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항에 도착하자 윤재하는 마을 이름이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항구에는 종이 울렸고, 톱질하는 소리가 들렸고, 구름 위에 매단 밧줄이 끼익거렸다. 낡은 우편선을 고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대화 소리만 없었다.
“말을 못 하는 건가요?” 릴리가 낮게 물었다.
“아니.” 에반이 속삭였다. “여기선 말하지 않는 게 안전한 거야.”
옛 하늘 우편로는 돌로 만든 길이 아니었다. 푸른 하늘에 흰 선이 이어지고, 그 위에 오래된 나무 발판이 한 장씩 떠 있었다. 단추를 가진 재하가 먼저 걸으면 발판이 생겼다. 미라가 그 뒤를 따라오며 썩은 못을 찾아 표시했다. 길은 단순히 이동 수단이 아니라 누군가의 서명으로 유지되는 구조였다. 어느 발판에는 '후임 통행자 보증'이라는 문구가 있었고, 다른 발판에는 '실종 시 책임 없음'이 적혀 있었다.
재하는 그중 하나에 발을 올리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을 책임지지 않는다고 적힌 다리를 무턱대고 건널 수 없었다. 미라가 자세히 살핀 뒤 옆의 보수 통로를 찾았다. 그때부터 일행은 지름길보다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침묵항에 도착한 뒤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항구 중앙에는 목소리를 담는 유리병이 수천 개 걸려 있었다. 맑은 병에서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났고, 잿빛 병에서는 오래된 울음이 새어 나왔다. 사람들은 병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써 붙였다. 그러나 이름이 있는 병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누리가 안내했다.
[침묵항 음성 보관소]
[설립 목적: 원계약 철회권 보존]
[현행 운영 목적: 서명 진정성 보증 및 신앙 담보 평가]
“철회할 권리를 지키는 장소가 담보 평가장이 됐다고요?” 세리아가 물었다.
항구 관리인인 중년 여성은 종이에 답을 썼다.
‘옛날에는 자기 목소리로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목소리를 돌려받으려면 보관료를 내야 합니다.’
여자의 이름은 벨다였다. 그녀는 입술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계약 대상이 되지 않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벨다는 재하 일행을 세관 창고로 데려갔다. 그곳에서는 병을 만들던 장인이 도망가며 남긴 도면과, 반환되지 못한 목소리의 목록을 보관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의사를 밝힙니까?” 재하가 물었다.
벨다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창고 바닥에 분필로 그린 작은 칸. 찬성, 거부, 보류.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그림도 있었다. 손가락 하나로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구름 위에서 내려온 공식 통지서는 그 칸들을 모두 무효로 취급하고 있었다.
[철회 의사 인정 요건: 등록 음성의 직접 재생]
에반이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를 돌려받기 위해 돈을 내야 하고, 돈을 내지 않으면 철회할 수 없는 거군.”
“어떻게 그런 조항이 생긴 겁니까?” 릴리가 물었다.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관 창고 구석에 쌓인 오래된 인쇄 틀을 보고 손을 멈췄다. 마치 알고 있는 얼굴을 마주친 사람처럼.
침묵항의 일상은 말이 없어도 바빴다. 어부들은 구름 아래 흐르는 은빛 물결에서 작은 비늘 생물을 건져 올렸고, 제빵사는 뜨거운 빵을 종이에 싸서 내놓았다. 가격을 알리는 손가락 수가 달라서 바가지 논쟁도 벌어졌다. 다만 싸움은 대개 눈빛과 발짓으로 끝났고, 누구도 '이렇게 말했으니 증거다'라는 문장을 만들어 줄 음성을 내놓지 않았다.
재하는 시장을 둘러보다 아이 둘이 서로 다른 손짓으로 같은 물건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 아이는 둥근 빵을 가리켰고, 다른 아이는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가게 주인은 둘에게 빵을 하나씩 주었다. 누가 무엇을 뜻했는지 물을 수 없어도,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는 나름의 소통 방식이 있었다.
“말을 안 하면 다들 괜찮게 지낼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릴리가 물었다.
벨다는 종이에 두 문장을 적었다. ‘지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한 침묵과 강요된 침묵은 다릅니다.’
