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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48화
PAYLUA ORIGINAL · 제48화

48화. 최초 서명권자는 신이 아니었다

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140자

오프라인 책장
최초 서명권자의 정체를 확인하는 방법은 뜻밖에도 출장이 아니었다. 마을의 공용 우편함에 엽서 한 장이 도착했다. ‘해당 열람은 대면이 아닌 공개 증언으로도 가능합니다.’ 윤재하는 엽서를 뒤집어 봤다. 천계 외부에서 왔다고 적힌 우편이었지만 우표도 없었다. 누리는 발신 경로를 점검한 뒤 정식으로 보관했다. 서명이 없는 편지라도, 내용을 읽는 것과 무조건 믿는 것은 다르다. “그러니까 저분이 우리 동네까지 오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릴리가 물었다. “발신자가 살아 있는 사람인지도 몰랐잖아요.” 재하가 답했다. “우선 기록을 열 수 있다는 뜻일 겁니다.” 에반은 항구에서 확보한 설계 도면을 펼쳤다. 도면의 가장 오래된 층은 기계 부품이 아니라 종의 울림을 연결하는 회선이었다. 신들의 탑, 사람들의 탑, 이름 없는 탑. 세 탑이 서로 다른 기록을 보관해 일방적인 변경을 막도록 설계됐다고 했다. 그런데 세 번째 탑을 담당하던 기록 관리자가 오래전에 삭제되면서 지도도 없어졌다. “세 번째 탑은 어디에 있습니까?” 미라가 물었다. 에반은 고개를 저었다. “물리적으로는 이미 없어. 아예 지어진 적이 없다는 식으로 장부를 고쳤으니까.” “그런데 종소리는 남았군요.” “응. 그래서 이 길이 아직 죽지 않은 거야.” 세리아는 신전 회의장에 공개 기록 검증 자리를 마련했다. 참석자들은 신을 믿든 믿지 않든 같은 자료를 볼 수 있었다. 자료의 사본에는 출처와 검증 한계를 함께 적었다. 침묵항의 목소리 병과 설계 도면은 다른 경로에서 확보되었으므로 서로 맞는 부분을 찾아 대조할 수 있었다. 한 장의 기록에는 최초 서명권자의 이름이 있었다. [첫 공동서명 증인: 마렌] [신격: 없음] [신앙 수령 자격: 없음] [직책: 약속의 취소 의사를 확인하는 사람] 윤재하는 눈을 크게 떴다. “최초 서명권자가 신이 아니라고요?” 세리아가 답했다. “지금까지는 직책 이름만 남아 있었지만, 본래 역할은 대리 소유자가 아닌 증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분이 지금 살아 있습니까?” 누리가 기록을 확인했다. [마렌: 사망] [사망 확인 일자: 원계약 후 61년] [증언 기록: 보존] 재하는 입을 다물었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편지를 보내던 존재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증인의 기록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초대장을 보냈을까. 기록 보존 장치가 스스로 보낸 것인지,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빌렸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죽은 분의 기록이니까 함부로 마음을 읽은 척할 수는 없겠네요.” “맞습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남겨진 문장은 당시의 의사를 확인하는 근거가 될 수 있지만, 지금 일어난 모든 문제에 대한 답변은 아닙니다.” 공개 증언 전에 제6지역의 후손 누리아가 오래된 목판 하나를 내놓았다. 마렌의 이름이 새겨진 물건이었다. 그녀의 조부는 사람들이 사라진 제6지역의 회관을 정리할 때 이것을 발견해 보관해 왔다고 했다. 목판 뒷면에는 '내가 본 것만 확인한다'는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게 진짜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까?” 재하가 물었다. 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조부에게 들은 이야기만 압니다. 직접 본 것은 이 목판을 창고에서 꺼낸 일입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를 나눠서 적겠습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미라는 나무결을 살폈다. 아주 오래된 소나무였고,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었다. 누리아의 조부가 말했던 회관 화재 기록과 연도가 비슷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목판의 모든 문구가 원계약 당시 작성되었다고 증명할 수는 없었다. “정말 어려운 일이네요.” 릴리가 말했다. 재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한 번에 답을 내지 않으려고요.” 누리는 목판을 사진처럼 복제하지 않고 홈의 순서를 조심스럽게 읽었다. 기록관이 없는 지역에서 사람들은 신성 주문을 쓰지 않고도 정보를 남겼다. 태어나는 아이의 이름, 세상을 떠난 사람의 기일, 수로가 범람한 날. 목판 가장자리에 그 기록들이 잘게 이어져 있었다. 세리아는 목록 중에서 한 글자가 반복되는 것을 발견했다. '거절'.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회관의 중요한 사건을 기록할 때마다 사람들이 거절 의사를 남길 자리도 만들었다는 사실을 시사했다. 릴리는 그 글씨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제6지역 사람들이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보다 잘 알고 있었네요.” “그분들이 무조건 옳았다고 생각하진 맙시다.” 