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신이 보낸 것은 목소리도, 몸도 아니었다.
윤재하 앞에 나타난 것은 아주 오래된 보존 기록이었다. 제6지역 회관에서 마지막으로 남겨 둔 공익 문서의 봉인이 열리며 낡은 원탁의 모습이 드러났다. 원탁에는 여섯 지역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누구도 신상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이게 그분인가요?” 릴리가 물었다.
누리는 동영상처럼 움직이는 잔향을 가리켰다. “정확한 표현은 당시 장면을 재생한 기록입니다. 그분의 현재 생존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임 신격이 살아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알고 싶은 답을 기록이 대신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장면 속의 신은 젊은 사람처럼 보였다. 특별히 빛나지도 않았다. 옷에는 수선한 자국이 있었고 탁자에 올린 손에는 잉크가 묻어 있었다. 재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천계에 처음 왔을 때 기대했던 위대한 신의 모습과는 멀었다.
기록 속 사람이 말했다.
‘여러분이 제게 이름을 주시려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으로 여러분을 대신해 서명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원탁 건너편의 여성이 고개를 저었다.
‘이름 없는 신은 오래 살아남기 어려울 겁니다. 신앙 계약에는 수취인이 필요하니까요.’
‘그렇겠지요.’
‘당신은 신전도 없고, 신도 숫자도 적잖아요.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합니까?’
‘제게 이름을 주는 행위와 여러분의 이름을 맡기는 행위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록은 거기서 잠깐 멈췄다. 누리가 매체의 균열을 확인했다. 마치 누군가 긴 세월 동안 이 문장을 여러 번 재생해서 종이가 닳은 것 같았다.
다시 장면이 움직였다.
‘신이 사람을 지킨다고 약속한다면, 먼저 사람이 그 신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거절당할 자리를 남겨 두겠습니다.’
재하는 자신의 첫 신도 릴리를 떠올렸다. 그때 릴리는 노아를 치료하기 위해 다른 신전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는 떠나도 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명의 신은 그 어려운 선택을 신격의 이름에까지 적용한 셈이었다.
에반이 기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삼백 년 전 그 신을 본 적이 있었다. 비슷한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자신은 신이 되려면 누군가를 소유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때 나는 이 사람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어.”
재하가 물었다. “지금도요?”
“비효율적이기는 해.”
에반은 쓰게 웃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막았어야 할 일을 그 사람이 막으려 했다는 건 알겠어.”
기록의 마지막 장에는 새로운 문장이 있었다.
‘나의 신격이 이어지더라도 신앙은 이전되지 않는다. 누군가 이 힘을 물려받는다면 소유권이 아니라 보존할 책임을 물려받는 것이다.’
재하는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자신이 신이 된 것은 우연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신격 승계 계약이 이 원칙을 유지한 이유는 분명했다. 전임자가 다음 신에게도 사람들의 믿음을 소유할 권한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전임 신격이 소멸했다고 뜬 건….”
“등록할 이름이 없어서 그렇게 처리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소멸 여부는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등록 기록의 종료만으로 실제 죽음을 단정할 수 없습니다.”
원탁의 회의 기록 뒤쪽에는 당시 지역 대표가 남긴 예산표가 들어 있었다. 기록 보관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자와 노동 시간이 아주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종이, 잉크, 돌서가를 고치는 기술자, 배수로를 정비하는 사람의 품삯. 무명의 신이 아무 대가도 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머물 곳과 식사가 제공되었고, 관리 업무에 필요한 물품이 지급됐다.
재하는 그 예산표를 보고 한동안 웃었다. “무명의 신도 밥은 먹었군요.”
누리가 답했다. “현신한 신에게도 식사는 필요할 수 있습니다. 기록을 관리하는 노동에 대가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무상의 약속이라는 이름 때문에 오해하는 사람이 있겠네요.”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지. 대가를 받지 않는다는 것과 남의 것을 공짜로 쓰지 않는다는 건 달라.”
계약서에는 이 원칙도 적혀 있었다. 기록 보관 비용은 지역의 공개된 예산으로 처리하고, 보존소를 운영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을 위해 합의한 임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관리자는 보관하는 기록을 사유 재산처럼 팔 수 없다.
릴리는 그 차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전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민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신을 믿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시간까지 신의 재산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재하는 돌아가면 신전의 운영비도 다시 정리하기로 했다. 기부는 목적과 사용 내역을 공개하고, 유급으로 맡아야 하는 일을 자원봉사라는 말로 덮지 않을 생각이었다. 돈을 쓰지 않는 것이 공정함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부담하는지 서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공정함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이 무명의 신은 도대체 어떻게 버텼을까요?” 릴리가 물었다.
