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단 아래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온 뒤, 윤재하는 세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의 이유는 경건함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부탁을 듣기 전에 그 부탁을 받아도 되는지 확인할 방법부터 찾느라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미등록 기도: 12,408건]
[수신 신격: 없음]
[첫 번째 요청 권한: 청취]
“이러면 제가 전부 들어야 하는 겁니까?”
“신격에게 자동 배정된 청취 의무는 없습니다.” 누리가 대답했다.
“그런데 왜 저한테 왔죠?”
“당신이 복원한 비서명자 통로와 접속됐기 때문입니다.”
재하는 안내창을 손가락으로 밀어 보았다. 숫자 아래에는 작은 단추가 세 개 있었다. ‘일괄 수락’, ‘일괄 거절’, ‘보류’. 일괄 수락에 커서를 올리자 하얀 글씨가 덧붙었다.
[수락 시 신격 관리자 등록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아뇨. 이거 누르면 제가 저분들 담당 신이 된다는 거잖아요.”
에반이 손뼉을 쳤다. “열두 명도 아니고 만 이천 명이야. 창업 초기 신격으로선 꿈도 못 꾸는 실적이지.”
“사람들 허락을 받았습니까?”
“아니.”
“그럼 꿈만 꾸세요.”
에반은 아쉬운 얼굴로 접힌 전단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재하는 그 전단지의 제목이 ‘당신의 기도를 신속하게 인수합니다’라는 것까지 봤지만 모른 척했다. 말리기 시작하면 밤이 새도록 마케팅 회의가 열릴 게 뻔했다.
릴리는 침대 옆에 앉아 종이를 펼쳤다. “기도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뭘 부탁했는지부터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는 병을 고쳐 달랬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겼을 수도 있잖아요.”
“동의합니다.” 세리아가 기록판을 열었다. “원계약에서는 기도 기록을 신격 귀속 재산으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수신인이 지정되지 않은 편지와 비슷합니다. 원문을 타인에게 공개하려면 별도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럼 우리도 함부로 읽으면 안 되죠.”
“공개된 건 한 문장뿐입니다. 긴급 구호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최소한의 청취 범위로 볼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봉인한 채 발신지에 확인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윤재하는 손가락을 거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기도 하나를 받기 위해 낡은 신전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 그때의 자신이 지금 화면을 봤다면 아마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12,408이라는 숫자는 신도가 아니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사람의 숫자조차 아닐지 몰랐다. 기도는 한 사람이 열 번 남길 수도 있고, 돌아가신 이가 남긴 오래된 흔적일 수도 있었다.
“지역을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지리 명칭: 무진 분지]
[천계 관할 등급: 무신 지역]
[최근 등록 신전: 없음]
[마지막 신격 방문 기록: 183년 전]
[외부 수신 허용: 확인 필요]
“백팔십삼 년?” 에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람들이 저렇게 오래 기다렸단 말이야?”
“전부 그때부터 쌓였다는 증거는 없죠.” 세리아가 바로잡았다. “접수 시각을 확인하기 전에는 추정으로 기록해야 합니다.”
그녀가 도장을 찍자 에반이 한숨을 쉬었다. “세리아가 합류한 뒤로 나는 형용사를 마음대로 못 써.”
“그건 매우 바람직한 변화입니다.”
대답을 마친 세리아는 지도를 확대했다. 무진 분지는 높은 산들 사이에 그릇처럼 놓인 평야였다. 유일한 강은 북쪽 절벽을 따라 흐르다가 분지 중앙의 검은 수차로 이어졌다. 마을은 다섯 곳, 중심지는 작은 장터가 있는 돌문 마을. 지도에는 붉은 십자가도 금빛 신전 표시도 없었다. 대신 공동 우물, 피난소, 교량, 방앗간 같은 시설이 촘촘하게 표시돼 있었다.
“신전이 없는데 기반 시설은 꽤 잘 갖춰져 있네요.” 릴리가 말했다.
미라는 지도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사람들이 직접 고쳐 왔다는 뜻이에요. 다만 남쪽 둑의 높이가 이상하네요. 저렇게 낮으면 비가 쏟아질 때 장터까지 물이 차겠어요.”
“수차도 역회전 흔적이 있어요.” 노아가 옆에서 말했다.
모두가 노아를 바라봤다. 소년은 재하가 제단에 놓아둔 수차 모형을 들고 있었다. 릴리의 동생인 노아는 최근 장난감을 만드는 대장장이 우르센에게 톱질을 배우고 있었다. 수차의 회전 방향이 왜 중요한지 배운 참이었다.
