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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26화
PAYLUA ORIGINAL · 제26화

26화. 악마가 두 번째로 서명하는 날

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106자

오프라인 책장
에반은 오래전 자기 서명을 본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신앙 담보청 선임 보증설계관이 됐을 때였다. 그 서명을 한 뒤 급여가 올랐고, 정장과 값비싼 만년필이 생겼다. 다른 한 번은 제6지역의 원기록을 보존한다는 계약에 보증인으로 서명했을 때였다. 그때는 첫 번째 서명과 같은 손으로 글자를 썼으면서도 결과가 같을 거라고 믿었다. 북문 밖 숲에 숨겨진 중간 초소의 장부를 찾고 나서야, 그는 그 믿음이 얼마나 편리한 착각이었는지 알았다. “이건 누가 열람할 수 있습니까?” 세리아가 물었다. 숲에서 발견한 것은 건물이 아니었다. 나무뿌리에 묻힌 금속 상자 하나였다. 상자에는 보급대 인장과 담보청의 검은 인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원래 군 서류를 담는 상자였지만 그 위에 다른 기관의 봉인이 덧씌워진 것이었다. 누리는 상자를 보며 말했다. “군 출입 기록은 카르도의 보급대가, 신앙 관련 변경 기록은 원 보증설계관이 열람할 수 있습니다.” “그럼 두 사람이 같이 열어야겠네요.” 재하가 말했다. 마테오는 다리 밖에서 보급대 명령서를 보내왔다. 상자를 물리적으로 가져오지 않아도 통신 인장으로 군 보존 기록을 열람하도록 허가해 준 것이다. 에반은 자신의 오래된 명함을 꺼냈다. 불에 타지 않았던 검은 카드가 손끝에서 미세하게 진동했다. “여기서 열면 내가 한 일도 같이 나와.” “이젠 피하지 않겠다면서요.” 재하가 말했다. “피하지 않을 거야. 다만 함께 봐 주면 좋겠어.” 에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작았다. 재하는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의 인장이 동시에 반짝였다. 상자가 열리며 지도가 펼쳐졌다. 원래는 제6지역 피난민을 인도하는 노선도였다. 하지만 그 아래 별도로 붙은 장부에는 전혀 다른 항목이 있었다. [이탈자 예상 신앙 수익] [복귀 불확실 인원 보증 적립] [신성 공급 위험 상쇄 준비금] “이게 사람을 세는 방식입니까?” 릴리가 물었다. “내가 만든 방식이야.” 에반이 말했다.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 서명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담보청은 예측 가능한 신앙을 담보로 삼았고, 예측할 수 없는 신앙에는 위험 보증을 매겼다. 길에서 누가 죽거나 사라지면 예상치가 틀릴 수 있으니 위험 준비금을 쌓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문제는 그 위험 준비금이 빚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이었다. 재하가 물었다.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데 왜 빚이 늘어요?” “담보청이 받을 돈을 못 받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건 사람의 빚이 아니라 담보청의 위험 아닌가요?” “맞아.” 에반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을 나는 그때 하지 않았어. 오히려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도록 항목을 나눴지. ‘복귀 불확실 인원 보증’이라고 쓰면 누구나 필요한 보험인 줄 알았거든.” 세리아는 그를 가만히 지켜봤다. “제17보급대는 피난민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대로라면, 담보청은 피난민의 행방을 모를수록 수익이 커지도록 설계했군요.” “그래. 그러니 미도착 인원 기록을 찾을 이유가 없었지.” 헤이나가 상자 안의 숫자를 보았다. 34라는 숫자가 검은 테두리 안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두 번 세었다. 어릴 적 할머니에게 들었던 ‘돌아오지 못한 서른네 사람’이라는 말과 같았다. “우리 가족이 이 숫자 안에 들어 있었을 수도 있나요?”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에반이 말했다. “하지만 어떤 이름이 포함됐는지는 이 자료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재하는 에반에게 더 물으려다 멈췄다. 에반이 먼저 사과를 말하도록 몰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해야 할 책임은 분명히 해야 했다. “이 명단으로 포인트를 얼마나 받았습니까?” “개인적으로 받은 보수는 기록에 남아 있을 거야. 기본급 외에 위험 보증 상품 판매 성과 수당이었어.” “그 돈이 아직 있나요?” 에반이 웃지 못했다. “남아 있지는 않아. 하지만 갚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 세리아는 그를 향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자발적 증언만으로 면책하지 않습니다. 