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계까지 남은 여섯 시간 중 한 시간은 문을 여는 데 썼다.
윤재하의 손에는 금빛의 가느다란 균열이 남아 있었다. 투표함을 둘러싼 일방적인 잠금을 막는 동안 생긴 흔적이었다. 상처가 아니라 권능의 부담이라고 누리는 설명했지만, 재하는 손을 움직일 때마다 피부 안쪽에서 종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거 괜찮은 겁니까?”
“회복 가능한 상태입니다.” 누리가 말했다. “다만 동일한 범위에 다시 권능을 쓰면 공동보존 서명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네요.”
세리아는 임시 회의장을 치료소 옆의 오래된 강당으로 옮겼다. 먼저 환자에게 영향이 없는지 확인하고, 강당을 비워 줘도 병원의 정상 업무가 유지되는지를 치료소장에게 물었다. 치료소장은 이틀만 쓸 수 있다고 답했다. 그 뒤에는 환자들의 재활 교육이 예정되어 있었다. 재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제약에 안도했다. 천계의 무한한 권한보다 이틀 후 누군가 사용할 장소라는 사실이 더 믿음직했다.
회의장 밖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였다. 봉쇄를 목격한 이들 중에는 신앙 담보청을 옹호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혼란을 걱정하며 권한을 한 곳에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은 권한을 흩어 놓기 전에 이미 이뤄진 계약부터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릴리는 두 의견을 같은 벽에 나란히 붙였다. 어느 한쪽이 적을 지우지 못하도록 종이 위에 보존 인장을 찍었다.
에반은 서명권자 승계 규칙의 마지막 줄을 읽고 있었다.
[직책 승계가 정해지지 않은 때, 집행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원래 서명권자가 임시 권한을 유지한다.]
“그 사람이 계속 맡는다고?” 재하가 물었다.
“그래. 후보를 거절하면 무기명 0호가 들어오고, 심의를 끝내지 못하면 원래 사람이 계속 남고. 선택지를 어떻게 고르든 저쪽에는 길이 있어.”
“그럼 우리가 지켜야 할 건 직책의 사람이 아니라, 직책이 없는 동안에도 환자를 돌볼 수 있는 길이네요.”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 공급과 계약 집행을 분리하는 임시 판정이 필요합니다.”
“누가 그걸 승인합니까?”
“그게 문제죠.”
재하는 그날 아침 종이 세 장을 탁자에 나눠 놓았다. 첫 장에는 카르도의 군 보급 장부에서 확인한 비축량을, 둘째 장에는 리아넬 치료소의 필수 공급을, 셋째 장에는 제6지역 기록의 동의 권한을 적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한 사람이 결정해야 한다는 전제를 지우자 몇몇 일이 나뉘어 보였다.
군은 자기 비축량을 군법에 따라 관리할 수 있었다. 치료소는 환자에게 필요한 공급 우선순위를 의료 판단으로 정할 수 있었다. 제6지역의 보존 기록은 이미 공동보존 계약으로 무단 이전이 금지되어 있었다. 문제는 서로 연결된 조절관과 정산망을 누가 일시적으로 유지할 것인지였다.
“그 연결망에 서명권자가 꼭 필요합니까?” 우르센이 물었다.
세리아가 답했다. “현재 시스템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원계약에는 서명권자가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한 문구만 있고, 업무를 분리하지 못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사람이어야 한다고요?” 재하가 눈썹을 올렸다.
“정확히는 당사자의 질문을 들을 수 있는 주체여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무기명 0호가 답변을 못 하는 이유죠.”
누리가 서류를 들여다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직책을 분리한 선례가 있습니다.”
모두가 종이 인형을 돌아보았다. 누리는 오래된 기록 한 장을 꺼냈다. 무명의 신이 여섯 지역에 원계약을 남길 때의 부속 회의록이었다. 그 자리에는 계약을 보관하는 사람, 물자 공급을 확인하는 사람, 분쟁을 판정하는 사람이 각각 다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느 한 사람도 다른 둘의 동의 없이 최종 문서에 효력을 부여할 수 없었다.
“그럼 최초의 서명권자는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재하가 물었다.
“직책명은 하나였습니다. 다만 수행 주체는 셋이었습니다.”
에반이 작게 신음했다. “내가 입사할 때 교육받은 역사에는 그런 얘기가 없었어.”
“설계 문서가 바뀌기 전의 기록입니다.” 누리가 답했다.
