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하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소리 내어 세 번 외쳤다.
“윤재하. 윤재하. 윤재하.”
검은 고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반이 눈을 반쯤 감았다. “그렇게 해서 되면 천계 공무원 전부 목이 쉬었겠지.”
“그럼 아까부터 말리든가요!”
릴리는 검은 고리를 잡아당기지 않았다. 고리가 발목을 죄면 피부에 자국이 남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먼저 다른 사람들이 서 있는 위치를 살폈다. 네 사람 모두 마을 회관 안에 있었지만, 서로에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는 남겨 두고 있었다.
“우리 이름을 적으면 풀리나요?”
“안 됩니다.” 세리아가 짧게 말했다. “기록에 올려 달라는 건 저쪽이 원하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직접 발설한 이름을 입장 계약으로 처리하면 돌이킬 수 없을 수 있어요.”
재하는 눈앞의 작은 검은 창을 읽었다.
[미수취 신앙 대체 징수]
[대상: 임시 방문자]
[동의: 관할 규정 제14조에 의하여 간주]
“역시 동의를 해 줬다고 치네요.”
에반이 혀를 찼다. “원래 대리 동의가 그런 식이야. 거절할 수 없으면 누군가 대신 허락했다고 써 놓지.”
누리는 고리에 닿지 않았다. 종이 인형은 네 사람 사이를 자유롭게 걸어 다녔다. 그는 장치 위에 올라가 서류철을 꺼냈다.
“마을 방문 규칙은 별도로 존재합니다. 이 장치가 적용한 제14조는 현재의 주민이 마을 공용 자원을 독점하려 할 때 사용하던 규정입니다.”
“그러면 방문자한테는 적용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재하가 물었다.
“맞습니다. 다만 정산 장치는 등록되지 않은 방문자를 주민으로 자동 분류하도록 개조되었습니다.”
세리아가 얼굴을 굳혔다. “그 조항을 수정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까?”
누리는 망설이지 않았다.
“최초 설계 변경 신청자는 에반입니다. 최종 적용 승인자는 서명권자입니다.”
에반의 눈꺼풀이 떨렸다. 재하는 그를 돌아봤다. 도망치지 말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에반도 발목에 고리가 걸린 상태였다.
“설계했을 때부터 방문자를 잡으려고 만든 겁니까?”
“아니.” 에반이 한참 후에 대답했다. “당시는 군량 창고에 기도를 저당 잡고도 도망가는 업자들이 있었어. 채무를 미납한 사람이 남의 지역에 들어가면 등록 기록을 연결하는 기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 마을은 아무도 계약하지 않았어.”
“원래 목적이 뭔지는 들었어요. 지금 뭘 할 수 있죠?”
에반은 마른침을 삼켰다. “변경 이력 열람 요청. 그것만이 여기서 대리 추정을 깨는 방법일 거야. 지금 장치는 네 이름을 몰라도 내가 설계자라는 건 알거든.”
고리는 단순히 사람을 붙잡는 물건이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살피니 발목의 검은 선 안쪽에 작은 숫자가 흐르고 있었다. 숫자는 남아 있는 신앙 포인트가 아니라, 앞으로 받겠다고 주장하는 양이었다. 움직이려고 할수록 숫자가 올라갔다.
재하는 다리를 들다 말고 웃지도 못했다. “이거 움직일 때마다 이자가 붙는 겁니까?”
에반은 숫자를 들여다봤다. “정확히는 위험 가중치야. 징수를 피해 이동하려 했다고 추정하는 거지.”
“마음대로 묶어 놓고 움직였다고 벌금을 내라니.”
릴리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안 움직여도 되죠? 지금은 신님을 옮겨 줄 사람이 없어요.”
“네. 우선 모두 제자리에 있어요.”
그 말에는 일행도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할 때 영웅처럼 뛰어드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선택이었다. 움직이지 않기로 하는 쪽이 더 어려웠다. 네 사람은 고리가 피부를 파고들지 않도록 신발끈을 풀고 자세를 조정했다. 세리아는 한 사람씩 상태를 물어 적었다.
“압박 통증이 있는 사람?”
릴리가 손을 들었다. 세리아는 자기 발목의 선을 살펴보더니, 누리에게 응급 상황에 필요한 기록 보전 예외를 문의했다. 누리는 공익 관리 문서에 생명 또는 신체 손상이 예견될 경우 최소한의 구조 행위는 허용된다고 읽었다. 그 규칙을 근거로 릴리에게 천을 덧댈 수 있었다.
“마을 자체는 사람을 다치게 하려는 곳이 아닌 것 같아요.” 릴리가 말했다.
“마을의 규칙이 아니라 나중에 붙은 장치가 문제라는 거지.” 재하가 답했다.
