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에 온 사람 중 절반은 윤재하를 믿지 않았다.
재하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오히려 기뻤다.
“그런 표정 지으셔도 되는 겁니까?” 에반이 물었다. “홍보하는 입장에선 상당히 슬픈 상황인데.”
“제가 모자라서 그렇겠죠. 그런데 오늘은 신도 모집이 아니잖아요.”
마을 창고의 긴 탁자에는 여섯 종류의 표지가 놓여 있었다. 환자 가족, 수로 이용자, 군 경계 지역 주민, 신전 신도, 비신도, 제6지역 후손. 한 사람이 여러 표지에 해당할 수도 있었고 아무 표지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누리는 참석자에게 원하는 표지를 고르되 선택하지 않아도 발언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그 규칙은 첫 발언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저는 신을 안 믿습니다.” 수로 아래쪽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는 여자가 말했다. “그런데 신성 공급이 끊기면 제 물레방아가 멈춥니다. 회의에 끼어도 됩니까?”
“당연하죠.” 재하가 답했다.
“당연한 일인데 예전에는 왜 못 끼었을까요?”
재하는 문득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안나가 손을 들었다. “그때는 우리를 계약의 고객이 아니라 계약의 재료로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에반의 손이 조용히 멈췄다. 그가 만든 옛 홍보 문서에는 실제로 그런 단어가 있었다. 이용 인구, 기대 기도량, 향후 수익 가능 신앙. 사람의 이름은 숫자 아래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문서를 가져와 탁자에 놓았다. 변명하는 대신 사람들이 직접 읽게 했다.
“내가 만들었어.” 에반이 말했다. “당시에는 종이 위에 있는 사람이 다 실제로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안 했지.”
방앗간 여자가 물었다.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그 사람이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질문하잖아.”
“그걸로 됐다는 겁니까?”
“아니. 이제라도 장부를 다시 써야 한다는 뜻이야.”
릴리가 회의록에 그 문장을 적었다. ‘관계자들의 자유로운 의견 수집. 대표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발언이 곧 전체 주민의 동의인 것처럼 취급되지 않도록, 문서 위쪽에 커다랗게 표시했다. 다른 의견은 다른 색 줄로 구분했다. 어느 쪽 의견이 더 신성한지는 적지 않았다.
마테오는 군 경계 장치의 상황을 설명했다. 지난밤 남쪽 초소의 야간 경보 신성이 잠시 약해졌으나, 병사들이 횃불과 직접 순찰로 대신했다. 비용은 더 들었다. 훈련 시간이 늘어나 식량 소비도 커졌다. 전쟁신의 군이 얼마나 강한지보다, 그 힘을 유지하는 데 누가 땀을 흘리는지가 드러나는 설명이었다.
노인이 손을 들었다. “우리 마을 젊은이들이 군에 가서 다쳤습니다. 카르도는 치료비를 내줬습니까?”
마테오는 정면으로 답했다. “일부는 지급됐습니다. 지급되지 않은 명단도 가지고 왔습니다. 공개 범위는 유족 동의를 확인해야 합니다.”
“적어도 모르는 척은 안 하는군.”
“예전에는 많이 했습니다.” 마테오가 말했다.
누군가가 웃었지만 웃음은 금방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성실한 대답과 충분한 보상이 다른 것임을 알고 있었다. 신성을 누가 얼마나 아끼느냐보다, 사고를 냈을 때 누가 치료할 것인지가 중요했다.
회의 중간에 신앙 담보청의 참관관이 찾아왔다. 가슴에 검은 도장을 단 그는 참석자들에게 회의에서 나온 말을 천계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대표 선출 절차가 미비합니다. 이것은 신들의 행정에 관한 사안이므로 인간의 주장은 참고 자료에 불과합니다.”
재하가 참관관에게 빈 의자를 권했다. “그러면 참고 자료 작성에 참여하시죠.”
“나는 기록하러 오지 않았다.”
“그럼 방청만 하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 발언은 막지 마시고요.”
참관관이 화를 내려던 순간, 헤이나가 조용히 말했다. “내 할머니 이름이 허락 없이 수백 년간 팔렸습니다. 그 행정은 분명 신들이 했겠죠. 그러니 신들끼리만 설명할수록 우리가 더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창고 안이 조용해졌다. 참관관은 끝내 의자에 앉았다. 다만 이름표는 뒤집어 놓았다. 재하는 그것도 기록하게 했다. ‘참관인의 신분 공개 거부.’ 거부할 수 있는 권리와 그 선택 때문에 생기는 절차상의 한계를 함께 적었다.