지급 내역을 대조하고 피해자 측이 요청할 수 있는 반환 절차를 열어야 합니다.” “그래.” “신앙 보증의 혜택을 받은 신전도 조사 대상에 넣겠습니다. 개인 한 명의 잘못으로 끝내면 구조는 그대로일 겁니다.” 에반이 처음으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고맙다. 그 말은 듣고 싶었어.” 장부의 뒤쪽에는 낡은 지급 영수증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담당자는 모두 이름 대신 직함으로 적혀 있었다. 위험 보증 상품의 인센티브는 설계관 사무실로, 운영 수수료는 담보청 본부로, 현장 징수 수당은 마을 출입 감시소로 나뉘어 있었다. 에반에게는 그중 설계관 성과 수당이 돌아갔다. “분배 표만 봐도 누가 어디에서 이득을 얻었는지 보이네요.” 세리아가 말했다. 재하가 물었다. “그 돈을 돌려준다고 하면 피해가 회복됩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받은 돈의 흐름을 확인하고, 부당 수익 환수와 함께 기록 정정, 당시 선택을 제한한 조항의 효력도 따져야 합니다.” 에반은 종이를 만졌다. “당시에 내가 받은 돈은 모두 썼어. 다른 곳에서 갚더라도 원래 받은 그 동전은 아니겠지.” “돈은 그 자체로 기억이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그러나 기록과 책임은 남습니다. 반환할 수 있는 몫과 불가능한 부분을 구분하면 됩니다.” 헤이나가 영수증을 들여다봤다. “저희에게 직접 갚는 방식으로 끝내진 마세요. 제 가족이 얼마나 피해를 봤는지도 모르는데, 제가 다른 사람들의 몫까지 받겠다고 할 수는 없어요.”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 당사자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돈을 보전해 두는 방법을 찾아보죠. 전부 공탁하자는 말도 아직은 못 하겠네요. 받을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니까.” 에반은 헤이나를 바라봤다. “그렇게까지 해도 날 용서할 필요는 없어.” “용서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헤이나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려고 왔어요.” 에반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는 무릎에 올린 손을 잠시 움켜쥐었다. 누군가 자신을 단번에 용서해 줬다면 도리어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헤이나의 말은 일을 끝내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설명을 다하고, 설명이 끝난 뒤에도 남아 있는 피해를 마주 보게 했다. 재하는 그런 에반에게 물을 건넸다. “처음부터 솔직히 말했더라면 쉬웠을 텐데요.” “네가 나를 쫓아낼 것 같았어.” “쫓아낼 수도 있었죠.” “지금은?” “오늘 조사 끝날 때까지는 당신이 꼭 필요해요. 그다음도 같이 일할 수 있을지는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봐야겠죠.” 에반이 씁쓸하게 웃었다. “말이 너무 냉정하다.” “계약은 자유롭게, 책임은 정확하게. 당신이 가르쳐 준 말이에요.” 에반은 잠깐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재하가 기억한다는 사실이 이상할 만큼 위안이 됐다. 더 이상 모든 잘못을 농담 하나로 넘어갈 수는 없었지만, 농담을 완전히 잃을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상자 안쪽에는 다른 봉투도 있었다. 에반에게 보내진 것이었다. 수취 날짜는 삼백 년 전인데 개봉되지는 않았다. 누리는 봉투의 보존 상태를 확인하고 수취인 본인에게 건넸다. 에반은 혼자 열었다. 종이에는 두 문장이 적혀 있었다. ‘보증설계관 에반에게. 당신이 만든 숫자는 결국 사람의 이름을 대신할 수 없다.’ ‘언젠가 돌아와 기록을 고치고 싶다면, 이름을 지운 손이 아니라 이름을 되찾는 손으로 서명하라.’ 발신자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에반은 문장을 알아봤다. “무명의 신이 썼어.” 재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분이 당신한테 기회를 준 겁니까?” “기회라기보다 숙제겠지. 내가 삼백 년 동안 제출하지 않은.” 마테오가 보내 준 장부에는 별도의 이의 신청란이 있었다. 현장에서 지원을 받은 사람이 지원 자체를 부정하지 않더라도, 그 지원을 빌미로 새 의무를 붙이는 것을 거절할 수 있다는 문구였다. 누가 나중에 지웠는지 모를 만큼 옅은 글씨였다. 에반은 그 문구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옛 군단장은 나보다 이게 먼저 보였겠지.” “처음부터 알았어도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있었겠죠.” 재하가 말했다. “그렇지. 그래서 더 변명할 게 없어.” 에반은 필기구를 꺼냈다가 망설였다. 자신의 진술이 공개되면 돈을 돌려주는 일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담보청에서 벌어질 조사도, 과거 동료들의 원망도 피할 수 없었다. 