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이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열두 분이었다.
그중 아홉 분은 문장을 고르는 데 썼고, 나머지 삼 분은 윤재하가 그 문장을 자꾸 고치려다 말리는 데 썼다.
“나는 이런 시스템을 설계했어.”
“어디까지요?”
“보관소의 중앙 연결망. 목소리를 한 저장기로 묶는 장치. 그리고 나중에 추가된 담보 상품의 표시 방식.”
“철회 버튼은 누가 없앴습니까?”
에반은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
“내가.”
재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놀랍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에반은 앞서 담보청에서 보증 상품을 만들었던 사실을 인정했고, 침묵항의 인쇄 틀도 알아봤다. 그러나 오래전 벌어진 일에 책임이 있다는 것과 지금 누구를 구할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왜 없앴어요?”
“처음에는 이용자가 자기 목소리를 확인하기만 하면 철회가 됐어. 그런데 중앙 장부를 만들면서 누군가 위조된 목소리로 다른 사람의 계약을 풀려고 했지. 큰 사고가 났고, 나는 사고를 막겠다는 핑계로 보관소 승인 없이는 철회가 안 되도록 바꿨어.”
“그다음은요?”
“그 승인 절차에 수수료를 붙였어. 소유자가 돌려받는 일에도.”
“그걸 누가 결정했죠?”
에반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제안이었어. 실적이 좋았거든. 위조는 줄었고, 담보청 수입은 늘었지.”
세리아는 기록을 남겼다. 에반이 자발적으로 밝힌 사실과 아직 검증되지 않은 부분을 구분했다. 악마가 허풍을 떨며 자기 죄를 과장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숨기는 일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릴리는 그가 평소처럼 농담으로 끝내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소 같은 아이가 생길 걸 몰랐어요?”
에반이 낮게 답했다. “알았어. 정확히 언제, 얼마나 많이 생길지는 몰랐지만, 그럴 가능성은 알았지.”
그 정직한 대답 때문에 방 안은 더 조용해졌다. 몰랐다는 변명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재하는 지금 당장 악마를 쫓아낼 수도 있었다. 감정적으로는 그러고 싶었다. 함께 위험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 사실은 그 길을 막아 버렸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화가 났다.
“잠깐 밖에 나가 주세요.”
에반은 아무 말 없이 일어섰다. 문을 나서기 직전 멈춰 서서 말했다.
“해고해도 돼. 난 이미 오래전에 이런 일을 그만뒀어야 했으니까.”
“해고 얘기가 아닙니다. 제가 화난 상태에서 당신의 다음 말을 결정하고 싶지 않아서요.”
에반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릴리는 이소에게 돌아가도 되는지 물었다. 재하는 그렇다고 했다. 세리아와 누리는 남았다. 둘 다 에반의 고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재하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가 먼저 말했다.
“제가 실망했다고 해서 증거가 사라지지는 않죠.”
세리아가 답했다. “그리고 에반이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책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실 확인, 피해자 통지, 재발 방지입니다.”
“그럼 우선 설계 기록을 확보합시다. 에반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을 본인에게 물어보고, 그 자료를 독립적으로 보관해요.”
“동행시키시겠습니까?”
재하는 창밖을 바라봤다. 에반은 부두 끝에서 혼자 서 있었다. 마을 주민이 지나갈 때마다 어색하게 길을 비켜 주었다. 늘 사람의 표정을 관찰해 물건을 팔던 악마가 이제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자료를 찾는 데는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증언을 검증하는 사람으로 세우지는 않겠습니다.”
에반이 문밖으로 나간 뒤, 릴리는 창가에 가만히 섰다. 그녀는 자기 동생 노아의 치료 기록을 떠올렸다. 만약 재하가 첫날 신앙 포인트를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다른 신전은 비용을 요구했고, 가족은 돈이 없었다. 그때 에반 같은 사람이 미리 보증 상품을 만들었다면, 누군가에게는 그것도 생명을 구하는 수단처럼 보였을 것이다.
“처음부터 나쁜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죠.” 그녀가 말했다.
“그럴 겁니다.” 재하가 답했다.
“하지만 나쁜 결과를 만들었잖아요.”
“그렇죠.”
릴리는 한참 고민한 뒤 말했다. “저도 언젠가 신전 운영을 맡으면 잘못된 결정을 할 수 있어요. 그때 누가 저를 멈춰 줄 수 있을까요?”
