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38화
PAYLUA ORIGINAL · 제38화

38화. 천계의 투표함은 잠겨 있습니다

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057자

오프라인 책장
공동심의 회의장에는 투표함이 하나 있었다. 문제는 잠겨 있었다는 점이었다. “회의를 하라는 겁니까, 구경을 하라는 겁니까?” 윤재하가 물었다. 천계의 상급 기록관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투표함은 승계 절차가 확정된 뒤에만 열 수 있습니다.” “승계 절차를 정하려고 모였는데 절차가 확정되어야 투표할 수 있다는 말씀이죠?” “맞습니다.” “굉장히 완벽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구조네요.” 에반이 작게 박수를 쳤다. “내가 한창 일할 때는 이런 걸 ‘행정 안정성’이라고 불렀지.” “아주 불안정한 뜻이네요.” 상급 공개 절차에는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신들과 기록관리자, 보급 담당자, 병동에서 나온 치료사 대표, 유리포 수문 관리자, 방직촌 노동자, 제6지역 후손들의 옵서버까지. 그러나 좌석은 신격 대표에게만 넉넉히 배정돼 있었다. 사람들은 뒤쪽의 좁은 통로에 서야 했다. 릴리는 의자부터 옮겼다. 마테오와 안나가 도왔고, 미라는 오두막에서 가져온 접이식 의자를 펼쳤다. 기록관은 규정에 없는 행동이라며 지적했으나 세리아가 방청 인원에 대한 안전 기준을 내밀자 더 말하지 못했다. 재하는 자신이 배웠던 것 중 가장 쓸모 있는 기술이 의자를 추가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회의의 첫 안건은 재하가 차기 서명권자 자리를 수락할지 여부가 아니었다. 그의 수락과 거부가 어떤 계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공개하는 것이었다. 세리아는 조건부 승계, 즉 직책을 잠시 보유하되 집행권을 분리하는 방안도 심의 대상으로 넣었다. 그것이 정당한 방법인지, 누구에게 위험한지 확인하기 전에는 결정하지 않기로 했다. 기록관이 말했다. “신격의 독립성과 인간의 생활이 같은 심의 항목에 올라오는 것은 전례가 없습니다.” 미라가 조용히 답했다. “사람이 없는 신격이 무슨 소용인지 잘 모르겠군요.” “신격은 계약의 최고 판단 주체입니다.” “그 판단이 사람의 삶을 바꾼다면 사람들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 기록관은 미라의 인장을 확인했다. 신도 수 0명이라는 숫자가 떠오르자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귀하는 독립 신격의 기준을 충족하지만 영향력은 낮군요.” “그 기준이 영향력을 뜻하지 않는다니 다행입니다.” 카르도가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그가 등장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몇몇 신격은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르도는 그들에게 앉으라고 손짓하고, 마테오가 가져온 군 보급 자료를 탁자에 올렸다. 지금은 위엄을 과시할 때가 아니라 각자의 보증 능력을 확인할 때라고 했다. “지휘권은 책임을 요구한다.” 카르도가 말했다. “하지만 군에 입대한 자의 이름을 내가 소유하지는 않는다. 같은 원칙이 신앙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심의하자.” 한 신격이 손을 들었다. “그렇게 하면 신들이 사람을 보호할 유인이 사라집니다. 헌납이 없는데 무엇으로 신성을 공급합니까?” 재하는 곧장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리아넬 치료소의 실제 자료를 보여 달라고 했다. 자발적으로 모인 신앙과 강제 징수로 들어온 수익, 군 비축고에서 이전된 물량, 물리적인 수로 보강으로 아낄 수 있었던 신성 단위를 나누어 적었다. 숫자를 모두 합해도 기존 체제를 단번에 대체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니까 당장 끝내자는 말은 아닙니다.” 재하가 말했다. “비정상적인 수취는 중지하되 환자와 주민이 위험해지지 않게 전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 계획을 감독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정해야 하고요.” 점심시간이 되자 회의장 밖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한쪽에서는 무료 수프를 나눠 주고 있었고, 반대쪽에서는 담보청이 공적 질서 유지를 위한 안내문을 배부하고 있었다. 두 곳 앞에 줄이 생기자 사람들 사이에 마찰이 일어났다. 안내문을 읽는 이들을 담보청 지지자라고 오해한 사람이 있었고, 수프를 받아 든 사람을 재하의 신도라고 부른 이도 있었다. 릴리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먼저 양쪽 줄을 갈라 놓고, 누구나 수프를 먹을 수 있으며 안내문을 받아도 특정 신을 지지하는 것으로 처리되지 않는다는 표지를 붙였다. 그러고는 공적 안내문을 내는 기관과 식사를 마련한 사람의 이름을 각자 분리해 적었다. 사람들은 천천히 진정됐다. 