설계자로서 자신의 이름이 기록에 남는 것을 막을 방법도 없었다. 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록을 고친다는 게 이름을 지우는 일은 아니잖아요.” “나 같은 이름은 지워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누가 했는지 모르게 되죠. 다른 사람이 똑같이 하면 또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할지 모를 거예요.”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죄책감을 덜기 위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은 책임을 대신 질 사람이 없어지는 것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세리아는 장부 옆에 빈 칸을 하나 그었다. “잘못된 조항, 그 조항으로 이익을 얻은 사람, 실제 피해를 입은 사람의 범위를 나누어 적겠습니다. 적은 뒤에 모르는 부분은 빈칸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재하는 세리아가 그어 놓은 빈칸을 바라봤다. 이 빈칸은 누군가를 숨기는 자리가 아니라, 아직 확인하지 못한 사람을 함부로 대신 쓰지 않겠다는 자리였다. 에반은 새 장부를 꺼냈다. 지금까지 기계적으로 처리되던 피난민 34명의 항목을 다시 조사하겠다는 요청서였다. 원래 계약의 변경 이력을 모두 공개하고, 자신의 보수 내역까지 감사에 제출하겠다고 적었다. “서명하면 담보청이 네 옛 직원 권한도 끊을 거야.” 재하가 말했다. “알아.” “그러면 앞으로 조사가 어려워질 텐데.” “그래도 누군가는 내 이름을 걸어야 하잖아.” 에반이 서명했다. [원 보증설계관 책임 인정 진술 접수] [증거 위·변조 금지 및 기록 보전 의무 발생] [담보청 내부 열람 권한 정지 심사 개시] “두 번째 서명이네요.” 릴리가 말했다. “두 번째가 첫 번째를 없애 주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건 처음부터 읽고 결정한 서명이잖아요.” 그 말에 에반은 처음으로 아주 작게 웃었다. 오후에는 마테오에게서 새로운 질문이 들어왔다. 군단이 보관한 물자는 당시의 피난민들을 위해 지급된 것이 맞지만, 일부 물자의 비용은 나중에 신앙 보증으로 정산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마테오는 그중 실제로 피난민을 도운 부분과, 피난민에게 알리지 않고 청구한 부분을 구분해 달라고 했다. “군인도 같은 질문을 하는군요.” 릴리가 말했다. “군인은 명령을 수행하지만, 누구의 돈으로 수행한 명령인지 모를 수 있죠.” 세리아가 답했다. 그들은 창고의 식량 지급표를 먼저 복사했다. 곡식을 나눈 사람, 받은 사람의 수, 물자를 운반한 수레의 개수. 그 기록만으로 지원을 받은 주민이 나중에 자기 신앙까지 담보로 넘겼다고 볼 수는 없었다. 재하는 마테오에게 그 차이를 설명하는 답장을 썼다. 에반은 편지를 옆에서 읽었다. “카르도는 우리가 자기 군대를 공격하려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죠. 그렇다고 사실을 숨길 수는 없잖아요.” “네가 점점 무서워져.” “이 정도 공문으로 무서워하면 전쟁신은 어떻게 합니까?” “카르도는 적어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는 할 거야. 지금까지는.” 에반은 마지막 문장을 끝내지 않았다. 그는 마테오의 편지에 정식으로 답신 서명을 남겼다. 자기 과거 업무가 포함된 기록일수록 더욱 공개 가능한 부분과 보호해야 할 부분을 구분하겠다고 적었다. 과거의 잘못을 보여 준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비공개 기록까지 마구 넘기지는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날 밤, 상자의 맨 아래에서 보급대가 남긴 마지막 현장 보고가 발견됐다. 군단장이 직접 쓴 기록이었다. ‘피난민 117명 중 83명 동쪽으로 인도. 나머지 34명은 숲속 갈림길에서 서쪽으로 이동함. 지도에는 없는 길이며, 안내자는 마을 회관의 기록관리자 다로였음.’ 세리아가 입을 열었다. “34명은 죽거나 실종된 것으로 확인된 게 아니군요.” “서쪽으로 걸어갔네요.” 재하가 말했다. 누리는 표정 없이 상자 밖을 바라봤다. 숲 너머에서 아주 늦게 도착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도착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도착했어도 장부에 올라가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에반은 마지막 줄을 읽었다. ‘서쪽 갈림길의 통행 증표: 무명의 신이 건넨 첫 번째 열쇠.’ 그리고 눈앞에 새로운 알림이 떠올랐다. [제6지역 북문 서측: 보관된 통행 기록이 깨어납니다.] [첫 번째 열쇠가 확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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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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