세리아가 대답했다. “권한을 나누고, 이유를 공개하고, 이의 신청을 받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재하는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정말로 정직한 신이라면 자신이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제도에 남겨야 한다. 에반을 탓하는 일은 당장 쉬웠지만, 자신이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는 일은 더 어려웠다.
항구 관리인 벨다가 찾아왔을 때 그는 먼저 에반의 과거를 숨기지 않고 설명했다. 벨다는 긴 문장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와 같다고 적었다. 당시 관리기관에서는 설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고, 여러 사람이 결정했기 때문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고.
‘책임자는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그 문장은 에반을 완전히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기록도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재하는 벨다에게 증거를 보관할 독립된 장소가 있는지 물었다. 벨다는 마을 회관의 오래된 금고를 가리켰다. 금고의 열쇠는 항구 주민 둘과 외부 감사인 하나가 따로 가지고 있었다. 셋이 함께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았다.
“훌륭한 방식이네요.” 재하가 말했다.
벨다는 종이에 답했다.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 셋의 시간을 맞추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재하가 웃었다. “그래도 한 사람이 전부 빼앗는 것보다는 낫죠.”
이소는 그날 에반에게 전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악마가 듣고 싶어 할 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재하가 아이를 설득할 이유도 없었다. 릴리는 이소에게 필요하면 언제든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그러나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에반은 바깥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재하는 그에게 돌아와 말을 전했다. “아직 만날 준비가 안 됐답니다. 지금은 요청만 접수된 상태로 두죠.”
“그래.” 악마가 대답했다. 그가 더 묻지 않아 재하는 오히려 안도했다.
그날 오후 재하 일행은 에반의 안내를 받아 항구 아래의 폐인쇄소로 향했다. 세관장은 출입 허가를 내주지 않으려 했다. 재하가 공익 기록 실사 요청서를 내자 그제야 열쇠를 가져왔다. 미라는 출입문 앞의 무너진 계단을 확인했다. 안쪽에서 바람이 불었고, 축축한 종이 냄새가 났다.
인쇄소에는 누군가를 설득하는 문구들이 널려 있었다. '한 번 서명으로 평생 안심', '부담 없이 미래를 맡기세요', '귀하의 소중한 신앙을 보호합니다'. 어떤 종이는 색이 바래 있었고, 어떤 종이는 지금도 길거리의 광고처럼 선명했다.
에반이 벽에 붙은 판을 떼어 냈다. 그 아래에는 오래된 설계 도면이 있었다. 반환용 관이 중앙 저장기에 연결되기 전의 모습이었다. 세리아가 사진 대신 원본의 흠집과 치수를 기록했다. 누리는 접촉하지 않고 글씨만 읽어 냈다.
“여기예요.” 에반이 한 부분을 가리켰다. “원래 사용자 선택지는 셋이었어. 보관, 반환, 삭제.”
“그럼 지금은 왜 둘도 안 남았죠?”
“반환과 삭제를 모두 보관소의 승인 안쪽으로 넣었어. 화면에는 보관만 보이게 했고.”
재하는 뒤집힌 도면 가장자리에서 어린 글씨를 발견했다. 반듯하지 않은 획으로 '싫어요'라고 써 있었다. 그 글씨 밑에는 누군가 손톱으로 긁어 낸 자국이 있었다. 에반은 한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첫 시험 때 아이 하나가 와서 자기 목소리를 돌려 달라고 했어. 그 아이는 글자를 몰랐고, 말로만 '싫어요'라고 했지. 보관소에서는 신청 형식이 아니라며 돌려보냈어.”
“그 아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모르겠어. 확인하지 않았어.”
재하는 화가 났지만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모른다는 말이 가장 끔찍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에반은 이름도 적어 놓지 않았고 뒤따라가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이 삶에서 가장 절실하게 말한 한마디를 시스템은 문서가 아니라고 무시했다.
폐인쇄소의 아래층에는 실제로 기계를 돌렸던 사람들의 근무표가 남아 있었다. 에반은 그 표를 보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하나의 이름에 세 개의 야간 근무가 연달아 배정되어 있었다. 그는 과거 담당자가 회복 시간도 없이 일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는 보고만 받았지, 누구 손이 얼마나 닳았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미라는 장부를 들여다봤다. “이런 기계를 밤새 돌리면 톱니가 먼저 망가지겠는데요.”
“그때 자주 고장났어.” 에반이 말했다.
