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권자는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문이 저절로 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재하는 제6지역 회관 문 앞에 서서 검은 빛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형상을 바라봤다.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얼굴에는 눈과 입이 없었다. 검은 서류들이 겹쳐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형상이 입을 열 때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갈라졌다.
“천계 신앙 담보청의 공적 권한에 따라 즉시 출입을 요구한다.”
재하가 문 옆의 안내판을 가리켰다.
[출입 희망자는 목적과 신분을 밝히고 기록관리자의 허가를 받을 것.]
“신분부터 말씀하시죠.”
“서명권자.”
“이름이요.”
“그것이 직책이다.”
“직책 말고 이름은요?”
검은 형상은 잠시 멈췄다.
“알 권한이 없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들어올 권한도 확인할 수 없네요.”
에반이 뒤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이 장면이 우스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웃지 못했다. 삼백 년 전 자신이 일하던 기관의 최고 책임자는 늘 ‘서명권자’라는 직책으로만 불렸다. 누군가가 실제로 그 직책을 맡았는지, 아니면 권한을 가진 계약서가 사람을 대신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세리아는 정식 감찰관 인장을 내밀었다. “공개 심리 결정에 따라 포괄 연대보증의 집행은 정지돼 있습니다. 제6지역 기록의 소유권이 확인되기 전에 임의의 회수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제6지역은 공식 관할 지역이 아니다.”
“그렇게 만든 변경 기록이 지금 감사 대상입니다.”
“관할 지역이 아니므로 감사할 수 없다.”
재하가 한숨을 쉬었다. “지워 놨으니까 조사할 수 없다는 거군요. 아주 편리한 제도네요.”
검은 형상의 손이 올라갔다. 회관 중앙의 정산 장치가 강하게 떨렸다. 사람들이 앉았던 의자의 다리가 진동했고, 유리판 속 오래된 잔향이 빠르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서로 겹쳤다. 빵을 나누는 약속, 겨울 장작을 가져오겠다는 말, 돌아올 사람을 기다리겠다는 편지.
[강제 정산 실행]
[제6지역 예정 수익: 18,003단위]
[연결된 다섯 지역 공급 안정성: 위험]
릴리가 회관 한쪽에 쌓아 둔 사람들의 회의록을 끌어안았다. “저 장치를 멈추면 진료소가 위험해지나요?”
“아직 대체 계획이 완전히 승인되지 않았어요.” 세리아가 답했다. “다만 원본에 손을 대지 않고 수취 절차만 중단하도록 신청했습니다.”
검은 형상은 비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수익이 없다면 기적을 공급할 재원이 없다. 너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재하의 손이 떨렸다. 그것이 가장 두려운 비난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다가 정말 누군가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다쳤다는 사실을 평생 잊지 못할 터였다.
그때 통신판이 울렸다. 유리포의 우르센이 보낸 문서였다.
[수로 보호 대체 작업: 임시 수문 보강 완료]
[대체 가능한 신성 소비: 기존 대비 12%]
곧이어 리아넬 신전의 치료사가 보낸 문서가 도착했다.
[긴급 환자 목록: 보호]
[기존 공급 대체 가능 범위: 일부 확보]
[중증 치료는 지속 공급 필요]
카르도의 제17보급대에서도 서류가 왔다.
[군 경계 신성 소비 조정 승인]
[절감분의 민간 긴급 공급 전환 가능]
“전부 준비됐다는 뜻은 아니군요.” 재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한 번에 끊으면 위험합니다. 단계적으로 보전하면서 정산을 중단해야 해요.”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답답할수록 가능한 일과 아직 불가능한 일을 분리해야 했다. 어려운 일을 쉽게 보이게 하는 신이 아니라, 어려운 대로 설명하는 신이 되고 싶었다.
“그럼 일단 새로운 수익 수취만 멈춥시다. 기존의 긴급 공급은 임시로 유지하고, 대체할 때마다 연결선을 하나씩 분리하는 겁니다.”
세리아가 신속하게 문서를 작성했다. “제6지역 공익 기록에 대한 신규 담보 설정 보전 신청. 임시 진료 및 수로 지원 공급 유지. 무단 정산 중단. 이 조건으로 신청합니다.”
검은 형상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신청을 누가 승인하는가?”
“제가 승인할 수 없는 부분은 독립 판정관에게 긴급 심리를 요청하겠습니다.”
“그동안 이곳은 정산된다.”
재하가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이미 한 가지는 확인됐잖아요. 우리가 여기에 들어왔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어요. 방문자들이 아무것도 서명하지 않았어도 징수한다고. 알고 보니 원문과 다른 조항이었죠.”
에반이 작성한 변경 기록을 들어 보였다. 원문에는 실제 서명 확인이 필요하다고 되어 있었다. 서명권자가 바꾼 조항은, 확인할 수 없으면 동의했다고 간주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신은 이 사람들의 이름을 모르고, 어떤 목적으로 남긴 기록인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그 기록을 팔 수 있다고 말하죠.”