그 말은 재하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는 자기 삶에서 말을 할 수 있는데도 안 하기로 한 순간들을 기억했다. 눈치를 보느라, 책임이 두려워, 분위기를 깨기 싫어서. 그런데 이곳의 사람들은 말하기로 선택하는 순간 비용을 청구받을 수 있었다. 침묵은 삶의 방식이 아니라 강제로 부과된 보험료가 되었다.
벨다는 항구 노인들이 만든 손짓 사전을 보여 주었다. 남쪽 마을에서 온 사람은 손가락을 두 번 접으면 ‘일단 멈추자’라는 뜻으로 이해했고, 북쪽 마을 사람은 같은 손짓을 ‘나는 동의한다’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말 대신 다른 수단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안전을 완전히 보장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계약에서는 상대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세리아는 자신의 기록 양식을 고쳤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손짓을 기록할 때는 관찰한 행동과 통역자가 추정한 의미를 구분하겠다고 했다. 누군가 고개를 끄덕였다고 무조건 동의로 적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했다면 다시 묻고, 답을 보류할 권리를 남긴다.
그 사이 에반은 시장 한쪽의 오래된 광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의 자신이 고안한 그림이었다. 웃는 가족과 함께 작은 글씨로 '안전한 보관, 걱정 없는 미래'라고 써 있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그림만 보고 웃었다. 에반은 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는 광고입니까?” 재하가 물었다.
“옛날에 만든 거야. 보관소 사업이 커질 때.”
“좋은 반응이었겠네요.”
“아주 좋았지. 누구든 자기 목소리가 안전하게 보존된다니 안심했거든.”
“그리고 비용이 붙었고요.”
“응. 처음에는 되찾아 갈 때 비용이 든다는 걸 아무도 크게 생각하지 않았어.”
에반은 광고판의 작은 글씨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재하는 그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싶었지만, 구체적인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질문을 남겨 두기로 했다. 릴리는 둘의 말투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악마가 농담을 할 때보다 말이 짧아질 때가 더 중요한 순간일 수 있었다.
세리아는 마을의 손짓 사전을 복사해 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주민들의 허락부터 받았다. 기록을 남긴다고 해서 그들의 생활 방식까지 보관소의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벨다는 잠시 생각하다 공익 열람용 범위에 한해 동의했다.
그때 항구 사무원이 다가와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방문자들에게 발급하는 임시 통행증이었다. 통행증에는 '발언 유무에 따른 차별 금지'라고 쓰여 있었으나, 바로 아래에 '증언 효력은 등록 음성 보유자에 한함'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릴리가 두 줄을 번갈아 보았다.
“차별하지 않는다고 적고, 바로 차별하고 있네요.”
재하는 봉투를 반납하지 않았다.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증거를 없앨 수는 없었다. 세리아에게 그것을 남겨 두자고 부탁했다. 이후의 증언에서 왜 사람들이 함부로 말할 수 없었는지 설명할 물증이 될 수 있었다.
그날 오후 일행은 한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항구의 낡은 계단에 앉아 작은 나무피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벨다가 종이에 이름을 적었다.
‘이소. 열여섯. 목소리 보관료 3년 체납.’
이소는 피리를 입에 대고 바람을 불었다. 소리는 났지만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옆에 있던 아이가 그녀의 손짓을 통역했다.
“노래를 못 해서 슬프다는 게 아니래요. 아픈 할머니에게 자신의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하고 싶대요.”
재하는 의자에 앉아 이소가 건넨 낡은 영수증을 읽었다. 세 살 때 열병을 앓아 치료받으며 어머니가 목소리 보관에 서명했다는 내용이었다. 치료는 실제로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서 대체 담보를 제공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소는 어린아이였고 동의한 적이 없었다.
“담보를 제공한 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소가 손을 들어 구름 아래 바다를 가리켰다.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건너갔다는 방향이었다. 재하는 더 묻지 않았다. 이소가 알려 주고 싶다면 스스로 말하거나 쓸 수 있을 것이다.
세리아는 계약을 검토했다. 미성년자의 보호자가 치료비를 대신 부담하는 계약과, 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목소리를 압류하는 계약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서명란도 이상했다. 이소의 이름을 기입한 글씨와 어머니의 서명은 필체가 달랐다. 보관소가 나중에 붙인 확인 도장에는 날짜마저 없었다.
“이건 절차 문제를 검토할 수 있습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다만 계약 전체를 지금 당장 취소한다고 해서 모든 병이 자동으로 돌아오는 건 아닙니다.”
