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수요 감응 실험 설비.’
윤재하는 물에 젖은 금속판을 들어 올린 채 그 문장을 읽었다. 세 번 읽어도 뜻이 좋아지지 않았다.
“기도에도 수요 예측이 필요합니까?”
에반이 입술을 깨물었다. “장사가 되는 분야에서는 모든 걸 예측하지. 문제는 예측을 틀리게 하고 싶을 때도 있다는 거야.”
“그건 예측이 아니라 조작이죠.”
“나는 옛날에 그 둘을 자주 혼동했어.”
아라가 금속판을 가져가려 하자 미라가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여기 긁힌 자국이 있어요. 만지면 원래 있었는지 방금 생겼는지 구별하기 어려워져요.”
아라는 멈췄다. 주민회의가 벌써 바깥에 모여 있었다. 몇몇은 판에 새겨진 낯선 문장을 보고 수문을 아예 부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철판을 들고 온 외부인부터 내보내자고 했다. 어느 쪽의 불안도 이해할 만했다. 무진 분지는 한 세기 넘게 신앙 담보와 거리를 두려고 애써 왔다.
“오늘은 증거를 먼저 말리죠.” 세리아가 제안했다. “소유권은 마을에 있고, 외부 조사팀은 촬영과 판독만 신청하는 겁니다.”
“왜 외부인이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확신하죠?” 한 노인이 물었다.
재하는 바로 대답했다. “확신하실 필요 없습니다. 소유권을 마을에 두고, 저희가 가져갈 사본에 기간을 적겠습니다. 나중에 폐기하라고 하시면, 법적으로 보존해야 하는 최소 증거를 제외하고 처리할 방법도 함께 써 두죠.”
노인은 그 말을 듣고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기록을 맡길 주민 세 명을 추첨으로 뽑았다. 재하에겐 그 편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보다 자신을 감시할 사람을 정하는 일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미라는 철판 가장자리를 살폈다. 오래된 구리관이 새로 용접된 흔적이 있었다. 아라가 보관해 온 수로 도면과 비교하자 두께가 달랐다. 누군가 폐기된 시험 장치의 부품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치가 실제로 기도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니겠죠?” 릴리가 물었다.
“감정을 기계로 생산할 수는 없어.” 에반이 대답했다. “하지만 위험을 발생시키고, 위험한 순간에 특정 신을 떠올리게 하는 건 가능해. 옛 광고 회사들이 하던 방식이지. 불안을 팔고 해결책을 독점하는 거야.”
“해결책은 있었습니까?” 재하가 물었다.
“그건 회계 장부를 봐야 알아.”
결국 주민회의는 수문 전체를 폐쇄하지 않고 손상된 감응판만 분리하기로 했다. 수로를 완전히 닫으면 위쪽 마을 세 곳에 식수가 끊긴다. 기술자들이 장치를 확인하는 동안 주민들은 임시 물길을 열었다. 힘든 일이었지만 피해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날 오후 재하 일행이 맡은 두 번째 일은 훨씬 고약했다. 미등록 발화 12,408건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 회의하는 일이었다.
“전부 들으면 안 됩니다.” 아라가 시작부터 말했다. “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말도 있을 수 있어요. 타인의 슬픔을 외부인에게 들려주기 위해 남긴 게 아닙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릴리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긴급 구조 요청을 찾죠?” 미라가 물었다. “저장고 사건처럼 바로 확인해야 하는 메시지는 묻혀 버리면 안 되잖아요.”
재하는 칠판에 큰 글씨로 두 개의 제목을 적었다.
‘사람에게 연락해야 하는 문제.’
‘당사자가 허락해야 열 수 있는 기록.’
“둘 다 해당하는 경우도 있겠죠.”
아라가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그때는 최소 정보만 꺼냅시다. 위치와 지금 위험한지 여부. 사연까지 공개하지 말고요.”
누리는 이를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지 검토했다. 원계약의 비서명자 통로가 복원된 뒤 처음 허용된 것은 ‘청취’였다. 전체 내용 복사가 아니라 긴급성과 연락 경로를 검증하는 최소한의 신호만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격인 재하의 권한으로 요청하면 언제든 신앙 귀속 조항이 뒤따를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제가 직접 버튼을 누르면 안 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누리가 대답했다. “지역 대표가 조사 범위를 승인하고, 기록 원본을 보관소 밖으로 옮기지 않는 설계가 가능합니다.”
“좋아요. 제 이름은 권한 목록에서 빼 주세요.”
에반이 낙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명함에 신이라고 써 놓고 고객 정보 접근 권한은 없는 영업 사원이라니.”
아라가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여기서는 그런 사원이 오래 버티는 편입니다.”