“관리상 필요한 대리 권한이다.”
“그럼 대리 권한을 준 당사자의 서명을 보여 주세요.”
검은 형상은 답하지 못했다. 재하는 누리에게 부탁해 여섯 지역 원계약을 펼쳤다. 신앙은 자유로운 의사에서 시작하며, 타인의 동의 없이 소유권을 이전할 수 없다는 문장이 회관 안에 나타났다.
검은 형상이 손을 내저었다. “과거의 계약보다 현행 규정이 우선이다.”
세리아가 곧바로 반박했다. “현행 규정이 정당하게 제정되었는지를 지금 조사하고 있습니다. 원계약을 무효화한 승인자가 스스로 그 계약의 권한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에반은 그 옆에 섰다. “현행 규정을 만드는 과정에 내가 관여했어. 원래 계약에서 무엇을 뺐는지 증언할 수 있어.”
“배신자.”
“그 말은 내가 들을 자격이 있지.” 에반이 말했다. “하지만 네가 나한테 화내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기록은 여전히 남의 거야.”
릴리는 회의록을 펼쳤다. 참석자들은 열람에는 동의했지만 판매에는 동의하지 않았고, 기록 보전 방식은 추가로 논의하기로 했다. 헤이나는 자기 가족 편지를 공개할 범위를 제한했다. 누리는 우편관리자로서 각 문서의 권한 상태를 확인했다.
“모두 같은 의견인 건 아닙니다.” 릴리가 말했다. “그래서 더욱 한 사람이 전부 대신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회관에 울렸다. 처음 신전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던 소녀가 이제 오래전에 남긴 이름들의 권리를 설명하고 있었다.
검은 형상은 마지막 수단을 꺼냈다. 회관 장치의 바닥에서 붉은 줄기가 튀어나와 원본 기록을 향해 뻗었다. 수익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 기록 자체를 압류하겠다는 뜻이었다.
“누리!” 재하가 외쳤다.
“기록 보전 권한 실행.” 누리가 답했다.
종이 인형의 몸이 커다란 장부처럼 펼쳐졌다. 원본 기록 주위로 종이벽이 생겼다. 검은 줄기는 한 장 한 장을 뚫으려다 멈췄다.
[원본 기록 무단 이전 금지]
[임시 보전 절차 개시]
재하는 손을 내밀었다. 제6지역에서는 한동안 신격을 조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리는 그가 방금 서명한 흰 계약서를 보여 주었다. 계약서는 신의 권위를 증명하는 문서가 아니라, 관리자가 누구의 소유물도 되지 않겠다고 적은 약속이었다.
“무상의 약속.”
재하는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는 금빛이 폭발하지 않았다. 강력한 기적 하나로 회관을 정리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무단으로 수취하려던 검은 줄기 위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균열은 릴리의 독립 증언과 세리아의 보전 명령, 에반의 원문 기록과 누리의 관리 규칙이 만나는 부분에서만 이어졌다.
[조건 확인: 당사자 동의 부재]
[효력 범위: 입증된 문서와 신규 수취 행위]
[무단 신앙 수취 집행 정지]
검은 줄기가 끊겼다. 회관의 잔향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이 빵을 나누던 장면은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그 장면이 숫자로 변환되는 창만 검게 닫혔다.
“전부 해결된 건 아닙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과거에 이미 팔린 기록과 공급 계약은 별도 심리가 필요해요.”
“압니다.” 재하가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새로 훔쳐 가는 것만 막은 거죠.”
검은 형상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너희는 천계의 신성 공급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아마 그렇겠죠.”
“그 대가는 반드시 치를 것이다.”
재하는 형상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그 전에 출입 신청서부터 쓰세요. 다음에는 이러지 마시고.”
에반이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이 풀리면서 릴리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세리아만 웃지 않고 퇴장 시각을 기록했다.
검은 형상이 물러난 뒤에도 회관에서는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검은 장치가 멈췄다는 사실보다, 그 장치가 멈췄는데도 잔향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사람들의 오래된 목소리는 여전히 들렸고, 수차는 천천히 돌았다. 다만 어느 장부에도 새로운 수익 숫자가 적히지 않았다.
릴리는 가장 먼저 회관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마테오에게 보낸 통신에서 연결된 의료와 수로 시설의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뒤 카르도 측 보급대와 리아넬 치료소가 각각 응답했다. 긴급 공급이 전부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몇몇 설비의 공급 여유는 줄어들었다.
“그럼 우리도 그곳으로 가야겠어요.” 릴리가 말했다.
“네. 회관의 기록을 지키는 일은 시작했으니까, 이제 실제 환자들이 괜찮은지 확인해야죠.” 재하가 답했다.
