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52화
PAYLUA ORIGINAL · 제52화

52화. 신전 없는 마을의 출입증

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153자

오프라인 책장
윤재하가 무진 분지로부터 받은 첫 공식 문서의 제목은 ‘감사장’이 아니었다. [외부 방문자 지침] [1. 종교 시설 건립 금지] [2. 신격의 이름으로 공공시설 명명 금지] [3. 주민의 신앙 여부 질문 금지] [4. 기술 지원 신청 시 책임과 비용 명시] “나한테만 이렇게 엄격한 겁니까?” 재하가 물었다. 에반이 종이를 쫙 펼쳤다. “제일 중요한 다섯 번째 조항을 봐.” [5. 기적 시연 및 무료 체험 행사 금지] “그건 네가 좋아할 문구라서 보여 준 것 같은데.” “무료 체험 행사라는 단어를 누가 먼저 생각했는지 궁금해서.” 세리아는 문서 하단을 확인했다. “단순한 종교 탄압 규정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지난 183년 동안 주민회의를 거쳐 유지된 지방 자치 규약입니다. 방문하려면 목적과 활동 범위를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그럼 기술자 미라를 대표로 보내죠.” 미라가 곧바로 답했다. “저는 수로를 검사하러 가는 거예요. 신을 몰래 데려가는 역할은 못 해요.” “몰래 아니고 동행 신청을 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신분부터 공개하세요.” 재하는 신고서 직업란을 보고 한참 고민했다. 신격이라는 직업은 이곳에서 건강보험 혜택도 없고, 여행 허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사실 그대로 적었다. ‘직업: 신. 주요 기술: 문서 읽기, 타인의 부탁 듣기, 지붕 수리 보조. 기적 사용은 현지 동의 없이는 하지 않음.’ 미라가 내용을 읽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붕 수리 보조요?” “진짜 해 봤습니다. 그런데 주 작업자라고 쓰면 우르센이 화낼 겁니다.” 릴리는 의료 기록과 공동 식수통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동행했다. 에반은 자원해서 홍보 담당을 맡겠다고 했지만, 신청서에 ‘기록 정리 보조, 광고물 배포 금지’라고 적히는 수모를 겪었다. 누리는 천계 통신 회선으로만 연결하기로 했다. 이곳 주민들의 동의가 없는 기록 열람은 금지한다는 조건도 붙었다. 무진 분지에 들어가는 길은 믿기 어려울 만큼 평범했다. 하늘을 나는 마차도, 신성으로 빛나는 대문도 없었다. 높은 산비탈을 따라 난 자갈길을 내려가면 돌문 마을과 낮은 집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밭에서는 사람들이 수확한 콩을 말리고 있었고, 장터에선 젖은 천막을 다시 매다는 중이었다. 그 평범한 풍경 한가운데 검은 돌기둥이 있었다. 기둥에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누가 기도해도, 누구도 그 기도를 소유할 수 없다.’ 재하는 한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러자 경비가 다가와 물었다. “방문 목적이 뭡니까?” “수로 점검 협조와 기록 분류 확인입니다.” “성함.” “윤재하.” “직업.” “신입니다.” 경비가 펜을 멈췄다. 그가 잠깐 올려다보더니 물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요?” “정확히는 전직 회사원인데 지금은 그쪽 직종입니다.” “전직 회사원은 필요 없고요.” 도장을 찍은 경비는 신분 확인표에 붉은 줄을 하나 그었다. [신격 방문자. 주민 소집 권한 없음. 사전 허가된 기술 조사만 가능.]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재하가 물었다. “저 길 끝의 회관하고 수차까지요. 집에 들어가려면 집주인에게 물으세요. 여긴 다른 마을이랑 같습니다.” 재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서 출장 갈 때도 보안 구역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신이 됐다고 모든 문이 열릴 이유는 없었다. 장터에 도착하자 어린 소녀 하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장고에서 구조됐던 아이라 했다. 이름은 바니, 열두 살. 무릎에는 멍이 남아 있었지만 눈빛은 밝았다. “혹시 그때 연락해 준 분들이에요?” “응. 하지만 직접 구해 준 건 경비 아저씨야.” 재하가 답했다. “알아요. 그래도 고마워요.” 바니는 재하의 허리춤에 달린 작은 신격 표식을 보더니 표정을 바꿨다. “신님이면 더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 이미 충분히 들었어.” “그럼 빚 안 진 거죠?” 재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감사가 빚으로 바뀌는 마을이라니. 그 질문을 누가 아이에게 가르쳤는지부터 알고 싶었다. 마을 회관에서 그들을 맞은 사람은 운영위원회 서기 아라였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에 왼손 손등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녀는 재하의 의자 앞에 신청서를 한 장 놓았다. “신격님에게는 세 가지를 묻겠습니다. 