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계의 종이 여섯 번 울리면 서명권자의 승계가 이루어진다.
윤재하는 세 번째 종소리가 울릴 무렵, 아직도 자신의 이름이 적힌 수락서 앞에 앉아 있었다. 서류를 읽는 사람들은 그가 결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하는 이미 한 가지를 결정했다. 자기 이름으로 사람들의 미래에 빚을 지우는 권한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남은 문제는 그 뒤에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상급 공개 심리장은 전날 봉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상 출입구는 다시 열렸지만 투표함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기록관들은 새 자물쇠를 달기 전까지 그 주변을 경계했다. 미라는 다리 수선용 장갑을 끼고 투표함의 모서리를 살폈다.
“이걸 부수는 건 어렵지 않겠어요.”
에반이 눈을 크게 떴다. “진짜 부술 생각이야?”
“아니요. 부술 수 있다고 해서 다 부숴도 되는 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중이에요.”
재하는 웃었다. 지금까지 자신과 가장 잘 통하는 신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아마도 다리 위에서 평생 지낸 미라일 것이다. 그녀는 어떤 문제든 먼저 받침대가 썩었는지부터 확인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보다 실제로 버텨야 하는 기둥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세리아가 임시 결정문을 제출했다. 카르도 군 비축고와 리아넬 치료소의 의료 판단을 분리하고, 제6지역의 공동보존 기록은 기존 보전 명령을 유지하며, 신규 강제 담보 설정과 자동 일괄 정산을 독립 심리가 끝날 때까지 중단하도록 하는 신청이었다. 각 조치의 책임자는 자기 부분에만 서명했다. 빈칸이 있는 것은 부주의가 아니라 아직 동의하지 않은 당사자의 권한을 남겨 두기 위해서였다.
“최종 승인자가 없습니다.” 기록관이 지적했다.
“최종 승인자가 모든 내용을 승인할 권한도 없습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그러면 유효하지 않습니다.”
누리가 원계약의 세 의자 기록을 펼쳤다. 보존자와 공급 확인자, 분쟁 판정자는 서로 독립적으로 확인해야 하며,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역할을 대체할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세리아는 후속 개정에서 그 규칙이 언제 폐지됐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기록관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폐지된 날짜는 있었지만, 폐지를 승인한 당사자의 명부는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문서는 남아 있었고, 권한을 준 사람의 이름만 지워져 있었다.
네 번째 종이 울렸다.
서명권자가 회의장에 나타났다. 그의 몸을 이룬 검은 종이들이 전보다 날카롭게 접혀 있었다.
“네 선택은 무엇인가, 윤재하.”
“후보 수락 여부는 결정했습니다.”
“그럼 서명하라.”
“거절합니다.”
회의장에 웅성거림이 퍼졌다. 무기명 0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창백해졌다. 재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자동 승계가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 규칙부터 긴급 심리를 요청했습니다.”
서명권자가 웃었다. 목소리가 여러 문서에서 동시에 흘러나왔다.
“너는 아무 힘도 없는 자리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다시 빚을 지고, 너는 아무것도 막지 못한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서 막을 수 있는 일부터 함께 하려고 합니다.”
카르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붉은 군복의 옷깃에 군의 독립 보급 원칙이 적힌 새 인장이 달려 있었다. 그는 천계가 자신을 위협할 것을 알면서도 공식 증언을 반복했다. 군 보호의 대가는 피보호자의 신앙이 아니며, 민간 의료를 위한 비상 보급은 군의 정당한 규칙에 따라 제공됐다고 했다.
미라가 뒤따라 말했다. “나는 다리를 지키는 신입니다. 다리를 건넌 사람에게 다리 소유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이 지키는 일과 소유하는 일은 다릅니다.”