에반은 바닥의 숫자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예전에는 피해 발생 가능성을 금액으로 먼저 계산했어. 지금 발목이 아픈 사람을 보고 있는데도 숫자부터 읽을 뻔했네.”
재하는 그를 돌아봤다. “그러지 마세요. 지금 필요한 건 고리를 푸는 방법이에요.”
“그래. 알았어.”
“그걸 쓰세요.”
“쓰면 내 책임도 전부 드러나.”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요.”
“그건 그렇네.”
에반은 고리 위로 몸을 굽혀 장치에 손바닥을 댔다. 금속 위에 검은 네모가 떠올랐다. 그는 악마의 글자로 짧은 문장을 적었다. 재하는 읽을 수 없었지만 세리아의 얼굴이 미세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설계 변경 이력 열람]
[신청자: 에반]
[원문: 계약 당사자의 실제 서명 또는 계약번호 일치 기록을 확인해야 한다.]
[현행문: 계약 당사자를 확인할 수 없을 경우 자동으로 채무 관계를 인정한다.]
둘은 비슷해 보였지만 정반대였다. 이름이 없을 때 확인하라는 규칙이, 이름이 없으면 빚을 인정한다는 규칙으로 바뀌었다.
“이 수정은 누가 승인했지?” 에반이 물었다.
[승인자: 서명권자]
[승인 날짜: 제6지역 폐쇄 다음 날]
릴리가 고개를 들었다. “마을이 비어 버린 다음 날이라는 거죠?”
“그래.” 에반이 답했다. “반대할 사람이 없어지자 규칙을 바꾼 거야.”
재하는 검은 고리의 위치를 다시 살폈다. 장치는 네 사람의 이름을 등록하지 못하면서도 네 사람의 동의를 간주했다.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졌다.
검은 장치에는 작은 검사창이 붙어 있었다. 에반은 그 창에서 방금 제출한 변경 이력을 복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원본은 어디까지나 담보청의 소유라는 문구가 떴다. 세리아는 장치에 기록 열람 요청을 따로 제출했다. 자료를 보는 권리와 가져가는 권리는 달랐기 때문이다.
“절차가 너무 많아요.” 재하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대조하지 않으면 나중에 누가 무엇을 바꿨는지 입증할 수 없습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에반이 곁에서 말했다. “나도 천계에서 일할 때 그걸 제일 잘 이용했어. 문서를 얻으려면 다른 문서가 필요하도록 만드는 거.”
“정말 할 말이 없게 만드네요.”
“그래서 이제 열람 기록부터 남기려고.”
누리는 현장 기록의 원문을 봉인한 채 비교 가능한 대조표를 만들었다. 검은 장치의 현행문과 원래 문장이 한 장에 나타났다. 원문에는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던 조건이 개정문에서는 확인할 필요가 없는 조건으로 뒤집힌 곳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이게 일반 사람도 읽을 수 있을까요?” 릴리가 물었다.
“서류 용어를 설명하는 표도 같이 만들겠습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이기는 데 필요한 증거이기 전에, 누가 무슨 일에 서명하도록 요구받았는지 알리는 자료여야 했다.
“우리가 여기 들어온 건 누가 허락했죠?”
누리가 손을 들었다. “보존소의 현행 관리 규칙에 따랐습니다.”
“입장 신청서에는 신앙을 바치겠다고 적었나요?”
“없습니다.”
“그럼 입장 기록과 대체 징수 기록을 나란히 보여 주세요.”
누리는 즉시 두 문서를 펼쳤다. 하나는 마을의 낡은 주민 규약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은 장치가 새로 만든 정산 장부였다. 서로 다른 작성자가 같은 장을 사용하고 있었다. 재하는 에반에게 말했다.
“신성 포인트도 없고 권능도 안 되면 우리한테 남은 건 문장 비교밖에 없네요.”
“네가 신이 된 이후 제일 잘하는 일 아닌가?”
“모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어요.”
세리아는 통행 문서의 해당 조항을 소리 내어 읽었다.
‘마을의 공유물을 손상하지 않고, 그곳에 남긴 이름을 사적으로 이전하지 않는 사람은 기록 관리자의 허락을 받아 출입할 수 있다.’
재하가 검은 장치에 말했다.
“우리는 그 문구에만 동의했습니다. 방문자를 임의로 주민이나 채무자로 바꾸는 조항은 받아들인 적 없습니다.”
[접수 대상 불명]
“왜 불명이죠? 지금 저한테 대체 징수하려고 고리를 걸었잖아요.”
[방문자 신격 확인 불가]
재하는 씩 웃었다. “그래요. 저를 신으로 확인할 수도 없다면서, 신격 채무를 받겠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검은 장치가 잠시 조용해졌다. 누리는 그 틈에 기록 보존 규칙을 펼쳤다.