마테오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 정도 사소한 문제도 신앙 갈등이 되는군요.” “사소하지 않아요.” 릴리가 답했다. “우리는 이미 누가 먹는 것까지 누가 믿는 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고 배웠잖아요. 사람들이 예민할 만해요.” 재하는 창밖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 신앙 체계가 신을 믿는 선택과 생필품을 받는 일을 묶어 놓은 시간이 길수록, 작은 행동에도 숨은 계약이 있을지 의심하게 된다. 실제로 그는 첫 신도가 생기기 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곁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로 릴리의 믿음을 얻었다. 하지만 그 순간을 재현해 신도를 모으려 했다면 그것 역시 다른 거래였을 것이다. 회의장 안에서도 사람들은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어느 신격은 자발적 봉헌의 세제 감면에 비슷한 혜택을 주자고 제안했고, 다른 신격은 그런 혜택 자체가 가난한 사람에게 압력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카르도는 군의 의료 보급에 쓰인 신성을 환급할 수 있는 절차를 요구했다. 미라는 환급이 실제로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확인할 기록이 먼저라고 말했다. “그럼 이 자리에서 합의할 수 있는 게 없겠군요.” 기록관이 지친 얼굴로 말했다. 세리아는 수정된 안건을 가리켰다. “우리가 합의하려는 건 최종 보상 제도가 아닙니다. 누가 심의할 수 있는지, 무엇을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게 할지, 그 경계부터 정하는 겁니다.” 우르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예전 수로 조합의 싸움을 떠올렸다. 상류 주민은 물을 먼저 쓰고 싶어 했고, 하류 주민은 피해를 먼저 걱정했다. 모두가 원하는 결과는 달라도, 수문을 열기 전에 서로에게 알리자는 규칙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큰 합의가 어려울 때 작은 절차의 합의부터 만드는 것은 그에게 낯선 일이 아니었다. 방청객들에게도 발언 시간이 돌아왔다. 헤이나는 제6지역 후손이 아니라는 이유로 누군가가 자료 접근을 거절당하는 경우에도, 학술 연구와 개인 정보 보호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자기 가족의 편지는 일부 공개하기로 했지만 다른 후손에게 같은 선택을 요구하지 않았다. 제6지역의 기록이 천계의 재산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이라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다. 회의가 다시 시작될 즈음 에반이 재하에게 속삭였다. “이제 알겠어. 사람들은 결론이 다르더라도, 자기가 어떤 말을 했는지가 정확히 남아 있으면 다시 얘기할 마음이 생기는군.” 재하가 대답했다. “그럼 잘 적어 두세요. 천계 최고 마케팅 전문가께서 발견한 사실이니까.” “놀리지 마. 내 인생에서 제일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우는 중이야.” 세리아는 에반의 말도 기록에 포함할지 물었다. 에반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잘못 설계한 제도와, 지금도 모르고 있는 부분을 함께 남기고 싶었다. 적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 누군가에게 설명서 대신 경고문 한 장은 남길 수 있을 테니까. 그때 검은 종소리가 들렸다. 서명권자가 회의장 상단의 거대한 문으로 들어왔다. 얼굴 없는 형상은 예전처럼 여러 겹의 목소리를 냈다. “공급을 걱정하는 척하며 신앙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소유권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누가 무슨 권리를 적법하게 갖는지 구분하자는 겁니다.” “그 구분은 천계가 이미 완료했다.” “그럼 원본 동의서를 보여 주세요.” 서명권자가 손을 올리자 회의장 중앙의 투표함이 잠깐 빛났다. 기록관은 봉인된 투표함이 현재 서명권자의 권한으로만 열리게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의견을 모을 수 있는지 결정하는 권한을 의견을 막고 싶은 사람이 쥐고 있었다. 에반은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저 구조, 내가 만들었어.” 많은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는 한때 설계관으로 일하던 시절, 비상 상태에서 신성 공급이 멈추지 않도록 일시적인 집행 권한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규칙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일시적이라는 단어가 빠지고 나서는 그 권한을 돌려받을 방법이 없었다.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느 신격이 물었다. “말하면 내 자리부터 없어질 것 같았으니까.” “이제 와서 고백하면 되는 겁니까?” “안 되지. 