낡은 공동 서고에 임시 분류실이 생겼다. 검은 돌기둥에서 가져온 보존 회선이 서고 벽에 연결됐다. 담당자는 마을의 우편 담당 두 명, 의무실 간호사 한 명, 주민회의가 정한 감사자 한 명이었다. 재하 일행은 회선이 멈추면 수리만 도왔다. 에반도 규정에 서명한 뒤 외부 장부 판독을 맡았다.
첫날 확인된 기초 정보에는 이상한 숫자가 있었다.
[총 미응답 발화: 12,408]
[최근 30일 생성: 73]
[접수자에게 실제 도달: 미확인]
[복수 보관 흔적: 1,982]
[강제 귀속 의심: 607]
“1,982건이 중복이라고요?” 재하가 물었다.
“같은 내용을 여러 사람이 보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라가 말했다. “하나의 말이 여러 장부에 복사됐다는 뜻이에요.”
우편 담당자가 복사된 사례 하나를 열었다. 발신자 이름은 검게 가려져 있었고, 문장 중간도 봉인돼 있었다. 볼 수 있는 건 전송 경로뿐이었다. 말 한마디가 공동 서고에서 천계 전신망으로 옮겨지고, 거기서 민간 계약 중계소를 거쳐 다시 신앙 담보청의 전신 기관으로 전달돼 있었다.
“본인이 보내지도 않은 곳에 기록이 간 겁니까?” 릴리가 물었다.
“네. 반송된 적도 없어요.”
에반의 표정이 변했다. “저 중계소 번호, 알아. 내가 일하던 회사의 전신이지.”
모두가 그를 보았다. 에반은 바로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해당 회선이 운영된 시기를 확인했다. 그의 설계 이전 시대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계통을 이어받아 개선하며 돈을 번 사실까지 지워지지는 않았다.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을 가져다 담보로 만들었군.” 에반이 중얼거렸다. “미응답은 채무처럼 보이기 쉬워. 누구에게 갚아야 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게 어려운 말로 하면 사람들이 못 알아듣습니다.” 재하가 말했다.
에반은 한참 고민하다 칠판에 문장을 새로 썼다.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은 편지를 남이 가져가 값표를 붙였다.’
이번에는 모두가 알아들었다.
분류 기준을 적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했다. 첫 번째 사례는 산길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남긴 짧은 문장이었다. ‘내가 다시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얼핏 구조 요청처럼 보였지만 기록은 스무 해 전 것이었다. 두 번째는 장례를 치른 아이가 쓴 말이었다. ‘엄마가 듣고 있으면 좋겠다.’ 그 문장은 지금 어디에도 보내지면 안 될지도 몰랐다.
세 번째는 훨씬 현실적이었다. 수차가 고장 난 날 농부가 투덜거리며 남긴 음성. ‘누가 좀 대신 돌려 줬으면.’ 당시에는 주변 사람이 듣고 웃었던 말인데, 기도 장부에는 ‘노동 대체 신성 요청’으로 기록돼 있었다.
“이쯤 되면 제가 ‘퇴근하고 싶다’고 한 것도 기도로 잡히겠네요.” 재하가 말했다.
누리가 잠시 계산했다. “발화 기록을 수집하는 기관에 따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말은 하루에 열 번도 했는데!”
에반이 웃다가 멈췄다. “생각해 보니 농담할 일이 아니네. 인간의 일상적인 소망을 전부 장부로 만들면, 누군가는 그 모든 순간을 신앙 자산으로 팔 수 있다는 뜻이잖아.”
아라는 사례 세 가지를 칠판에 붙이되 실명과 개인 내용을 가렸다. 첫 번째는 긴급 연락 가능성이 있었던 기록, 두 번째는 유족이나 당사자의 선택이 필요한 기록, 세 번째는 원래 기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큰 기록으로 분류했다. 어느 것도 쉽게 삭제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의 조사 결과가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도 있겠네요.” 릴리가 말했다.
“그럴 거예요.” 아라가 답했다. “누군가는 자기 말이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는 걸 처음 알게 될 테니까요. 그러니 기록을 읽을 권리뿐 아니라 읽지 않을 권리도 있어야 해요.”
세리아는 보존 기간에 관한 조항을 찾아냈다. 원계약에서는 본인에게 돌려주지 못한 말을 보관하되, 보관 사실을 사유로 새로운 신앙 의무를 만들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은 침묵항에서 발견한 금빛 병의 조건과도 일치했다.
“우리가 찾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아니군요.” 재하가 말했다. “옛날에 이미 누군가 생각해 놨는데 중간에서 없애 버린 거네요.”
