한정돼 있었다. 남부 들판에 사는 노약자부터 물이 부족해지고 있었다. “하루 버틸 물은 있습니까?” 재하가 물었다. 아라는 이미 계산한 표를 보여 줬다. “중심지는 이틀, 남부는 하루가 채 안 됩니다. 위쪽 마을 두 곳은 우물이 안전하지만 내려오는 길이 좁아요.” “제 권능으로 물을 만들 수 없을까요?” 누리가 곧바로 나타났다. “무상의 약속은 강제된 헌납이나 비자발적 귀속을 바로잡는 권능입니다. 식수를 새로 생산하는 권능이 아닙니다. 다른 기적을 사용하려면 신앙 포인트와 해당 지역의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마법으로 해결하는 건 어렵겠네요.” “말투를 보면 아직도 조금 기대했구나.” 에반이 놀렸다. “신이 됐는데 물 한 바가지 못 만들면 억울하긴 하죠.” 하지만 정화수 대신 신전이 들어서면 무진 분지의 주민들이 그동안 지켜 온 선택이 흔들린다. 기적이 필요한 사람 앞에 계약을 내미는 구조는 이미 한 번 이곳을 무너뜨린 적이 있었다. 재하는 제안서를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로 분리했다. “이건 마을이 판단해야 합니다. 하지만 물이 부족한 지금 결정하라는 건 공정하지 않아요. 선택지를 하나 더 마련해 봅시다.” 미라가 산 위쪽의 관개 도면을 펼쳤다. 오래전에 폐쇄된 운반용 경사로가 있었다. 마차가 다닐 수 없을 만큼 폭이 좁았지만 물통을 매단 도르래라면 설치할 수 있었다. 문제는 쇠줄과 도르래 부품, 산 아래까지 운반할 인력이었다. “우리 쪽 물자는?” 재하가 물었다. “신전 지붕을 고칠 때 남겨 둔 쇠줄이 있어요.” 미라가 말했다. “길이는 부족합니다. 침묵항 우편다리를 수리하면서 확보한 여분을 가져오면 될지도 몰라요.” “그걸 빼 오면 다리 안전은요?” “여분이 맞는지 확인하겠다는 뜻이에요. 안전용 예비 부품이면 못 빼요.”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은 벌써 전단지 뒷면에 지원 요청 문구를 쓰고 있었다. ‘기적 없는 식수 운반. 믿음 대신 물통을 보내 주세요.’ “그 문구는 좋네요.” 재하가 말했다. “드디어 내 재능을 인정하는구나.” “다만 신전 로고는 빼 주세요.” 에반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너는 내 광고인의 영혼을 열 번쯤 죽였어.” “악마인데 영혼이 몇 개입니까?” “영업용 하나, 개인용 하나.” 지방의 식수 지원 요청을 받은 카르도는 군 보급관 라그온에게 창고 목록을 가져오라 했다. 군용 물통 사백 개와 손수레 여섯 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모든 물자가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겨울 초소에 배정된 물통을 옮기면 병사들이 곤란해진다. 카르도는 민간용으로 비축한 물품의 범위만 공개했다. “재하가 신이라서 보내는 게 아니다.” 카르도가 통신문에 적었다. “응급 재난 구호 협약에 따라 출고한다. 요청 기관은 무진 분지 운영위원회. 반환 조건은 물품별로 다르게 한다.” 라그온이 물었다. “전쟁신의 이름을 물통에 적지 않으셔도 됩니까?” “적어서 무엇 하겠느냐.” “군의 공을 인정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카르도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러면 누구의 돈과 손으로 운반했는지 장부에 적어라. 내 이름은 필요한 만큼만 적고.” 정오 전까지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운반 도르래에 적합한 물통을 고르는 것이었다. 군용 물통은 튼튼했지만 도르래 고리에 걸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미라는 철제 고리의 강도를 시험했고, 병사 토마스는 상자마다 기록된 최대 하중을 읽어 줬다. “물이 급하니까 그냥 싣죠.” 재하가 말했다가 미라의 눈길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물통이 떨어지면 아래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다칩니다.” “죄송합니다. 하중부터 확인하죠.” 라그온은 임시 운반대를 설치할 때 산길의 낙석 위험이 있는지 보고했다. 위험 구역을 피해 돌아가는 데 시간이 더 걸리지만, 그 길은 작은 아이도 안전하게 걸을 수 있었다. 아라는 두 길 중 어느 쪽을 쓸지 주민들에게 설명하고, 당분간 길목을 지나는 장터 수레의 운행 시간을 바꿨다. 분지 북쪽에서 농사를 짓는 이가 물통을 무상으로 보내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장터 사람들은 그 농부가 이미 다음 주 관개에 쓸 물을 조금씩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라는 무작정 선의를 칭찬하지 않고 그의 우물 잔량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좋은 마음 때문에 당신 밭을 말릴 순 없습니다.” “그럼 어떤 도움을 주란 말이오?” “우물 대신 빈 물통과 수레를 빌려 주세요. 