재하는 이소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소녀는 병을 손에 넣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안에 갇힌 자기 목소리를 되찾고 싶다고 손짓했다. 환불보다 반환이 먼저였다.
“그럼 목소리를 찾는 작업부터 해 봅시다.”
벨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보관소의 저장 장치에는 수천 개의 음성이 한꺼번에 연결되어 있다. 하나를 마음대로 분리하면 이름이 지워진 다른 목소리가 소멸할 수도 있었다. 돌려주는 일 자체에도 기술이 필요했다.
미라는 낡은 기계를 둘러봤다. “분리 장치를 만들 수는 있어요. 하지만 본인 확인을 어떻게 하죠?”
이소가 자신의 피리를 꺼냈다. 나무에 새긴 작은 무늬가 유리병의 표식과 같았다. 어머니가 병을 맡길 때 복제품을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벨다는 처음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이소가 빌린 작업대에는 손때 묻은 악보가 있었다. 한쪽에는 낯선 기호가, 다른 쪽에는 노래 가사가 적혀 있었다. 릴리는 가사를 읽어 봤지만 이소는 고개를 저었다. 그 노래가 아니라 다른 노래라고 손짓했다. 소녀는 손바닥을 두드려 리듬을 만들었다. 작은 아이가 곁에서 그 리듬을 따라 두드렸다.
재하는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저 리듬도 목소리로 인정됩니까?”
누리가 답했다. “규정상 음성이 아니므로 별도 재산으로 분류됩니다.”
“어떻게든 분류하네요.”
“분류하지 않으면 담당 부서가 정해지지 않아서요.”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이소는 자기 악보를 재하에게 건넸다. 그 위에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는 내 목소리만 원한다. 다른 사람 것을 대신 받을 생각은 없다.’ 단순한 말이었다. 그러나 보관소 기록에서 그런 문장을 찾기는 어려웠다. 장부는 사람의 목소리를 병 번호와 가치로만 표시했고, 그 사람이 무엇을 바라느냐는 묻지 않았다.
재하가 글씨를 읽는 동안 이소는 피리를 불었다. 유리병들이 같은 간격으로 떨렸지만 00871번 병만 한 박자 늦게 흔들렸다. 미라는 그 차이를 알아차리고 도면 옆에 표시했다. 반환 절차에 쓸 수 있는 물리적인 근거였다.
에반은 조용히 피리를 손질해 주려다가 멈췄다. 이소가 자신에게 악기를 맡긴 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악마는 손을 거두었다. 재하는 그 변화를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물건에 손을 대기 전에 묻는 것은 대단한 기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되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회수체가 항구의 하늘에 나타났다. 새들은 주민들이 모인 광장 위를 맴돌며 말없이 병을 찾았다. 움직이는 표식은 이소의 이름을 향하고 있었다.
[압류 예정 병: 00871]
[채무자: 이소]
[사유: 열람 신청에 따른 담보 가치 불안정]
“우리가 보고 있다는 이유로 압류한다는 거예요?” 릴리가 분노했다.
에반은 유리병을 올려다봤다. “담보청 입장에선 질문 자체가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거지. 저 아이가 원래 자기 목소리의 주인이라는 걸 확인하면, 팔 수 있는 물건이 사라지니까.”
재하는 이소의 곁에 섰다. 무상의 약속을 발동하려다 멈췄다. 그는 이 아이가 원래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천 개의 목소리가 연결된 기계를 부술 권리는 없었다.
“이소.” 그가 말했다. “우리와 함께 확인 절차를 요청하겠니? 거절해도 네 병을 함부로 가져가지는 못하게 하려고 노력할게.”
이소는 종이에 한 글자를 썼다.
‘네.’
재하는 서류에 소녀의 글씨를 그대로 옮겼다. 대리 서명란은 비워 두었다. 그리고 보관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병 하나를 지키겠습니다. 다른 병에 든 분들의 허락 없이 다 건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음 순간 가장 높은 곳에 걸린 금빛 병 하나가 미세하게 울렸다. 그 병에는 이름이 없었다. 라벨에는 최초 보관 시기와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기록 번호: 00000]
[수취인: 최초 서명권자]
누리는 병을 바라보다 낮게 말했다.
“이것이 초대장이 가리킨 두 번째 열쇠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병 속에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가 대답하지 않기로 선택했던 침묵이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4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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