재하가 답했다. “그 사람들도 의견이 달랐을 테니까요.” 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부에게서 들은 이야기 하나를 더 말했다. 마렌이 마을의 큰 분쟁에서 누구 편도 들지 않아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던 날이 있었다고. 그날 마렌은 심판이 아니라 확인만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최초 서명권자는 명령하는 자리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럼 지금의 서명권자와 완전히 다르군요.” 재하가 말했다. “아직은 그럴 가능성을 검토하는 겁니다.” 세리아는 신중하게 답했다. 누리가 공개 기록의 위험을 알렸다. 마렌의 이름과 제6지역 후손들의 개인정보가 연결되면 누군가 이를 이용해 '진짜 후계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름 목록을 공개하지 않고, 증거로 필요한 문구와 연대만 별도로 적기로 했다. 아는 것을 보여 주는 일과 누군가의 개인정보를 갖다 바치는 일은 다르다. 그날 오후 사람들의 탑에 있던 종이 울렸다. 누리가 엽서에 적힌 절차대로 기록을 열자, 마렌의 생전 모습이 작은 빛으로 떠올랐다. 머리를 하얗게 묶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단상 위에 앉지 않고 사람들과 같은 높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기록은 최초 계약 성립 열째 해에 남긴 보존용 증언입니다.” 목소리는 분명했지만, 질문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답을 만드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몇 가지 정해진 주제에 대한 영상과 음성을 재생하는 장치였다. 마렌은 당시의 세계를 설명했다. 마을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도움을 청했고, 여러 신이 각자 원하는 대가를 약속했다고. 어떤 마을은 병자를 살렸지만 수확을 빼앗겼고, 어떤 마을은 승리를 얻었지만 다음 세대의 선택권을 잃었다고. “우리는 신을 없애려고 계약한 것이 아닙니다. 신과 사람이 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정하려 했습니다.” 재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자신이 반복해 온 질문과 닮아 있었다. “첫 계약에는 서명이 셋 있었습니다. 하나는 보호와 도움을 약속한 신의 서명, 하나는 그 약속을 직접 받아들인 사람의 서명, 마지막 하나는 비워 두었습니다.” 화면에 낡은 계약서가 나타났다. 마지막 칸에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빈칸은 서명을 기다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동의하지 않은 사람의 자리가 계약 안에도 남아 있어야 한다는 표시입니다. 그 칸을 누군가 대신 채우는 순간, 이 계약은 본래의 뜻을 잃습니다.” 회의장에 긴 침묵이 흘렀다. 재하는 이제 왜 무명의 신이 자기 이름을 버렸는지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이름을 소유권에 묶는 제도에서, 그 신은 소유자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기록을 지키려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선택이 옳았는지, 왜 소멸 처리됐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영상 속 마렌은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후대의 증인은 우리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마십시오. 우리도 틀렸을 수 있습니다. 다만 누가 자기 목소리로 말할 수 없게 되었는지 먼저 확인해 주십시오.” 기록은 거기서 끝났다. 에반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폐쇄한 반환 통로는 그 마지막 부탁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다. 그는 손바닥에 새겨진 자격 정지 인장을 바라봤다. 자기 일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보다, 다음 기록이 틀리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마렌의 기록이 끝나자 방청석의 노인이 일어섰다. 그는 지금도 오래된 신들을 믿고 있다고 말했다. 그 믿음이 자기 삶의 기둥이었고, 신앙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는 주장에는 불안함이 있다고 했다. “다들 계약을 쉽게 깨면 앞으로 누가 누구를 믿겠습니까?” 재하는 그 질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노인에게 자신이 믿어 온 신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도 존중받아야 합니다. 다만 약속을 맺지 않은 사람까지 묶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노인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빚을 갚지 않겠다는 사람도 다 풀어 줍니까?” “실제로 정당한 빚이 있는 경우와, 남의 이름으로 몰래 만든 빚은 다른 겁니다. 그런 차이를 조사하자는 거고요.” 