잠깐 쉬는 시간에 헤이나는 회관의 방명록을 조용히 넘겼다. 자기 조상의 이름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사람들이 이름을 알고 싶어 하는 이유가 반드시 소유하려는 마음 때문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누군가는 잃어버린 가족을 기억하기 위해 물었고, 누군가는 자신이 물려받은 불편한 규칙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어서 물었다.
“후손의 자격을 무슨 증서 한 장으로 정하기는 어렵네요.” 헤이나가 말했다.
누리가 방명록 옆에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확인된 사실과 구술된 기억을 나누어 보존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을 다른 쪽으로 대체하지 않도록요.”
헤이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직접 확인하지 못한 할머니의 이야기에는 ‘가족 구술’이라는 표지를 붙이고, 군 기록에서 확인한 날짜에는 별도 출처를 적었다. 누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분명해지자, 그녀는 처음보다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릴리는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참석자들의 기록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하자고 제안했다. 어느 신전에서 들은 소문과 실제 겪은 일이 같은 문장으로 묶이면 다음 심리에서도 혼란을 낳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발언마다 출처를 확인하는 질문을 추가했다. 질문 때문에 시간이 더 걸렸지만, 서로의 말을 부정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줄었다.
재하는 늦은 오후의 창고를 둘러봤다. 사람들은 신을 비난하기도, 믿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이 차이를 잘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에는 소동이 났다. 에반이 후원받은 수프를 나눠 주며 ‘공짜 식사 제공’이라는 커다란 간판을 내건 것이다. 세리아가 바로 간판을 내렸다.
“공짜라니요. 누가 재료를 제공했고 누가 만들었는지 적어야 합니다.”
“이름을 적으면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잖아.”
“그렇다면 익명 기부로 기록하세요. 애매하게 숨기는 것과 원해서 비공개로 하는 건 다릅니다.”
안나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수프가 너무 짜요.”
재하는 한 숟가락을 먹고 물잔을 찾았다. 에반은 자기가 만든 게 아니라며 항의했다. 그러나 그릇 바닥에 ‘마케팅실 시식용’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참석자들은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식사 뒤에는 더욱 까다로운 논쟁이 기다렸다. 회의 결과를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자는 의견과, 서로 다른 의견을 각자 붙여 제출하자는 의견이 부딪혔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 담보청을 완전히 해체하자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치료와 수로가 먼저 안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르도의 군에 보급을 계속 의존할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다.
릴리는 칠판에 세 줄을 그었다.
‘오늘 확인된 사실.’
‘합의한 요구.’
‘의견이 다른 문제.’
“전부 같은 칸에 넣지 않으면 되잖아요.”
우르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겠군.”
이야기를 듣던 재하는 마지막 줄 아래에 한 문장을 덧붙였다. ‘아직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의 의견을 대신하지 않는다.’ 그러자 방앗간 여자가 물었다.
“신님은 어느 칸에 서는 겁니까?”
재하는 잠깐 고민했다. “전 제 잘못이 적힌 칸에도 이름을 써야죠.”
그는 자신이 제6지역의 정산 수취를 막을 때 임시 공급이 충분히 준비됐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직접 설명했다. 결과가 좋아 보여도 당시에 있었던 위험은 없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재하에게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다음번에는 어느 단계에서 무엇을 확인할지 질문했다. 재하에게는 그 편이 훨씬 고마웠다.
오후가 늦어질수록 의견은 더욱 복잡해졌다. 한 청년은 아무 신도 믿지 않지만 마을 축제에서는 신전의 음악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반대로 오래된 신도 한 명은 무료 치료를 받는 사람이 늘어나면 자기 신전의 보급이 줄어들지 걱정했다. 자발적인 믿음은 보호받아야 하지만 공공 공급에 자기 신앙이 어디까지 사용되는지도 알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재하는 두 사람을 마주 앉혔다. 서로 설득하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의 걱정을 잘못 이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청년은 축제를 좋아하는 것이 신앙 계약의 동의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신도는 자기 봉헌이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쓰일 수는 있으나, 본인에게 먼저 알리지 않고 담보로 팔리는 일은 싫다고 했다.