“그렇다고 옛 제도가 처음부터 완전했던 것도 아닙니다.” 세리아가 대답했다. “이름을 지우는 권리와 기록을 남겨야 하는 책임이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할지, 지금도 함께 결정해야 합니다.”
재하는 칠판 한쪽에 ‘결론 유보’라는 칸을 만들었다. 해결을 미룬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모르는 일을 안다고 적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저녁 무렵, 서고 앞에는 주민들이 길게 줄을 섰다. 누군가 자기 이름이 기록돼 있는지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라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본인 확인 방법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름 검색을 허용하면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들춰 볼 수 있었다. 회의장 밖에선 항의가 일어났다.
“우릴 또 기다리게 하겠다는 거냐!”
“신전 없애면 자유로울 줄 알았더니 너희도 똑같아!”
재하는 나가서 설명하고 싶었지만 아라가 먼저 문을 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밤은 이름을 열지 않겠습니다. 잘못된 사람에게 보여 주면 다시 지울 수도 없습니다. 내일 오전까지 신원 확인과 열람 거부 절차를 적어 붙이겠습니다.”
누군가 물었다. “우리가 싫다고 해도 기록이 남아 있으면 어떡해?”
아라는 잠시 멈췄다. “그래서 누가 복사했는지 찾고 있는 거예요. 지우는 것과 누가 가져갔는지 확인하는 건 둘 다 필요합니다.”
재하는 뒤에서 조용히 손을 모았다. 신이라면 여기서 모두에게 빛을 뿌려 불안을 가라앉힐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빛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 문제는 똑같았다. 이들의 기록이 어디로 갔는지, 누가 그걸 소유한다고 주장하는지.
분류실 문을 닫을 시각이 되자 아라는 오늘 확인한 자료의 반출 여부를 점검했다. 처음에는 기록을 공동 우편망에 올려 두면 누구나 검사할 수 있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주민의 이름처럼 한 번 공개되면 되돌리기 어려운 정보는 다른 규칙이 필요했다.
주민감사자 한 명이 질문했다. “그렇다면 기록을 전혀 공개하지 않고 운영자가 거짓말해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어떤 기록을 누가 열어 봤는지는 남겨야 합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내용을 다 보여 줄 필요는 없고요.”
재하는 그 차이를 종이에 그렸다. 편지 내용은 봉인된 상자에 넣고, 상자를 연 사람의 이름과 시각만 벽에 공개하는 그림이었다. 에반이 그림을 보다가 말했다. “업무 자동화 시스템을 만들 때 쓰던 생각이군. 접속 로그와 원문을 분리하는 거지.”
“당신도 이런 걸 잘 알고 있었으면서 옛날에는 왜 안 했어요?” 릴리가 물었다.
에반은 잠깐 침묵했다. “이용자가 쉽게 떠나면 매출이 줄어들었거든. 회사가 원한 건 안전이 아니라 계약을 오래 유지하는 기능이었어.”
“그걸 따라갔고요?”
“그랬지.”
릴리는 더 추궁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잘못이 새로 사라질 리 없었다. 대신 오늘 일을 마치기 전에 보관소 반환 접수 창구에 손으로 쓴 안내를 붙였다. ‘읽고 싶지 않은 기억은 열지 않아도 됩니다.’
한 노인이 그 문장을 보고 물었다. “그럼 나 같은 사람도 이름만 확인하고 돌아갈 수 있소?”
“네.” 아라가 대답했다. “원하는 만큼만 하시면 됩니다.”
노인은 곧장 이름을 쓰지 않았다. 잠깐 벽을 바라보다 내일 오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재하는 기록을 돌려받지 않는 선택도 당사자의 것임을 다시 확인했다.
공동 서고의 등불이 하나둘 꺼졌다. 바깥에는 수로 수리 인력이 교대하고 있었고, 마을은 여전히 불안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서고 안만큼은 오늘 아무도 남의 말을 허락 없이 소유하지 않았다.
밤에 누리가 보내 온 마지막 자료에는 또 다른 접속 기록이 있었다.
[금일 18:41 외부 열람 시도]
[요청 기관: 미등록 기도 매입 조합]
[요청 범위: 최근 발화 73건 및 다음 발생 예상분]
[접근 이유: 신앙 수익 선점]
“예상분?” 재하가 되물었다. “아직 하지도 않은 말까지 사고팔겠다고요?”
에반은 종이컵을 구겨 쥐었다. “이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나쁘네. 이 사람들은 불행이 오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야.”
멀리서 남쪽 수문이 낮게 진동했다. 망가진 장치의 전원은 끊겼는데도 금속판의 잔여 회선이 붉게 깜박였다.
“불행이 필요한 겁니다.” 아라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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