“그래서 사람을 더 투입했나요?”
“응. 교대도 없이.”
“고장 원인을 제대로 못 찾았군요.”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만든 건 유리병 하나를 효율적으로 보관하는 기술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사람과 기계 모두를 소모하는 시스템이 되었다. 재하는 벽에 걸린 근무표를 따로 보존하기로 했다. 음성 반환의 문제만 다루다가 인쇄소 노동자의 피해를 지워 버릴 수는 없었다.
그때 세리아가 가장 아래 서랍에서 날짜가 다른 두 장의 같은 양식을 발견했다. 한 장에는 '사용자 직접 철회' 항목이 분명히 있었지만 다른 장에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단순히 화면에서 숨긴 것이 아니었다. 종이 원본을 바꾸며 항목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흔적이었다. 이 두 장의 생산 날짜는 에반이 설계자였던 시기와 일치했다.
“이게 더 직접적인 증거입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에반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래. 그건 내가 승인했어.”
“승인하게 만든 내부 논의 기록도 찾아야 합니다. 누가 위험을 알렸는지, 누가 무시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악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 사건은 한 사람의 고백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회수체가 곧 움직일 것이라는 경고가 기계 벽에 켜졌다. 누군가 과거 기록을 열람한 순간 중앙 장부에 경보가 올라간 것이다.
그때 인쇄소의 바닥이 흔들렸다. 오래전 봉인한 수로 같은 관에서 검은 잉크가 올라왔다. 종이가 젖는 소리와 함께 벽의 광고들이 꿈틀거렸다. 문구가 살아 있는 벌레처럼 움직여 문틈을 막았다.
[불법 반출 감지]
[설계자 신원 확인: 에반]
[원본 폐기 절차 개시]
에반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넣었던 자동 방어 장치야.”
“비상 해제 버튼은요?” 미라가 물었다.
“당시에 지웠어. 업무 처리가 빨라진다면서.”
재하는 잠시 그를 노려봤다. “정말 일관되게 답답한 분이시군요.”
“알아.”
미라는 천장을 받치는 기둥이 이미 썩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열을 써서 잉크를 태우면 인쇄소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에반은 광고 문구의 최초 인증 키가 자기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고 밝혔다. 설계자가 직접 조작해야 원본을 꺼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오래된 위법 기록이 함께 살아나 자기 신성 면허가 영구 박탈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싸게 먹히네요.” 재하가 말했다.
에반은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그는 자기 손바닥을 잉크에 대었다. 벽의 문구가 일제히 멈췄다. 누리가 원본 도면을 천천히 꺼냈고, 미라는 휘어진 지지대를 괴었다. 세리아는 추후 독립 검증을 위해 조작 순서를 기록했다. 모두 밖으로 나오자 인쇄소는 다시 조용해졌다.
에반의 손바닥에는 붉은 글씨가 남았다.
[설계자 자격 정지]
[과거 영업 기록 전면 공개 예정]
재하는 그것을 보고도 축하하거나 위로하지 않았다. 대신 에반에게 말했다.
“이소에게 직접 설명할 기회는 마련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만나기 싫다고 하면 받아들이세요.”
“알겠어.”
“당신이 도와준 일은 고맙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전 일을 없던 걸로 할 생각은 없고요.”
에반은 고개를 숙였다. “그게 맞아.”
그날 밤 이소는 에반의 면담 요청서를 받았다. 한참 읽다가 거절 칸에 표시했다. 에반은 아무 항의도 하지 않았다. 오래전 아이의 '싫어요'를 들을 기회를 놓친 악마에게, 이번 거절을 존중하는 일은 작은 시작이었다.
그리고 회수체들이 항구 바깥에서 길게 울었다. 수백 장의 검은 계약서가 파도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세리아는 중앙 보관소의 긴급 명령이 발동되었다고 알렸다.
[원본 설계도 이동 금지]
[우편로 통행자 전원 회수 대상 등록]
그때 항구의 가장 높은 종탑에서 아무도 치지 않은 종이 울렸다. 반짝이는 병 00000번의 표면에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첫 서명의 증인이 기다리는 곳. 종을 치는 자의 손이 아니라, 종소리에 대답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라.’
재하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에반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천계 바깥으로 이어지는 길은 누군가의 숨긴 서명으로 닫혀 있었고, 이제 그 닫힌 곳에 숨어 있던 기록들이 하나씩 깨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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