릴리는 사람들의 의견서를 펼쳤다. 참석하지 못한 주민들의 불확실한 의견은 한 묶음으로 만들지 않았다. 서로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각각 다른 서류에 서명했고, 이름 공개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익명 의견으로 남았다. 그녀는 자신이 첫 신도로서 재하를 믿고 있다는 사실도 밝혔지만, 그 믿음이 다른 이의 결정을 대신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우리 신님은 처음에 동생을 살려 주셨어요. 저는 그래서 그분을 믿습니다.”
그녀는 잠깐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런데 제가 그분을 믿는다고, 제 동생이 나중에도 무조건 믿겠다고 약속한 건 아니잖아요.”
노아가 맨 뒷자리에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이는 누나의 허락을 받아 방청하러 왔고, 병실에서 나온 사람들이 편히 앉도록 의자 몇 개를 옮기는 일을 도왔다.
다섯 번째 종이 울렸다.
[승계 단계: 최종 확인]
[제1후보: 거부]
[제2후보: 무기명 0호]
[자동 집행 준비]
투표함 위로 쇠빛 도장이 떠올랐다. 무기명 0호가 원격으로 권한을 이어받으려는 것이었다. 참석자들의 문서에는 일괄 정산이 시작된다는 경고가 나타났다. 리아넬 치료소의 조절관에도 새 할증 조항이 적용될 수 있었다. 재하의 손끝이 다시 아팠다. 그는 권능을 사용하면 무효화할 수 있는 문서가 어디까지인지 생각했다.
세리아가 그의 팔을 잡았다. “단독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당신의 권한으로 전체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원계약 위반 가능성을 확인하는 겁니다.”
“알아요.”
재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누리. 세 의자 원계약을 다시 보여 줘.”
누리는 원탁의 기록을 펼쳤다. 세 개의 의자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신이 자신들을 모두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서명을 맡아 보관해 줄 수 있는 존재이기를 바랐다. 한 명의 서명권자가 모든 계약을 소유해도 된다는 문장은 없었다.
“무기명 0호.” 재하가 말했다. “당사자의 질문에 답할 수 있습니까?”
[계약에 따라 자동 집행합니다.]
“질문을 듣고 판단을 바꿀 수 있습니까?”
[수정 권한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원계약의 판단 주체가 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규칙 충돌.]
도장판의 붉은 선이 흔들렸다. 단순한 오작동이 아니었다. 원계약은 질문을 들을 수 있는 주체를 요구했고, 후속 규정은 질문을 들을 필요가 없는 기계에게 그 직책을 넘기도록 했다. 두 문서의 충돌이 동시에 드러났다.
세리아는 즉시 임시 가처분을 신청했다. “중대하고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예상됩니다. 의료와 공공 공급의 기존 계약을 유지하되, 신규 강제 담보와 자동 승계 집행을 심리 완료 시까지 정지해 주십시오.”
상급 기록관은 머뭇거렸다. 그의 손에는 아직 어느 쪽 도장도 없었다. 그때 카르도와 미라가 독립 신격으로 원문 진정성을 확인했고, 누리는 제6지역 기록의 보관자로서 원계약의 존재를 증명했다. 에반은 부속 시행 규칙을 자신이 설계했고 나중에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증언했다. 어느 한 사람의 말만으로는 불가능했을 판정이, 서로 다른 책임을 지는 사람들의 증언으로 쌓였다.
기록관은 마침내 손을 들어 올렸다.
[긴급 보전 심리 개시]
[기존 공급: 한시 유지]
[자동 승계 집행: 효력 심사 중 일시 정지]
[새로운 담보 설정: 제한]
여섯 번째 종이 울렸다.
그러나 무기명 0호의 도장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윤재하가 서명권자가 된 것도 아니었다. 서명권자의 검은 형상은 여전히 존재했고, 담보청을 영원히 없앤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아무도 전부를 대신한다고 주장할 수 없는 잠깐의 틈이 생겼다.