첫째, 지원 대가로 기도를 요구합니까?” “아뇨.” “둘째, 지원받은 주민의 이름을 신도 명부에 올립니까?” “절대 안 합니다.” “셋째, 이곳에서 누군가 당신을 믿고 싶다고 하면 받아들입니까?” 재하는 생각했다. “그건 그 사람에게 물을 일입니다. 다만 이 지역의 규정상 제가 포교 행사를 열 수 없다는 건 압니다.” 아라는 비로소 펜을 내려놓았다. “앞의 두 질문은 쉬웠죠. 세 번째에서 보통 문제가 생깁니다.” “왜요?” “한 번 믿기로 한 사람의 이름을 신전이 어디까지 가져가는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저희 조상들이 그걸 알게 된 뒤 신전을 닫았습니다.” 회관 벽에는 오래된 지도 여러 장이 걸려 있었다. 가장 낡은 지도에는 이곳의 옛 이름이 있었다. ‘열두 종의 평야’. 크고 작은 종탑 열두 개가 세워진 신앙의 중심지였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종탑이 있던 곳에는 공용 우물과 낡은 벽돌 창고만 남았다. “백팔십삼 년 전, 우리 지역에 열병이 돌았습니다.” 아라가 말했다. “당시 신전들은 치료를 제공했습니다. 대신 살아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신앙까지 담보로 받았죠. 사람들은 어느 순간 치료비를 다 갚았는데도 기도 장부에서 이름을 지울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다음에요?” 릴리가 물었다. “신전이 떠났습니다. 저희가 쫓아낸 것도 있고, 신성 수익이 끊겨 떠난 곳도 있어요. 하지만 기도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병이 아플 때, 아이를 잃었을 때, 높은 산길에 눈이 내릴 때 사람들이 서로에게 건네던 말이 남았으니까요.” 아라는 재하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희는 그 말을 ‘기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미응답 발화’라고 불러요. 누가 들어야 하는지 모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천계에서는 기도로 표시됐더군요.” “네. 누군가 바꿔 놓았겠죠.” 그때 회관 뒤편의 문이 열리고 흰 머리의 노인이 들어왔다. 그는 탁자에 오래된 동전 한 닢을 놓았다. 동전에는 열두 개의 종이 돌아가며 새겨져 있었다. “내 할아버지가 신전을 닫던 날 가져온 동전입니다.” 노인은 말했다. “원래는 병원에서 진료받을 때 내는 신앙 보증표였대요. 한 장을 내면 치료받을 수 있었고, 못 내면 이름을 장부에 적어야 했답니다.” 릴리는 동전의 가장자리를 만져 봐도 되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전 옆면에는 아주 작은 흠집이 있었고, 거기에 누군가 날짜를 새겨 두었다. “그런데 동전을 버리지 않으셨어요?” “버리면 있었던 일이 없어진 것 같으니까요. 우리 어른들은 신전을 없애면서 장부도 태우려고 했죠. 그때 한 서기가 말렸습니다. 어떤 기록은 누가 우리를 속였는지 증명하려면 남겨야 한다고.” “그 서기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재하가 물었다. “이름이 지워져서 모르겠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저 열두 번째 종을 지킨 사람이라고 불렀어요.” 아라는 노인이 가져온 동전을 촬영한 뒤 반환했다. 재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동전 때문에 저희에게 보여 주고 싶으셨던 게 있나요?” “신전이 없다는 말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라는 겁니다.” 노인이 대답했다. “우린 다리 만드는 사람을 믿고, 땅에 물 주는 사람을 믿고,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을 믿어요. 때로는 그 사람들에게 화도 내고, 잘못했으면 책임을 묻지요. 문제는 신전 앞에서는 책임을 묻는 말을 배신이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재하는 동전이 닳아 얇아진 모서리를 바라봤다. 믿음과 복종을 구분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신전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을이 직접 만든 교량과 수로를 보니, 떠난 뒤에 무엇을 세웠는지도 보였다. 노인이 나가고 나서 릴리는 조용히 말했다. “저도 처음에는 신님을 믿으면 늘 같은 생각을 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지금은요?” “반대표를 던져도 친구로 남을 수 있다는 건 알죠.” 재하는 피식 웃었다. “가끔은 찬성표보다 반대표가 더 도움이 되던데요.” 미라가 수로 점검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녀의 장화엔 진흙이 가득 묻어 있었다. “저수 시설 상부는 괜찮아요. 문제는 남쪽 수문입니다. 수문이 내리는 물의 양을 기록하는 눈금이 오래됐어요. 주민 기록과 다르게 조작된 흔적도 있습니다.” 