그건 돌려드리겠습니다.” 농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두 시간 뒤 본인 집 창고에서 가장 좋은 손수레를 끌고 왔다. 거기에는 집에서 먹을 삶은 감자도 함께 실려 있었다. 재하는 감자 한 알을 받아 들고 물었다. “이건 누구에게 갚아야 합니까?” “남으면 먹고, 안 남으면 배고픈 사람에게 주시오.” 농부가 웃었다. 에반은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그는 드디어 ‘무료’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지 않게 됐다. 누가 무엇을 내놓았고 무엇을 기대하는지부터 물어야 실제 비용이 보였다. 한편 임시 신전 설치 제안서를 보낸 천계 공급기관은 답변을 계속 재촉했다. 재하는 협상 창구에 짧게 회신했다. ‘계약 당사자는 무진 분지 주민회입니다. 신격 윤재하는 수락 권한이 없습니다.’ 곧장 비웃는 답장이 왔다. [신격께서 권한이 없다면 협상에 참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술 지원도 협상에서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하는 답했다. “하지만 제 이름이 들어가면 마을 계약이 자동으로 유효해진다는 근거는 없죠.” 상대방은 더 답하지 않았다. 재하는 그것이 거절인지 내부 검토인지 알 수 없어서 ‘미응답’이라고 기록했다. 에반이 수첩을 보고 말했다. “이번엔 저쪽 미응답도 기도라고 잡히려나?” 재하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주 긴 보고서를 쓸 겁니다.”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 위쪽 우물에서 물통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구름을 가르며 내려오는 신성 운반대는 없었다. 대신 삐걱거리는 쇠줄과 도르래, 땀 흘리는 주민들이 있었다. 재하는 밧줄을 당기는 대열 끝에 섰다. 처음엔 적당히 당기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물통이 바위턱에 부딪히려 하자 미라가 소리쳤다. “멈춰요! 신님, 거기서 한 번 더 당기면 다 터져요!” 재하는 손을 놓았다. 그 순간 무게가 반대편으로 쏠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바니가 손뼉을 쳤다. “신님도 엉덩이가 아파요?” “아주 신성하게 아프다.” 주민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여유가 없던 오전과 달리, 이 순간만큼은 서로를 신이나 신도가 아니라 똑같이 밧줄을 잡는 사람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물을 운반해도 오염된 식수통을 안전하게 고치지 않으면 상황이 되풀이된다. 미라는 물길 끝에 임시 여과 장치를 설치하자고 했다. 릴리는 의무실에 연락해 끓인 물을 우선 공급받아야 하는 환자 명단을 확인했다. 명단은 외부인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환자의 사생활은 위기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저녁 회의에서 아라는 임시 신전 설치 제안을 안건으로 올렸다. 주민들이 하나둘 손을 들었다.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에게 물을 먹이는 일이 오늘의 가장 큰 문제인 사람에게 신앙 계약의 위험을 백 년 전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었다. “당신들은 물통 몇 개 가져다 놓고 돌아가면 그만이잖아.” 한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는 내일도 살아야 해.” 재하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 어머니에게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마을회의에 식수 운반과 수문 복구의 현재 계획을 보고했다. 무엇을 구할 수 있고, 무엇은 아직 없으며, 언제 위험해지는지. 신전 설치를 반대해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았다. “신격님 의견은요?” 아라가 물었다. “제가 표를 던질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계약이 정말 급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급할 때라도 자동 연장 조항은 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료 물을 받는다고 신앙이 생긴다고 기록되면 안 됩니다. 그런 조건을 수정하는 협상을 돕는 건 할 수 있어요.” 