재하는 그 틈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영광스러운 승리라면 너무 소박했다. 환자들의 신성등은 오늘 밤도 켜져 있어야 했고, 내일은 또 다른 회의가 필요했다. 세리아는 기간을 제한한 임시 보전 명령을 기록했다. 카르도의 군과 의료, 수로 대표들이 정해진 시각에 공급 현황을 보고해야 하는 조건도 붙었다.
“이제 해결된 겁니까?” 릴리가 물었다.
“오늘 일은 일단요.” 재하가 답했다. “내일부터 확인할 게 더 많아요.”
에반이 수첩을 펼쳤다. “그럼 새 홍보 문구를 만들어도 되겠네. ‘천계를 멈춘 신.’ 어때?”
“천계 전체가 아니라 자동 승계 절차 일부를 임시로 정지시킨 겁니다.” 세리아가 바로 고쳤다.
“그 문구는 절대 팔리지 않아.”
“팔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요.” 재하가 웃었다.
그때 누리가 세리아에게 작은 통지서를 건넸다. 원계약을 보전하는 동안, 기존 장부에서 아주 오래된 누락 항목 하나가 복구됐다는 내용이었다. 그 항목은 제6지역보다 더 과거의 기록이었다.
[최초 서명권자 공백 기록]
[원계약 보존 책임자: 확인 불가]
[마지막 확인 장소: 천계 바깥]
[기록 상태: 살아 있는 계약]
재하는 숨을 멈췄다. 천계 바깥이라니. 자신이 사고를 당하기 전 살던 인간의 세계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그 문구가 어느 장소를 뜻하는지 몰랐다. 단정하지 않기로 했다.
누리가 마지막 장을 열었다. 오래된 필체로 문장이 하나 적혀 있었다.
‘신들의 약속이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날, 이름 없는 사람이 마지막 서명을 하리라.’
재하는 자기 이름이 적힌 후보 명부를 내려다봤다. 그는 서명권자의 자리를 거절했는데도, 누군가가 오래전부터 이름 없는 후임을 기다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그분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누리가 조용히 답했다.
“살아 있는 계약은 확인됐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인지는 별개입니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 구분의 의미를 알았다. 기록이 남았다는 이유로 사람이 남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누군가 설명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방청석에서 기다리던 환자 가족이 치료소장에게 오늘 밤 공급이 정말 유지되는지 물었다. 치료소장은 확정된 부분과 아직 확인할 부분을 나누어 설명했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필요한 처치가 다르고, 내일까지 사용할 예비 재원은 확보됐지만 이후 계획은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가족은 불안한 얼굴이었으나 적어도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는 알게 됐다.
재하는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봤다. 천계를 뒤흔들었다고 사람들이 떠들었지만 실제로는 병동의 신성등 한 개가 꺼지지 않도록 수많은 사람이 고생한 날이었다. 그는 환자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신이 안다고 해서 모두 알아야 할 것은 아니었다.
카르도는 군 전령에게 명령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민간에 제공되는 군 비축량을 매일 확인하되, 실제 공급 보고는 보호 대상의 신앙 명부와 연결하지 말라고 했다. 마테오는 명령을 받아 적은 뒤 물었다.
“그럼 신도 수가 줄어도 공급을 유지합니까?”
“군법과 실제 필요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나를 믿는 자의 숫자가 아니라.”
전령이 떠난 뒤 재하가 카르도를 보며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좀 달라지셨네요.”
“너도 그렇다. 그때는 백 포인트를 모으기 전까지 사라질 것 같더니.”
“지금은 서류에 깔려 사라질 것 같습니다.”
카르도가 크게 웃었다. 전쟁신의 웃음은 여전히 조금 무서웠지만, 재하는 이제 그 안에 피곤함도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라는 아침에 다리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공동심의에 계속 참석할 필요가 있다면 미리 일정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신격의 위엄보다 다리의 남은 못이 더 걱정된다고 했다. 재하가 배웅하며 말했다.