에반이 기록을 가리켰다. “다른 신들처럼 거대한 신앙 수익을 받지는 못했어도, 누군가는 자발적으로 믿었을 거야. 하지만 신격을 유지할 만큼 충분했는지는 모르지.”
“그래서 소멸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재하는 아무 말 없이 회의 장면을 바라봤다. 한 명의 신이 자기 이름을 잊어 버리는 일이 위대한 희생인지 어리석은 선택인지는 아직 말할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같은 길을 걷는다면, 그 신이 겪었던 실패까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장면 속 무명의 신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원탁 건너편에 앉은 다로를 보는 동작이었다. 재하는 자기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처럼 착각할 뻔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람은 제가 오는 걸 몰랐겠죠.”
누리가 답했다. “누가 오더라도 읽을 수 있는 기록입니다. 다만 읽을 권리를 확인하는 조건이 달랐습니다.”
“그게 좋네요.”
재하에게는 위대한 운명을 부여받았다는 말보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특별히 선택된 신이 아니라, 남겨 둔 약속을 우연히 발견한 신. 그렇다면 남겨진 일을 잘할 수도, 망칠 수도 있었다. 잘못했을 때는 누군가가 막을 수도 있어야 했다.
마을 회관의 뒤편에서 금빛이 떠올랐다. 누리는 오래된 상자를 가져왔다. 안에는 아무 무늬 없는 흰 계약서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원기록 공동보존 계약]
[보존 대상: 당사자가 공개에 동의한 기록]
[무단 매각 방지 효력: 확인된 범위에 한함]
[필요 조건: 기록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관리자와, 서로 독립된 열람 증인]
재하는 설명을 읽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관리자는 제가 되면 되는데, 증인은 누가 됩니까?”
“현장에 독립된 당사자와 공적 열람 증인이 있습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그 역할에 동의할지는 각자 정해야 해요.”
릴리가 손을 들었다.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은 하겠어요.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고 쓰지는 말아 주세요.”
헤이나도 말했다. “저는 제 가족 편지와 공개 기록을 확인하는 데 동의합니다. 다른 집안 기록은 몰라요.”
에반이 물었다. “내가 증인이 되면 안 되나?”
세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원래 계약 설계에 이해관계가 있어요. 증언은 할 수 있지만 독립 증인으로 분류하기 어렵습니다.”
에반은 잠깐 투덜거리다가 곧 동의했다. “맞아. 나는 기록에 관여했으니까.”
문제는 계약서 끝의 작은 글씨였다. 공동보존 계약이 효력을 가지려면 연결된 의료 및 공공 신성 공급망의 손실을 보완하는 별도 계획이 승인되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자동 징수를 멈춘다고 해서 오래전 누군가가 빌린 의료 신성까지 한순간에 사라지게 하면 안 됐다.
재하는 머리를 감쌌다. “결국 병원 문제로 돌아오는군요.”
“그럴 줄 알았잖아.” 에반이 말했다.
재하는 계약서의 비용 항목을 따로 베꼈다. 기록을 수익으로 바꾸지 않겠다는 약속은 쉬웠지만, 그 뒤에 실제 유지비를 어떻게 댈지는 더 어려운 문제였다. 무조건 공짜로 운영하겠다고 선언하면 언젠가 누군가의 노동을 공짜로 쓰게 될 것이다.
“그럼 기록 보존소의 관리비는 누가 부담해야 하죠?”
누리는 과거 지역 대표들이 공동으로 만든 예산 체계를 보여 줬다. 비용을 내기로 선택한 사람과 해당 기록의 공공 이용 혜택을 받는 기관들이 투명하게 분담하도록 되어 있었다. 비용을 내지 않는 사람의 사적 기록도 멋대로 공개하거나 파기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
“상당히 현실적이네요.” 재하가 말했다.
“그렇지.” 에반이 답했다. “다만 이걸 바꾸면서 현금 수입이 모자라게 된 곳이 있겠지. 그래서 내가 미래 신앙을 담보로 잡는 상품을 팔았던 거야.”
“그러면 오늘 필요한 돈을 내일 생길지도 모르는 기도로 채웠다는 거네요.”
“맞아. 처음에는 임시 조달이었어. 그러다 모든 비용을 그 방식으로 덮었지.”