회의 끝에 주민들은 신전 설립 여부를 당장 결정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긴급 정화수만 제공할 수 있는지 공급기관에 역제안서를 보내기로 했다. 이틀 후까지 답이 없으면 다른 대안을 계속 찾는다는 조건도 적었다. 재하는 그 결정을 존중했다. 회의가 끝난 뒤 재하는 임시 급수대에 남아 물통의 개수를 확인했다. 적게 가져가야 할 사람이 많이 가져간 것은 아닌지 따지기보다, 정작 필요한 집에 물이 빠진 곳은 없는지 살폈다. 릴리는 의무실에서 돌아와 다섯 가구에 추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른 가구의 눈치를 보지 않도록 그 집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나눠 주면 공평한 줄 알았어요.” 재하가 말했다. “아픈 사람이 있는 집은 끓이는 물까지 더 필요해요.” 릴리가 설명했다. “일부러 더 받는 게 아니라 사정이 다른 거죠.” 재하는 수급표를 다시 봤다. 필요량을 어떻게 계산했는지, 실제로 물을 받았는지, 부족하면 어디에 연락할 수 있는지가 한 줄씩 적혀 있었다. 작은 글씨 사이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권능을 쓰는 게 아니라 빈칸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때 아까 회의에서 화를 냈던 어머니가 급수대에 나타났다. 그녀는 물통 하나를 받아 든 채 재하를 노려봤다. “나는 아직도 신전이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왜 나를 설득하지 않아요? 신인데.” “제가 원하지 않는 계약을 누군가에게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계약의 조건은 보여 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물통을 내려놓고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신성 정화수 공급기관의 계약서였다. 자동 연장 조항에 줄을 그어 놓았다. “이 부분이 없으면 신청해도 괜찮을까요?” “그것만으로 충분한지 다른 조항도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상담 창구를 열어 드릴까요?” “당신이 직접 결정해 주는 건 아니죠?” “그럴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조금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처음으로 재하는 도움을 바라는 사람이 단순히 어리석어서 위험한 계약에 손을 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더 깊이 이해했다. 삶이 급박하면 가장 나쁜 선택지조차 유일한 선택처럼 보인다. 그래서 필요한 건 그 선택을 비웃는 일이 아니라, 다른 길을 실제로 만드는 것이었다. 밤 늦게 카르도의 군용 수레가 한 대 더 도착했다. 비상 담요와 빈 항아리를 실은 수레였다. 재하는 수령서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없었다. 물품의 수령인 자리는 무진 분지 운영위원회 이름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안심하고 수레 바퀴를 받쳐 줄 돌을 가져왔다. 그런데 새벽에 아라가 재하를 깨웠다. 그녀가 들고 온 것은 정화수 공급기관의 수정 계약서가 아니었다. 회관 앞에 세워 둔 검은 돌기둥에 새겨진 안내문이었다. [외부 공급 대안 확인] [무진 분지 비보호 신앙 계약 체결률: 0] [기도 수요 유발 목표: 미달] [추가 압력 단계로 전환] “추가 압력이라니.” 릴리가 창백해졌다. 바깥에서 바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물 물이 이상해요!” 돌문 마을의 안전하다고 확인한 북쪽 우물까지, 어둡고 묽은 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우물가에 남은 한 사람은 낡은 두레박을 들어 올리지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주민들은 물이 얼마나 필요한지 말로 설명할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재하는 어제 임시로 옮긴 물통이 몇 개 남았는지부터 생각했다. 하늘이 무서웠지만 눈앞에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땅 위에 있었다. 재하는 화면을 바라봤다. 누군가 이 마을이 기적에 매달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끝내기 위해 직접 손을 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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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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