“오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음에도 꼭 와 달라고는 못 하겠네요. 그쪽 일도 중요하니까.”
“필요하면 물어보세요. 그때 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죠.”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반드시 응해 줄 거라고 미리 예약해 두는 일이 아니었다. 거절할 수 있는 관계여야 대답에도 뜻이 있었다.
에반은 자기 낡은 만년필을 작은 유리통에 넣었다. 증거로 제출할 때까지 손상되지 않게 보관하려는 것이었다. 릴리가 물었다. “그 펜이 아깝진 않으세요?”
“아깝지. 내가 그걸로 좋은 일도 많이 했다고 믿었거든. 하지만 이제 그 펜이 무슨 서류에 쓰였는지 정확히 기억할 거야.”
“그러면 앞으로도 쓸 거예요?”
“글쎄. 적어도 누군가 대신 서명하는 일에는 쓰지 않으려고.”
누리는 회의록 마지막 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적힌 문장은 승계가 일시 정지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다음은 언제 다시 심의하는지, 오늘 명령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어느 지역에 영향을 주는지였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빈 공간이 남아 있었다.
“여기는 무엇을 적나요?” 재하가 물었다.
“다음 회의에서 당사자가 추가할 수 있는 의견란입니다.”
“오늘도 충분히 길었는데요.”
“다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재하는 웃으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누군가의 미래를 관리한다는 것은 미래의 결정을 모두 지금 해 버리는 일이 아니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 말을 적을 자리를 남겨 두는 일에 더 가까웠다.
그는 처음 신이 된 날을 떠올렸다. 신도 0명, 기적 0회, 폐허 신전 하나. 그때는 자신의 힘이 늘어나는 것만이 살아남는 방법인 줄 알았다. 지금도 신성 포인트가 부족하면 어려움에 처할 수 있었지만, 그가 지키려는 것은 자신의 숫자만이 아니었다. 보호할 사람의 동의, 책임을 맡을 사람의 한계, 틀렸을 때 되돌릴 수 있는 절차. 그런 것들이 없으면 신성은 결국 또 다른 부채가 될 것이다.
신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아가 물었다. “신님, 승진 안 했는데도 축하해 드려도 돼요?”
“왜?”
“원하시는 대로 한 거잖아요.”
재하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수락하면 좋아할 사람들이 있었고 거부하면 위험해질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그중 어느 한 사람의 칭찬만으로 자기 선택이 옳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아에게는 다른 대답을 하고 싶었다.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만, 오늘은 축하해도 될 것 같아.”
“그러면 케이크 먹어요!”
릴리가 멀리서 외쳤다. “그건 네가 먹고 싶은 거지!”
“신님도 먹고 싶으실걸!”
재하는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건 신탁으로 내려도 된다.”
에반이 재빨리 메모했다. ‘축하 케이크: 신탁 1호.’ 세리아가 즉시 그 옆에 ‘농담이며 강제 구매 효력 없음’이라고 덧붙였다. 네 사람이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짧은 웃음 뒤에 신전은 다시 조용해졌다. 재하는 접힌 공동심의 결정문을 서랍에 넣지 않고 벽에 걸었다. 누구라도 자신이 무슨 결정을 했는지, 그 결정의 한계가 무엇인지 읽을 수 있도록. 문서 가장 아래에는 아직도 빈 칸이 있었다. 앞으로 그들이 만나게 될 누군가의 목소리를 위한 자리였다.
그의 눈앞에 새 안내창이 나타났다.
[긴급 보전의 유효 기간: 30일]
[차기 공개 심의 예정]
[보존 기록에 등록되지 않은 열람 요청 1건]
[발신자: 최초 서명권자]
에반이 편지를 보고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오래전 만났던 무명의 신의 목소리가 먼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윤재하.” 그가 낮게 말했다. “이번에는 네가 먼저 그 사람을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회관 창밖에, 누구의 신전에도 속하지 않은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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