“물을 퍼 올리는 방향이 반대로 되면, 우물 쪽에 물이 안 올라간대요.”
“너 오늘 숙제 잘했구나.” 재하가 칭찬하자 노아가 뿌듯해했다.
그때 지도의 남쪽에 하얀 점 하나가 깜박였다.
[긴급 응답 후보: 17번]
[최근 발신 시각: 2시간 전]
[공개 허용 범위: 위치 및 구조 요청]
‘아래 저장고에 물이 찼어요. 여기 열쇠는 집에 두고 왔어요. 문이 안 열려요.’
재하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지금 사람 갇힌 거 아닙니까?”
미라가 고개를 저었다. “먼저 시각을 봐야죠. 두 시간 전이면 현재 상태를 모르니까요.”
“확인해 봅시다.”
무진 분지로 직접 보낼 천계 회신은 수신인을 지정할 수 없었다. 누리가 옛 우편로를 열어 보았으나 회선 끝에서 ‘신격 수신 금지’라는 안내가 튀어나왔다. 개인에게 보내는 구조 신호와 신의 응답은 다른 취급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럼 신의 이름을 빼죠.” 재하가 말했다.
세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하면 신분을 숨기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요. 제 명의로 기적을 준다는 게 아니라, 구호 요청을 지역 우편망에 전달하자는 뜻입니다. 발신인이 누군지 모른다고 서류에 적으면 되잖아요.”
릴리가 작은 종이를 꺼냈다. ‘17번 구조 요청의 현재 상황을 확인해 주세요. 외부에서 위치 정보가 전달됐습니다. 수신자는 무진 분지 지역 운영위원회.’ 문장 아래에는 신격 재하라는 이름도, 신전 이름도 쓰지 않았다. 자료를 전달하는 공동조사팀의 연락처만 적었다.
미라가 교량 관리망에 연결했다. 기다림은 십오 분쯤 이어졌다. 그러다 끊겼던 연결선에서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문 마을 경비소입니다. 누가 보냈습니까?”
“무진 분지의 구조 신호를 확인한 외부 협력팀입니다.” 릴리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17번 저장고에 사람이 갇혔다는 요청이 있습니다.”
“그 저장고?”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한동안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거긴 어제부터 잠가 뒀는데. 주민이 들어갈 이유가 없어요. 누구의 장난이지?”
재하가 대답하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릴리가 먼저 물었다. “직접 확인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잘못된 신고라면 그렇게 기록하겠습니다.”
“사람도 부족합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확인 가능한 다음 순찰 시각을 알려 주세요.”
경비는 생각하다가 한 시간을 제시했다. 임의로 구조 인력을 보내라고 지시할 수는 없었다. 릴리는 그 시각을 적었다. 대화가 끝난 뒤 재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당장 뛰어가면 안 됩니까?”
“갈 수 있어도 무진 분지는 남의 집이에요.” 릴리가 말했다. “들어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는 물어야죠.”
재하는 미라의 지도를 다시 보았다. 신이 된 뒤 그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당신은 신입니다’가 아니었다. ‘여기서 멈추세요’였다. 이상하게도 그 말 덕분에 사고를 덜 치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재하는 오래된 신전에서 처음 신도를 얻던 날을 떠올렸다. 릴리는 자신에게 기적을 요구하기 전에 아픈 동생 곁을 지켜 달라고 했었다. 그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묻지 않았다면, 릴리는 다른 신전에서처럼 헌납할 돈부터 꺼냈을지도 모른다.
“저 아이가 안에 있다면 우리가 가는 동안 시간이 너무 늦을 수도 있어요.” 그가 말했다.
미라는 이동 경로를 계산했다. 산길을 넘어 무진 분지에 도착하는 데 아무리 서둘러도 반나절이었다. 순간 이동 기적은 목적지에 수신자가 있을 때만 사용할 수 있고, 지금은 수신인 자체가 등록되지 않았다.
“강제로 연결을 뚫으면요?” 재하가 물었다.
“목적지에 어떤 장치가 작동하는지 모르니 위험합니다.” 누리가 답했다. “특히 이 지역의 원격 호출망은 신성 회선을 거부하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긴급 호출과 신격 강림을 혼동하면 주민의 피난 신호까지 막을 수 있습니다.”
세리아는 재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확인된 사실’, ‘추정’, ‘아직 모르는 것’ 세 칸으로 나뉜 표였다. 확인된 사실에는 저장고 구조 요청이 있었고 우편망에 전달됐다는 점을 적었다. 추정에는 문이 잠겨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모르는 것에는 사람의 수와 현재 수위, 구조에 필요한 장비가 들어갔다.