[이의 제기 자격: 정산의 직접 대상자]
“신격으로 이의 제기를 하는 게 아니라, 고리로 묶인 당사자로 이의 제기를 하는 겁니다.” 누리가 설명했다.
릴리가 먼저 말했다. “저는 여기에 들어올 때 남의 기억을 팔아도 된다는 데 동의하지 않았어요.”
세리아가 뒤를 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계약번호를 제 이름에 연결한 절차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에반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만든 원문을 따르지 않은 개정 규정에 이의를 제기한다.”
재하도 손을 들었다. “저는 그냥 구경하러 온 게 아닙니다. 이 마을 기록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아보러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걸로 제 신앙을 훔쳐 가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검은 고리가 한 번 떨렸다. 검은 장치에서는 숫자가 쏟아지더니, 예상치 못한 문구가 나타났다.
[방문자 정산 절차 불일치 확인]
[징수 보류]
[입장 기록과 징수 기록 분리]
고리가 천천히 풀렸다. 재하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동안 발목에 힘을 주고 버텼던 모양이었다.
“와, 신의 능력 하나도 안 썼는데 해결됐네.”
에반이 중얼거렸다. “정말 별의별 신이 다 있군.”
세리아는 재하를 일으켜 세우며 낮게 말했다. “해결된 건 방문자 징수뿐입니다. 장치의 본래 수취 계약은 그대로예요.”
“알아요. 그래서 이제 시작이죠.”
회관의 유리판에서 잔향이 다시 재생됐다. 주민들은 수로 보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 재하에게는 그 모습이 회계상 수익 항목으로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평범한 하루였다.
밤새 고리가 나타났던 자리에, 작은 바닥 문양 하나가 남았다. 네 사람의 이름은 적히지 않았고 대신 ‘서로 다른 의사를 가진 방문자 네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마을은 외부의 신격을 몰라도 사람들의 선택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구별할 수 있었다.
고리가 풀린 뒤에도 발목에 남은 붉은 자국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세리아는 기록상 피해가 발생했음을 확인하고, 각 사람에게 자기 상태를 적을지 여부를 물었다. 릴리는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쉬겠다고 했고, 재하는 회관의 원래 입장 문서를 다시 읽었다.
“출입 기록을 이렇게 자세하게 남겼는데 왜 방문자의 안전 규칙은 없었을까요?”
누리가 답했다. “안전 규칙도 있습니다. 다만 이 마을이 지워진 이후 생긴 장치 때문에 따로 마련됐던 규칙이 적용되지 않은 것입니다.”
재하는 한숨을 쉬었다. “새로 만든 규칙 때문에 원래 있던 규칙이 작동하지 않으면, 개선이 아니라 고장이라고 해야겠네요.”
“기록하겠습니다.” 누리가 말했다.
에반은 장치에서 흘러나온 회계 내역 일부를 종이에 옮겼다. 방문자 네 명에게 부과될 뻔한 신앙 단위가 실제로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숫자만 보면 작아 보였다. 하지만 같은 장치가 삼백 년 동안 매일 다른 방문자에게 똑같은 일을 했다면 규모가 엄청날 수 있었다.
“방문자가 이렇게 많았어요?” 재하가 물었다.
“실제 수는 몰라. 다리도 숨겨져 있었으니까. 다만 방문자가 아니라 장치를 정비하러 온 직원까지 징수 대상에 넣은 기록이 있어.”
“직원에게까지?”
“그땐 직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비용을 줄이려 했겠지. 회사가 자기 상품을 제일 먼저 직원에게 팔잖아.”
재하는 속으로 한국 회사의 사내 복지를 떠올렸다. 할인이라는 말로 월급을 다시 회사에 돌려주는 제품 판매 행사를 몇 번이나 봤던가. 여기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릴리는 피해 기록의 용도를 확인했다. “이 기록을 감사에 쓰려면 우리 이름을 공개해야 하나요?”
“필요한 범위가 정해지면 동의를 다시 받겠습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우선은 네 명 모두 이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익명으로 보전할 수 있어요.”
재하는 그 답을 듣고 웃었다. 익명을 지키는 일이 어떤 때는 서로를 더 분명하게 보게 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마을 밖에서 붉은 신호탄이 피어올랐다.
“군 신호예요.” 세리아가 즉시 알아봤다. “구조 요청일 수도, 봉쇄 명령일 수도 있습니다.”
재하는 바깥으로 달려갔다. 멀리 돌다리 너머로 카르도의 깃발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갑옷을 입은 병사 둘이 누군가를 부축하고 있었다. 부축받는 사람의 손에 낡은 마을 이름표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갑옷을 입은 병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제6지역에서 나왔다는 사람의 손녀가 있습니다!”
세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사람이 없는 마을이라면서요?”
누리는 조용히 대답했다.
“마을에 남은 사람이 없다는 말과, 마을을 떠난 사람의 후손이 없다는 말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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