그 사실이 놀라워 잠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천계가 영구적인 자연 법칙처럼 주장해 온 권한 집중은, 누군가가 사무실의 의자 두 개를 치우면서 만들어진 것에 가까웠다. 물론 역사적 비유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그 제도를 지금 되살리려면 실제로 동작하는 공급망과 법적 책임을 연결해야 했다.
카르도가 먼저 말했다. “군의 경계 비축고는 내가 책임지겠다. 단, 군의 보호 대상에 대한 신앙 징수는 금지한다.”
리아넬 치료소장이 대답했다. “필수 공급의 의료 우선순위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의 사적인 기록을 신성 거래 장부에 넘기지는 않겠습니다.”
세리아는 자신의 감찰권 한계를 설명했다. “저는 집행을 승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원계약 위반을 발견하면 보전 명령을 청구하고 기록을 공개 심리에 제출할 수 있습니다.”
미라가 물었다. “그럼 기록의 소유권은 누가 지킵니까?”
누리는 작은 손을 들었다. “제6지역 기록에 대해서는 공동보존 계약이 있습니다. 다른 지역 기록은 각각의 당사자 합의가 필요합니다. 제 역할을 전체의 허락인 것처럼 넓힐 수는 없습니다.”
재하는 수첩 한가운데에 선을 그었다. 이것은 승리 선언이 아니라 임시 전환 계획이었다. 하나의 인장을 세 권한으로 나눠 놓더라도, 아직 동의하지 않은 지역에 일방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을 붉은 글씨로 적었다.
“이걸 누가 서명하죠?” 릴리가 물었다.
“아무도 전부에 서명하지 못합니다.” 재하가 답했다. “각자 책임지는 부분에만 하는 거죠.”
회의는 다시 길어졌다. 카르도의 군에서는 정찰 위험이 커지면 임시 공급을 조정할 권한이 필요하다고 했다. 치료소는 그 조정 때문에 환자에게 갑자기 공급이 끊기지 않도록 사전 통지 시간을 요구했다. 우르센은 수로를 보강한 주민들의 노동 비용도 따져야 한다고 했다. 어느 항목이든 한쪽 편의를 위해 다른 쪽을 희생시키지 않으려면 추가 계획이 필요했다.
에반은 화이트보드에 숫자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한 번은 계산이 맞지 않아 종이를 구겨 버렸다. 안나는 구겨진 종이를 펴서 다시 읽었다.
“잘못된 계산도 남겨 두세요. 나중에 왜 그 안을 버렸는지 알아야 하니까.”
에반이 멋쩍게 웃었다. “내가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오네.”
회의장에서는 세 장의 서류가 다른 이유로 여러 번 수정됐다. 카르도의 군은 신성 비축량을 숫자로 공개하면 외부의 적에게 약점이 드러날 수 있다고 했다. 의료진은 중증 환자의 세부 정보가 공개될 경우 그 가족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했다. 수로 조합은 마을별 물 사용량을 숨기면 어느 쪽이 더 많은 부담을 졌는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럼 아무것도 공개하지 않는 편이 안전합니까?” 재하가 물었다.
세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무엇을 누구에게 공개해야 책임을 검증할 수 있는지 구분해야 합니다.”
그들은 군의 세부 위치를 숨긴 채 총 비축량의 변동과 민간 공급량을 공개할 수 있는지 살폈다. 치료소는 환자 이름 대신 병동별 필요한 신성의 범위만 공개하기로 했다. 수로 조합은 사용량과 노동 비용을 공개하되 개별 가정의 경제 상황은 따로 보호했다. 이 방식에도 허점이 있을 수 있으므로, 독립 검증을 맡은 사람들에게 더 구체적인 원본을 보일 절차를 정했다.
카르도는 그중 어느 항목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군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말에 검은 눈썹을 찌푸렸지만, 병사들이 다른 지역에 보낸 물량만큼은 정확히 알려야 한다는 마테오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무언가를 내놓았을 때, 내놓지 않았다고 하는 자가 생길 수도 있겠군.”
“반대도 있습니다.” 마테오가 답했다. “내놓지 않았으면서 내놓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죠.”
카르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말은 군에서도 자주 들었다.”
그는 종이 위에 손을 올렸다. 자신의 이름 옆에 군 보급대장과 민간 연락관의 확인 칸이 함께 있는 것이 못마땅하면서도, 혼자 도장을 찍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한 사람도 완벽하지 않다면 최소한 서로가 놓친 부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했다.
치료소장은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긴급 공급의 심사를 공개 절차에 넘기면, 환자가 기다리는 시간은 누가 책임집니까?”
