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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23화
PAYLUA ORIGINAL · 제23화

23화. 사라진 마을에도 월말 정산이 있습니다

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146자

오프라인 책장
사람이 없는 마을에서 월말 정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윤재하는 회관 벽에 붙은 숫자를 한참 보다가 아주 현실적인 질문을 했다. “이거 전기요금은 누가 내요?” 에반이 웃었다. “네가 지금 놀라고 있는 부분이 거기야?” “기록을 삼백 년이나 돌렸잖아요. 동력 없이는 안 될 거 아닙니까.” 누리는 회관 지하의 작은 문을 열어 보였다. 아래에는 둥근 축이 있었고, 수차와 연결된 톱니가 쉬지 않고 돌고 있었다. 강물은 실제 동력이었다. 하지만 잔향을 신앙 단위로 전환하는 검은 장치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다. 매번 기록이 반복될 때마다 사람들의 말에서 희미한 빛을 끌어냈다. [잔향 재생 횟수: 2,874,103] [누적 신앙 수취: 9,001,774단위] [원기록자에게 통지한 횟수: 0] “통지한 횟수가 아주 훌륭하네요.” 재하가 말했다. “한 번도 안 했다는 뜻이잖아요.” 세리아는 숫자를 수첩에 옮기며 얼굴을 찌푸렸다. “통지 대상이 이미 사망한 경우에도 기록 공개 조건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걸 핑계로 동의를 간주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릴리는 회관 창문에 걸린 오래된 천을 걷었다. 닳은 가장자리에 사람들이 남긴 이름이 빼곡했다. 다로, 헤스, 미엔, 로타. 그 사이에 어린아이들의 서툰 글씨도 있었다. 천 아래에는 ‘겨울에 서로 가져다줄 것’이라는 제목의 목록이 붙어 있었다. 장작, 수프, 솜옷, 아픈 이웃의 약초. “이것도 신앙이 되는 거예요?” 에반이 천에 손을 대 보았다. “이곳에서는 서로를 도우려는 약속의 흔적이 남아. 담보청은 그 흔적을 미실현 신앙으로 분류했어. 아직 쓰지 않은 충성심이라고.” “충성심이 아니라 다짐이네요.” 릴리가 말했다. 재하는 천에서 손을 뗐다. 다짐을 자원처럼 채굴한다니. 한국에서 다니던 회사에서 직원들의 열정을 숫자로 평가할 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회식 참석을 성과로 잡는 날이면 꽤 비슷한 기분이었지만. 장치 아래쪽에서 낮은 진동이 느껴졌다. 릴리는 바닥을 살피다 작은 동판을 발견했다. 천계의 장식 문양과 달리 이 동판에는 실제 기술자가 손으로 새긴 수리 내역이 적혀 있었다. 수차 축을 갈아 끼운 날짜, 톱니바퀴 기름칠 주기, 돌기둥에 균열이 생기면 어디에 연락해야 하는지 같은 내용이었다. “관리하는 사람이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군요.” 릴리가 말했다. “원래 주민들이 관리했습니다.” 누리가 답했다. “마을이 비워진 뒤에는 기계식 수차가 한정된 범위에서 작동하도록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검은 장치는 당시 주민들이 설치한 물건이 아닙니다.” 재하는 두 장치의 재료를 비교했다. 수차는 닳아 있었지만 여러 번 고쳐 쓸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톱니를 분리할 수 있도록 볼트가 있고, 문제가 생기면 수리를 요청할 이름도 적혀 있었다. 반면 검은 장치는 외부에서 분리할 나사조차 보이지 않았다. 수리를 요청할 창구도, 위험 경고도 없었다. “이런 건 고장 나면 어떻게 합니까?” “담보청 본부에서 원격으로 처리하지.” 에반이 대답했다. “현장 사람이 열면 위조 방지 봉인이 끊어졌다고 해서 벌금을 물렸어.” “기계를 잘못 만들고 고치지 못하게 하면 고장도 사고도 기록에서 사라지겠네요.” 에반이 씁쓸하게 웃었다. “가끔은 그런 게 가장 오래가는 사업이 되지.” 세리아는 동판 아래에 작은 덮개를 발견했다. 덮개 안쪽에는 주민들이 정비에 동의한 설비 목록이 있었다. 우물 펌프, 방앗간, 마을 회관 난방장치. 검은 수익 전환 장치는 거기에 없었다. 지역 주민들의 원래 동의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였다. “불법이라는 결론을 내려도 되겠습니까?” 재하가 물었다. “설치 동의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만 확정하겠습니다. 나중에 다른 허가 문서가 나타날 가능성은 남아 있어요.” “감찰관님은 결론 내리는 게 정말 느리네요.” “잘못 내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재하는 반박하지 못했다. 