그래서 그 도장을 없애는 데 내가 필요한 서류를 내겠다는 거야.” 에반은 옛 설계의 복구 조건을 제출했다. 투표함이 봉인되어 있을 때 그 자체를 열 수 있는 예외는, 원계약 위반 가능성을 독립 신격 둘 이상과 이해관계자 다수가 공동으로 입증한 경우였다. 그의 도장이 아닌, 당시 초안의 보관 번호가 증거였다. 세리아가 자료를 확인했다. “이건 변경 전 조항입니다. 비상 보증을 영구 독점으로 바꿀 권한은 원래 없었군요.” 서명권자의 형상이 일그러졌다. “그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효력을 잃었다면 누가 정당하게 개정했는지 보여 주세요.” 회의장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졌다. 서명권자는 끝내 개정 서명자를 말하지 못했다. 대신 천장에 붉은 글씨를 띄웠다. [신앙 공급망 위험도 상승] [원계약 이의 제기 확산 시 비상 보호 권한 발동] 한순간 회의장 바닥에서 붉은 실들이 솟았다. 실은 참석자의 목을 조르지 않았다. 대신 의자와 발언대, 문서 보관함을 묶었다. 움직임을 막는 것이 아니라 결정을 막는 방식이었다. “회의장 봉쇄!” 마테오가 외쳤다. 카르도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재하는 얼른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여긴 환자 명부도 있고 보존 기록도 있어요. 전부 베면 안 됩니다.” “그럼 무엇을 베란 말이냐?” “아무것도요. 저 사람이 건드린 조항부터 확인합시다.” 릴리는 한쪽 벽에 남아 있는 작은 안내판을 가리켰다. 방청객 안전 확보를 위한 비상 출구 규정이었다. 회의장이 봉쇄돼도 사람을 밖으로 내보낼 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세리아가 조항을 읽자 비상 출구의 실 일부가 풀렸다. 그 사이 치료사와 주민들이 먼저 빠져나갔다. 모두가 탈출할 수 있었지만, 재하와 세리아, 에반, 미라, 카르도는 남아 기록을 보존했다. 누리는 종이 몸을 펼쳐 봉인된 투표함의 표면을 살폈다. 누구에게 표를 던질 수 있는지 쓰여 있지 않았다. 그저 ‘유효한 의사결정을 집행’한다고만 적혀 있었다. 미라가 말했다. “사람들에게 먼저 묻지 않는 투표함은 이미 답을 가진 기계와 같습니다.” 재하는 투표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빛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무상의 약속’은 신의 뜻을 밀어붙이는 권능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명시적 동의가 필요한 일을 대신 처리하려는 순간에만 작은 금빛 선이 생겼다. [효력 검토: 독립 의사결정권 침해] [보류 가능 범위: 투표함 개표 권한의 단독 행사] 서명권자가 외쳤다. “네 권능으로 심의를 바꾸려는가?” “아니요. 제가 마음대로 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재하가 말했다. “당신 혼자 잠그지 못하게 해 달라는 겁니다.” 금빛 선이 투표함을 가로질렀다. 잠금이 풀리지는 않았다. 다만 잠금의 소유자가 하나 더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독립 심의가 끝날 때까지 누구도 이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상태가 보전됐다. 세리아가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심의를 완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쪽이 마음대로 끝내는 것도 막았습니다.” 재하는 회의장을 둘러봤다. 반쯤 남은 참석자들은 지쳤고, 밖에서는 방청객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출입구를 확인한 뒤 물었다. “그러면 다음번 회의 때는 투표함 열쇠부터 두 개 만들죠. 아니, 열쇠 하나로 못 열게 만드는 게 맞겠네요.” 그 순간 천계의 종이 울렸다. 회의장 봉쇄가 해제되자 사람들은 출입구 앞에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한동안 바깥에 남아 있던 노아는 누나가 무사한 것을 보고 달려와 안겼다. 릴리는 동생의 어깨를 꼭 붙잡았다. 눈앞에서 계약의 세계가 흔들리는 동안에도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동생이 다시 아프지 않는 것이었다. 재하는 두 사람을 보며 회의장의 거대한 투표함을 다시 돌아봤다. 저 안에 무엇을 적어 넣든,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의 손을 붙잡아 줄 수는 없다. 결정은 도움을 주기 위한 도구여야 했다. 그 도구가 사람을 밀어내기 시작한다면, 아무리 오래된 법이라도 다시 살펴야 했다. [서명권자 승계까지 6시간] [공동심의 결론: 미확정] [긴급 승계 권한 발동 예정] 에반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야.”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38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3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