재하는 숨을 삼켰다. 심의가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서류를 정확히 쓰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지나가는데, 모든 결정에 회의가 필요하다면 병동에서 누군가를 잃을 수도 있었다.
미라가 말했다. “다리 위에서 사람이 미끄러지면 다리 보수 위원회부터 소집하지 않습니다. 우선 사람을 붙잡고, 안전한 곳으로 옮긴 뒤 무엇이 잘못됐는지 확인하죠.”
“그럼 긴급 처치 권한을 따로 둬야겠네요.” 릴리가 말했다.
그들은 긴급 공급은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먼저 진행하되, 얼마나 사용했고 어떤 근거로 우선순위를 정했는지 사후에 감사받도록 했다. 긴급이라는 이름으로 관련 없는 계약을 만들거나 사람의 신앙을 징수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치료소장은 처음으로 어깨를 조금 내려놓았다.
우르센도 자신의 경우를 설명했다. 홍수 때 수문을 열려면 몇 분 안에 결정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현장 관리자에게 제한된 권한을 주고, 나중에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점검했다. 재하는 그런 일이 늘 옳은 결정을 보장하지는 못하더라도, 책임을 추적하고 다음번 계획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회의가 길어지자 누리는 작게 제안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기록을 한눈에 볼 필요는 없습니다. 각자의 결정에 필요한 항목을 연결하되 원본을 보존하는 구조가 가능합니다.”
에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지금 업무 개선안을 낸 거야?”
누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렇게 기록하셔도 됩니다.”
재하는 누리에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부터 어려워하던 종이 인형이, 이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스스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 누리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두 시간 뒤 임시 대체 공급 계획의 윤곽이 잡혔다. 남은 공공 공급을 일주일 단위로 나누어 배정하고, 조정이 필요할 때는 의료와 군, 수로 대표가 각각 영향 범위를 설명하기로 했다. 제6지역의 잔향 수익은 계속 동결했고, 아직 당사자 동의가 없는 다른 계약에 대해서도 신규 담보 설정을 보류해 달라는 청구를 별도로 냈다.
“이제 신청서를 어디에 넣죠?” 재하가 물었다.
세리아가 칠판의 가장 아래 조항을 가리켰다. “상급 공개 심리의 긴급 가처분으로 넣을 수 있습니다. 직책 승계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승계 공백이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는 임시 조치입니다.”
“그럼 가능한 걸 가능한 대로 요구하는 거군요.”
“맞습니다. 확정 판결은 나중에 해야 합니다.”
재하는 마지막 서류를 준비했다. 그때 강당 문이 열렸다. 검은 형상의 서명권자가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얼굴에 똑같이 검은 인장을 단 서기관이 혼자 찾아왔다. 그는 봉투 하나를 테이블에 놓았다.
[최후 승계 선택 통지]
[제1후보 윤재하]
[수락 시: 무기명 0호 폐기 가능]
[대가: 기존의 모든 보호 계약에 대한 개인 연대 책임]
[거부 시: 무기명 0호 즉시 취임]
“기억하라고 하십시오.” 서기관이 말했다. “서명권자는 당신이 선택하지 않아서 발생한 일도 당신의 책임이라고 기록할 겁니다.”
재하는 안내문을 한참 읽었다. 온갖 사람의 삶이 걸린 시간을 자신의 죄책감으로 바꾸려는 마지막 유혹이었다. 그가 무거운 마음으로 답하려는 순간, 릴리가 먼저 말했다.
“그거 이상하네요. 아직 우리 회의 결론을 제출하지도 않았는데 왜 선택이 두 개뿐이라고 정해 버리죠?”
세리아가 봉투의 발급 시각을 확인했다. 공동심의의 자료가 접수되기 한 시간 전이었다. 새로운 주장에 대한 심사도 하지 않은 채 최후 선택으로 확정한 문서였다.
“내용 심사 없이 발송됐습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이것도 증거가 됩니다.”
재하는 조금 웃었다. “그분은 왜 매번 서류로 제 편을 들어 주시죠?”
서기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곧장 돌아갔지만, 봉투의 수령 거부가 아니라 보관 신청이 접수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승계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이었다. 회의장에서 준비한 서류에는 아직 마지막 제목이 없었다. 재하는 펜 끝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적었다.
‘아무도 타인의 삶 전체에 서명하지 않는 임시 결정.’
그리고 그 아래를 빈칸으로 남겼다. 각자의 책임이 적힐 자리는 있었지만, 모든 사람을 대신하는 마지막 도장은 없었다.
제3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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