세리아는 판정관에게 이번 사건의 전 과정을 긴급 보고했다. 신청자가 있었던 최초 출입 기록부터, 방문자 징수 시도, 원문과 다른 규정, 주민 후손들의 공개 열람회, 흰 공동보존 계약서, 마지막 현장 조치까지. 결론에 유리하지 않은 사실도 빠뜨리지 않았다. 일부 시설의 공급 안정성이 위험해졌다는 점 역시 기록했다.
“이 부분을 빼면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에반이 물었다.
“빼면 다음에 다른 사람이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됩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문제가 생긴 사실이 남아야 대체 공급도 준비할 수 있어요.”
에반은 세리아의 보고서를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담보청에 있을 때는 위험을 숫자 밖으로 밀어 내는 사람이 유능하다고 했는데.”
“지금은 위험을 보이게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재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지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신이지만, 오늘도 다른 사람들의 서류와 공사 계획 덕분에 간신히 하루를 넘겼다. 거대한 금빛이 터지는 기적은 없었다. 그래도 오늘의 회관은 어제보다 조금 안전했다.
누리는 회관을 떠나기 전 문패를 닦았다. 이름 없는 마을이라고 적힌 돌비석은 그대로 두었다. 나중에 실제 이름을 확인할 때까지 누군가 멋대로 새 이름을 붙이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방문자 출입 기록 끝에 아주 짧은 문장을 남겼다.
‘이번 방문에서 새로운 소유자는 생기지 않았다.’
재하가 그 문장을 읽고 웃었다.
“그게 제일 마음에 드네요.”
그날 밤, 재하는 신전으로 돌아와 오래간만에 자신의 신도 수를 확인했다. 숫자는 남아 있었다. 계약으로 묶인 신도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멀리 떠난 사람의 이름은 여전히 명부에서 빠져 있었다. 그걸 보며 재하는 오히려 안심했다.
새로운 안내창이 떠올랐다.
[제6지역 신규 신앙 담보 수취 일시 정지]
[원본 공동보존 기록: 긴급 보호]
[기존 의료 및 공공 공급: 임시 유지]
[신격 윤재하: 원계약 독립 조사 관련자로 추가 지정]
“이번에는 소멸 통지서가 안 오네요.”
“지금 당장은.” 에반이 답했다.
재하는 웃다가 마지막 알림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서명권자의 직책 승계 준비 시작]
[후보 신격 자동 조회 중]
[첫 번째 후보: 윤재하]
“잠깐.”
그가 다시 읽었다.
“저 사람 자리를 왜 제가 이어받습니까?”
누리가 조용히 대답했다.
“원계약을 소유하지 않겠다고 서명한 신만이, 그 계약을 집행할 권한을 갖는다는 조항 때문입니다.”
재하는 이마를 짚었다. 신도가 한 명도 없어서 소멸 직전이던 신이, 이제는 천계의 모든 신앙 계약에 서명할 후보가 됐다.
그리고 그 자리를 얻는 순간, 자신이 지키려 했던 약속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에반은 안내창의 맨 아래에 적힌 작은 문구를 확대했다.
[후보 지정은 직책 수락을 의미하지 않음]
[수락 시 원계약 전체를 관리하는 집행 권한 발생]
[거부 시 차순위 후보 심사]
“일단 강제로 된 건 아니네.” 에반이 말했다. “하지만 저 자리에 앉으라는 제안 자체가 위험해. 서명권자는 네게 다른 사람들 계약을 관리한다는 명분을 줄 테니까.”
“받아서 전부 없애면 안 됩니까?” 릴리가 물었다.
세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전부 없애면 정당하게 자발적으로 맺은 계약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집행 권한을 누가 감시할지 정하지 않는다면, 그 권한을 가진 사람이 다음 서명권자가 될 수도 있어요.”
재하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마을에는 사람이 살아 있지 않아도 누군가가 이름을 지키기 위해 남긴 기록이 있었다. 그 기록을 되찾기 위해 왔는데, 이제는 천계가 자신에게 모든 사람의 이름을 관리하라고 제안하고 있었다.
“권력을 주면 좋은 일에 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에반이 답했다. “권력이 좋은 사람에게 가도, 그 사람이 언제나 옳다는 보장은 없어.”
재하는 잠시 생각했다. 이 자리를 거절할 것인지, 아예 받아서 권한 자체를 나눠 버릴 방법을 찾을 것인지 아직 결정할 수 없었다. 우선 직책을 거절해도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지, 차순위 후보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봐야 했다.
“한 번에 결정하지 맙시다. 중요한 건 제가 신이라서 특별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무 신도 모든 사람의 이름을 마음대로 쓸 수 없어야 한다는 거잖아요.”
세리아가 대답했다. “그 점부터 조사하겠습니다.”
“그거 거절하는 방법부터 찾아 주세요.”
먼 천계에서 새로운 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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