아라의 얼굴이 굳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린 한 달마다 확인해요.” “한 달마다 확인한 사람들이 거짓말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미라가 말했다. “눈금 뒤의 철판을 바꾸면 기록은 맞아도 실제 수위가 달라집니다.” “누가 그런 일을 합니까?”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바깥에서 종이 울렸다. 돌문 마을에서는 하루 세 번 종을 쳤다. 점심, 야간 순찰, 장터 폐장. 신을 부르기 위한 종이 아니었다. 그날은 점심 종이 치기도 전에 네 번째 종이 울렸다. 비상 대피 신호였다. 바니가 문을 벌컥 열었다. “아라 언니! 남쪽의 물길이 거꾸로 흐르고 있어요!” 모두가 밖으로 나갔다. 분지의 남쪽 들판을 따라 거무스름한 물이 밀려오고 있었다. 강물이 홍수처럼 넘친 건 아니었다. 수문이 열려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마을 아래쪽 저류조의 물을 거꾸로 밀어내고 있었다. 미라가 장화를 고쳐 신었다. “이대로 두면 식수통이 먼저 오염됩니다.” “어떻게 막죠?” 재하가 물었다. “당장 수문을 닫아야 해요. 그런데 힘으로 잠그면 반대편 관이 터질 수도 있어요.” 아라는 회관 종을 두 번 더 울렸다. 사람들은 예비 도르래와 모래주머니를 꺼냈다. 누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미 알고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재하는 무작정 권능부터 꺼내지 않았다. 아라에게 물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을 정해 주시겠어요?” “모래주머니를 옮겨 주세요. 그리고 신성은 쓰지 마세요. 여긴 신성 수로가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재하는 무거운 자루를 어깨에 올렸다. 신이 된 몸이라고 허리가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세 번째 자루부터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에반은 웃음을 참으면서도 두 개씩 옮겼다. 릴리는 아이들과 노인을 높은 길로 안내했다. 미라는 수문 장치 안쪽으로 들어가 쇠핀을 풀었다. 아라는 거대한 수문 앞에서 손을 들었다. “하나, 둘, 셋!” 사람들의 힘이 밧줄에 모였다. 수문은 처음엔 꿈쩍하지 않았다. 재하는 무심코 ‘기적이라도’라는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가 삼켰다. 허락받은 일은 밧줄을 당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스무 명이 같은 박자로 힘을 주자 쇠문이 조금씩 움직였다. 쿵. 역류가 멎었다. 물은 낮은 저류조로 돌아갔지만 이미 일부 식수통은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주민들은 수차 옆에 ‘식수 사용 중지’라는 표지판을 세웠다. 마을은 당장 갈증을 해결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더 큰 피해는 막았다. 아라가 재하에게 물을 한 컵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재하는 컵을 받으며 웃었다. “신이 와서도 모래주머니나 옮긴 셈이네요.” “저희는 그런 손이 필요해요. 신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물을 나르던 주민 중 한 사람이 재하에게 다가왔다. 그는 무릎에 찬 진흙을 털지도 못한 채 물었다. “당신이 신이면, 지금 이 일을 한 걸 기적으로 기록할 겁니까?” 재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밧줄 잡은 스무 명의 일로 기록해야죠.” 주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자기 일로 돌아갔다. 그 짧은 질문에 담긴 불신이 오랜 세월 쌓인 것임을 재하는 알았다. 그때 누리가 재하의 시야에 떠올랐다. 수차의 고장 기록과 미등록 발화 목록 사이에서 동일한 시각이 검출됐다는 알림이었다. [미응답 발화 발생 급증] [발생 구역: 남쪽 수문] [원인 기록: 수문 자동 오작동 직전] [분류 서버 최근 접근: 천계 외부 중계소] 재하는 아라에게 기록을 보여 줄지 물었다. 허락을 받은 뒤, 화면을 가리켰다. “아라 씨. 이건 우연이 아닐 수도 있어요.” 아라는 수문 아래에 고인 탁한 물을 바라보았다. “저희가 신전을 없앤 이유는 이런 짓을 막으려던 거였어요.” “어떤 짓이요?” “위험을 만들고, 구조해 준 대가로 이름을 가져가는 것.” 멀리 수문 안쪽에서 낡은 금속판 하나가 떠올랐다. 미라가 그것을 주워 씻어 내자 희미한 문구가 드러났다. [기도 수요 감응 실험 설비] 재하의 웃음이 사라졌다. 신 없는 땅에 신전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곳의 사람들에게 기도할 이유를 계속 만들고 있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52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5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