재하는 손가락으로 예산표를 두드렸다. 의료와 수로 같은 필수 서비스를 끊지 않으려면 그 조달 구조를 다른 방식으로 바꿔야 했다. 기존 운영자가 공개 예산을 내고, 실제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부담하거나, 공개된 후원으로 부족한 몫을 채울 수도 있었다.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미래 선택을 몰래 팔지 않는 방법을 찾는 출발점은 될 수 있었다.
세리아는 그것이 금융 설계 논쟁이 아니라 실제 시설 운영 문제라고 짚었다. 누가 내일부터 약을 받을 수 있고, 누가 보수 작업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동의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굶기거나 치료를 거절하는 방식은 대안이 아니었다.
“그럼 장부 하나를 없애는 데만도 많은 사람이 필요하네요.” 릴리가 말했다.
“장부가 사람을 대신 살게 만든 시간이 길었잖아요.” 재하가 답했다. “다시 사람이 결정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죠.”
재하는 리아넬 치료사에게 연락했다. 해당 신전은 이미 공개 심리 이후 공급 투명화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직접 진찰이 필요한 환자와 긴급 기적 대체가 가능한 환자를 구분하고, 담보청의 신성 대신 지역 후원으로 확보할 수 있는 몫을 계산 중이었다. 카르도의 병영도 우선 공급 보전 목록을 보내왔다. 군은 자기 부대의 신성 소비 일부를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제게는 이게 제일 신기해요.” 릴리가 말했다.
“뭐가요?”
“우리 신전이 힘이 없어서 아무도 못 도와줄 줄 알았는데, 다른 곳이 자기 몫을 나누겠다고 하잖아요.”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 사람들한테도 물어야겠지만요. 우리가 필요하다고 해서 자기 몫을 가져오라고 명령할 수는 없죠.”
세리아는 대체 공급 예비 계획을 정리했다. 수치만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실제로 물자를 운반할 수 있는지도 확인했다. 수로 보수는 유리포 주민들이, 임시 진료소는 리아넬의 치료사들이, 군 보급은 카르도 측이 맡기로 잠정 합의했다.
흰 계약서가 희미하게 빛났다. 마지막 한 장에는 재하가 서명할 칸이 있었다.
‘관리자는 보존 대상에 대한 신앙 수익을 청구할 수 없다.’
재하가 펜을 들었다. 그 순간 안내창이 떠올랐다.
[신격 유지 예상 수익 감소]
[무명의 신격과 동일한 소멸 위험 발생 가능]
그는 손을 멈췄다. 사람들의 믿음을 팔지 않겠다는 선택이 신에게는 오래 버틸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자신이 신이 된 첫날 전임자가 왜 소멸했는지 물었을 때 들었던 답이 떠올랐다. 신앙 포인트 장기 미달.
“그럼 또 아무도 없는 신이 되나?”
그가 혼잣말을 하자 릴리가 대답했다.
“신님, 저희가 신님을 믿는 마음은 저 계약서에 없어요.”
“알아요.”
“다른 사람이 떠날 수도 있어요.”
“그것도 알아요.”
릴리가 조심스럽게 웃었다. “그래도 누군가 남을 수도 있죠.”
재하는 천천히 펜을 들었다. 누군가 남을 수 있다는 말은, 남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 불확실성까지 지키기로 했던 것이 이 신전의 시작이었다.
재하는 펜 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전임 신격의 선택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과, 그 선택으로 신격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는 누리에게 계약의 철회 조건을 물었다.
“보존 관리 업무를 그만두려면 후임 관리자를 정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후임자도 같은 약속을 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다만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후임자로 지정할 수는 없습니다.”
재하는 그 말에 안심했다.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떠나고 싶을 때도 자기가 맡은 기록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새로운 관리자가 없으면 기록은 공공 보존 상태로 남고, 누구도 이익을 청구할 수 없다. 약속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강제로 붙잡는 규칙은 없었다.
“좋습니다.” 재하가 낮게 말했다. “내가 언젠가 그만두더라도 이 기록이 다시 팔리지 않게 만드는 데 동의합니다.”
그는 서명했다.
흰 계약서가 빛나는 순간, 마을 밖에서 검은 종소리가 울렸다.
[신앙 담보청 서명권자 도착]
[공동보존 계약 집행에 대한 긴급 이의 제기]
누리가 조용히 문 쪽을 바라봤다.
“출입 신청은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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