“저희는 생각이 완전히 다른 줄 알았는데요.” 청년이 말했다.
신도가 대답했다. “다른 건 맞지요. 하지만 남의 의사를 대신 적지 말자는 말은 같네요.”
릴리는 두 사람의 발언을 바꾸어 쓰지 않고 그대로 기록했다.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이유로 그들이 처음부터 같은 생각이었다고 지워서는 안 됐다. 누리는 발언을 요약한 문장 옆에 ‘당사자 검토 전’이라는 작은 표지를 붙였다. 대화가 끝난 뒤 두 사람이 각자의 발언을 확인하자 그 표지를 떼었다.
회의 후반에는 더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논쟁이 벌어졌다. 공개 방청 중 사람을 촬영하는 마법 기록구를 허용할 것인가였다. 담보청 참관관은 모든 발언을 정확히 남기려면 자동 기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안나는 반대했다. 방직촌 노동자 중에는 고용주에게 불이익을 받을까 봐 얼굴을 공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이 남아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해요.” 안나가 말했다. “하지만 누구한테까지 보여 줄지는 다른 문제 아닙니까?”
세리아는 발언 내용을 공개하는 것과 발언자를 특정하는 정보를 공개하는 것을 분리하자고 제안했다. 모든 기록의 원본은 독립 보관하고, 발표할 때는 당사자가 공개 범위를 고를 수 있도록 했다. 법적 책임 때문에 실명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는 사유를 설명하고 별도의 확인을 받도록 했다.
참관관은 그러면 사후 검증이 어렵다고 항의했다. 누리가 그에게 원본 대조 열람 절차를 보여 주었다. 검증 권한이 있는 사람은 공개 범위와 관계없이 조작 여부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 권한으로 얻은 개인 정보를 다른 목적으로 쓸 수는 없다는 구조였다. 참관관은 처음으로 누리를 오래 바라봤다.
“당신은 누구의 명령을 받습니까?”
누리는 잠시 생각했다. “제6지역 기록에 대해서는 공동보존 계약을 따릅니다. 이 회의에서는 참석자의 기록 동의와 보존 규칙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럼 윤재하의 부하는 아니군요.”
“아닙니다.”
재하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월급도 못 주는데요.”
에반이 수첩을 펼쳤다. “월급 얘기는 하지 마. 내가 무료로 광고하고 있다는 사실이 슬퍼진단 말이야.”
우르센이 씁쓸하게 웃었다. “제일 손해 보는 사람처럼 얘기하네. 여기 다들 공짜로 온 건데.”
참관관조차 입꼬리가 조금 움직였다. 누구도 그의 입장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는 회의가 끝난 뒤 자신의 참관 기록에 ‘주민 발언의 처리 방식에는 개선 여지가 있음’이라는 문장을 남겼다. 그것도 작은 변화였다.
회의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돌아간 뒤, 천계의 문서가 내려왔다.
[독립 의견서 37건 수신]
[서로 다른 견해 확인]
[합의율 부족]
[공동심의 개시 조건 미충족]
“합의율?” 재하가 소리쳤다. “우리가 일부러 다른 의견도 남겼잖아요!”
세리아는 문서의 하단을 살폈다. “당사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다는 조항과, 단일 합의안을 제출하라는 시행 규칙이 충돌합니다.”
“규칙 만든 사람 누구죠?”
“현 서명권자입니다.”
에반은 이마를 짚었다. “놀랍지도 않다.”
그때 누리가 한 장의 낡은 종이를 꺼냈다. 제6지역의 공동보존 기록에 붙어 있던 원계약의 부속서였다.
‘어떤 사람도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계약의 권리를 잃지 않는다.’
세리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상위 규범과 직접 충돌하네요. 정식 이의 신청이 가능합니다.”
재하는 펜을 찾았다. “좋습니다. 딱 한 줄만 적읍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 표정으로 만들지 말라고.”
그때 검은 통신판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후보 윤재하. 너희가 의견을 모으는 동안에도 시계는 흐른다.”
서명권자였다. 그는 회의록 전체를 읽지도 않은 채 선고하듯 말했다.
“서명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선택의 권리도 없다.”
재하는 회의록에 적힌 서른일곱 개의 질문을 다시 펼쳤다.
“잘못 아셨습니다. 저 사람들은 벌써 선택하고 있어요.”
제3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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