세리아는 노인의 발언을 반대 의견으로 기록했다. 재하는 그 기록을 보고 기뻤다. 공개 증언이 진짜로 의미 있으려면 자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의 질문도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신전 마당에서 회수체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지난번부터 길을 안내하던 검은 새 한 마리가 창문에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압류 번호 대신 작은 편지를 물고 있었다. [기록 정정 요청] [대상: 최초 서명권자 정의] 편지 안에는 한 문장이 있었다. '증인이 아닌 소유자로 읽지 말 것.'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봤다. 누가 보낸 편지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재하는 내용을 그대로 기록하면서도 발신자를 단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렌의 기록을 더 확인할 때까지 추가 열람을 제한하지 않되, 일시적으로 소유권 이전 같은 결정을 하지 말자는 의견을 냈다. 참석자들은 그 결론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나의 미스터리가 풀리면 또 다른 질문이 남았다. 누가 마렌의 증언을 지금까지 보존했고, 왜 하필 임시 보전이 시작되자 편지를 보냈는가. 재하는 그 질문을 서둘러 풀기보다, 이미 확인한 사실을 사람들과 나눌 방법부터 고민했다. 그런데 원계약을 대조하던 세리아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렌의 기록에는 신의 서명과 인간의 서명이 나란히 있지만, 천계 담보청이 보관한 등록본에는 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신의 서명이 위쪽으로 올라가고 인간의 서명은 아래 작은 칸으로 이동했으며, 비어 있어야 할 세 번째 칸에는 관리기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누군가 형식을 바꿨습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합법적인 변경일 수도 있잖아요?” 카르도가 물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경에 대한 동의와 기록이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료를 대조하기 시작했다. 침묵항 설계 도면에는 최초 계약의 반환 통로가 세 개였지만, 중앙 등록본에는 두 개만 있었다. 하나는 사람의 의사를 확인하는 통로, 다른 하나는 신의 계약을 확인하는 통로. '아무 이름도 쓰지 않은 자'를 위한 통로가 사라져 있었다. “빈칸을 지웠네요.” 릴리가 말했다. “정확히는 다른 인장으로 덮었습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재하는 그 인장을 확대했다. 담보청 서명권자의 표식이었다. 현재의 검은 형상이 쓰는 것과 같았다. “그럼 저 직책은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군요.” 누리가 설명했다. “최초 서명권자라는 칭호는 원래 마렌처럼 계약 성립을 증언한 사람들에게 사용됐습니다. 이후 중앙 관리기관이 그 칭호를 독점했습니다.” “그렇다고 마렌의 기록이 지금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죠.” 재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원계약 해석을 바꿀 증거이지만, 이미 성립한 개별 계약을 일괄 무효로 할 근거는 아닙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명을 한 사람과 안 한 사람, 동의했다가 철회한 사람, 자신이 무엇을 약속했는지도 모르는 사람. 모두의 사정은 달랐다. 한 장의 문서로 전부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원계약의 첫 가르침 같았다. 저녁 늦게 마렌의 초대장이 한 번 더 떠올랐다. [원본 보존 기록 진정성: 일부 확인] [열람 요청 실제 발신자: 자동 보존회선] [회선 유지자: 신원 미상] 재하가 창을 보며 말했다. “살아 있는 누군가가 저 편지를 써서 보낸 건 아니었군.” 에반은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회선을 유지하는 존재는 여전히 있다는 뜻이지.” 그 순간 신전의 빈 종이 한 장에 새로운 표식이 찍혔다. 계약서를 채우지 않은 세 번째 사람을 위한 칸이었다. [비서명자 의견 접수 통로: 복원 가능] [복원 전제: 당사자의 직접 요구] 재하는 손을 뻗다가 멈췄다. 자신이 복원하고 싶다고 해서 저절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주인 없는 서명란을 자기 권능으로 채울 수 없는 것처럼, 통로를 열라고 요구할 권리도 누가 갖는지 물어야 했다. 그는 릴리에게 말했다. “신전을 믿지 않는 분들께도 보여 주세요. 이건 제 신청서가 아니라 그분들의 선택지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창밖에서 먼 종소리가 울렸다. 그날 처음으로 재하는 그 소리가 무섭지 않았다. 다만 누가 종을 치고 있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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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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