“이렇게 적어 놓으면 제가 당장 뭘 못 하는지만 보이네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부탁해야 할지도 보입니다.”
릴리는 경비소와 연결되는 비상 채널에 ‘현재 위험하면 즉시 알려 달라’는 요청을 추가했다. 거기에는 신의 이름도, 기도하라는 조건도 없었다. 다만 답신이 안 온다는 이유로 여러 번 재촉하지 않았다. 구조 현장의 사람이 답장을 쓰느라 손을 놓게 해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기다림을 참기 어려운 건 재하만이 아니었다. 노아도 말없이 모형 수차를 돌리다가 작게 물었다.
“신님, 그 여자아이가 괜찮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건 기도예요?”
재하는 소년을 보았다. “글쎄. 누가 그 말의 주인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노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제 거죠. 제가 걱정하는 거니까.”
“맞아.”
그 대답이야말로 숫자 12,408을 이해하는 출발점일지 몰랐다.
한 시간이 지나기 전 연락이 왔다. 저장고 문 앞에서 열두 살 여자아이 하나가 발견됐다. 물은 무릎까지 차 있었지만 아이는 무사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저장고에 갇힌 사람은 아이 한 명이 아니었다. 물길이 꺾이면서 장터의 공동 식수통도 오염될 위험이 생겼다는 것이다.
“보낸 쪽에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경비가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묻고 싶습니다. 그 신호, 신이 보낸 겁니까?”
재하는 릴리를 보았다. 릴리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외부에서 받은 기도 기록을 통해 알았습니다. 신격이 열람 가능한 통로에 있었던 것은 맞아요. 다만 저희는 당사자의 요청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통신이 끊어졌다.
잠시 뒤 답신이 도착했다.
[무진 분지 운영위원회 통보]
[구조 협조: 감사]
[신격 개입 및 포교: 불허]
[민간 기술자 현장 점검: 별도 신청 가능]
에반은 고개를 갸웃했다. “생명을 구해 줬는데 출입 금지라니. 제법 어려운 고객이야.”
“고객이 아닙니다.” 재하가 대답했다. “그리고 저쪽에서 고맙다고 했잖아요. 도와준 일에 감사하는 것과 우리를 믿는 건 다른 거죠.”
누리가 기록을 닫았다. 신고 17번의 상태가 ‘구조 확인’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기도 숫자가 줄지는 않았다. 다른 기도들의 응답 여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재하는 지도 위에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털었다. 12,408건의 기도 가운데 하나에만 답이 닿았다. 그러나 그 답조차 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경비가 문을 열었고, 주민들이 아이를 끌어냈다. 신이 한 일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구조 요청을 발견한 것뿐이었다.
“누군가 그 동네에서 또 도움을 청하면요?” 노아가 물었다.
재하는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우선 그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알아보자.”
“신님은 안 가요?”
“초대받으면 가야지. 안 그러면 손님이 아니라 침입자니까.”
그때 누리의 안내창이 새로 떴다.
[무진 분지 긴급 구조 기록 처리]
[실제 구조 완료: 1건]
[신앙 포인트 증가: 0]
[관리신 신규 지정: 0]
“완벽하네요.” 재하가 웃었다.
에반은 턱을 괴었다. “매출이 제로인데 완벽하다니. 내 직업적 신념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 직업 바꿀 때가 됐나 보죠.”
새벽녘, 돌문 마을의 경비소에서 다시 편지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저장고에서 구조된 아이였다. 어린 글씨는 몇 군데 번져 있었다.
‘도와준 분이 신이든 아니든,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 부탁을 왜 기도라고 부르나요? 저는 그냥 누군가 들었으면 했어요.’
재하는 마지막 문장을 두 번 읽었다. ‘기도’라는 분류부터 누군가가 정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그 목소리의 주인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지도의 숫자가 다시 빛났다. 처음과 똑같은 12,408. 하지만 재하의 눈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보였다.
“누리.”
“말씀하십시오.”
“이분들 목소리를 왜 기도라고 묶었는지부터 조사합시다.”
[분류 기준 열람 요청]
[관리 기관: 미상]
[최초 등록 명칭: 미응답 발화]
[현행 표시 명칭: 기도]
그 아래, 오래전에 바뀐 단어 하나의 수정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일괄 명칭 변경 승인자: 신앙 담보청 전신 기관]
윤재하는 천천히 눈썹을 올렸다.
“설마.”
에반이 먼저 한숨을 쉬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잖아. 우리 쪽에서는 설마가 계약서를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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