한편 장치는 공익 기록을 재생할 때마다 원래의 수차에 연결된 작은 동력까지 빼앗아 썼다. 에반은 축에 손을 댔다가 놀라 손을 뗐다. 마찰열이 심했다. 오래된 방앗간에서 최근처럼 연기가 나지 않았던 이유도, 사람이 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장치가 회전력을 다른 곳으로 빼돌렸기 때문이었다. “이건 돈만 훔치는 게 아니네.” 재하가 말했다. “맞아. 이 마을이 자기 기록을 보존하는 데 쓰려던 힘까지 빌려 쓰고 있어.” 릴리는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닦았다. “우리가 장치를 고칠 수는 있어요?” “고치는 일과 뜯는 일은 달라.” 에반이 말했다. “원래 수차를 지키려면 먼저 어느 부분이 주민 설비인지, 어느 부분이 나중에 붙었는지 구분해야 해.” 그들은 회관 바닥에 분필로 두 장치의 구조를 그렸다. 한쪽에는 주민의 설비를, 다른 쪽에는 담보청의 장치를 표시했다. 처음에는 선이 어지럽게 엉켰지만, 하나씩 따라가다 보니 어디서 원래의 동력이 잘못 연결됐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재하는 웃었다. “드디어 장부 말고 그림을 그렸네요.” 에반이 고개를 들었다. “놀리지 마. 내가 이 선을 잘못 그었다는 걸 이제야 인정할 수 있었어.” 세리아는 장치 옆면의 계약서를 펼쳤다. 맨 위에는 허가 번호가 있었고, 아래로 운영 주체와 수익 배분표가 이어졌다. 주민 대표 서명란에는 낡은 마을 인장 대신 검은 네모가 찍혀 있었다. [동의 방식: 대리 추정] [대리인: 지역 보호 신격] [수익자: 천계 신앙 담보청] “대리 추정이 뭡니까?” 재하가 물었다. 에반이 대답했다. “사람이 반대할 수 없을 때, 반대하지 않았다고 계산하는 거지.” “죽은 사람들한테도요?” “서류가 그렇게 짜였어.” 재하는 에반을 바라봤다. “이것도 당신이 짰습니까?” 에반의 턱이 굳어졌다. “기본 구조는. 하지만 대리인을 실제로 지정한 서류는 본 적 없어.” “지금 보는 게 그거군요.” “그래.” 에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 문제가 되는 건 대리인 자리에 적힌 신격이야. 그 신격이 자기 이름을 버리기 전에 작성된 계약은 대리권을 부여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름이 지워진 다음부터는 담보청이 아무 이름이나 대신 넣었지.” 누리는 종이 손으로 장치의 붉은 홈을 짚었다. “제6지역 보존 규칙에 따라 원본 기록은 해당 지역의 공동 관리 자산입니다. 단, 기록을 읽을 권리와 그것을 매매할 권리는 다릅니다.” “이 장치를 멈출 수 있어요?” 재하가 물었다. “물리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부작용은?” “잘못 끄면 원본 재생 매체가 파손됩니다. 그리고 장치의 수취 계약이 인접한 다섯 지역 신성 공급망에 연결되어 있어, 일부 의료와 수로 보호 기적이 중단될 수 있습니다.” 재하는 이미 예상했던 답이 현실로 들려오자 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싫어하는 회계 장부를 찢으면 누군가는 내일 약을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냥 망치로 부수면 해결되는 사건이 아니라는 거죠.” “이번에는 망치를 들 사람이 릴리 씨가 될 것 같습니다.” 에반이 중얼거렸다. 릴리가 진지하게 되물었다. “왜요?” “네가 가장 먼저 들겠다는 표정이라서.” 릴리는 잠깐 웃었지만 망치를 들지 않았다. 대신 천 위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씩 읽었다. 그 소리가 회관의 돌벽에 닿고 돌아왔다. 잔향 속 사람들의 말과는 달랐다. 그것은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재하는 그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누리, 누가 살아서 이 이름을 읽었다는 기록도 신앙이 됩니까?” “발신인이 신에게 스스로 바칠 의사가 있고 그 조건을 알았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지금은요?” “릴리 님의 의사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산출되지 않습니다.” “좋아요.” 그는 세리아를 바라봤다. “원본은 그대로 둔 채 수취 계약의 합법성부터 검토할 방법을 찾읍시다. 연결된 병원들에 대해서는 대체 공급을 준비하고요.”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독립 감사의 잠정 보전 명령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6지역은 지적상 존재하지 않으니 누가 관할인지부터 다툼이 생길 겁니다.” 에반은 회계판을 열어 다섯 지역으로 퍼지는 은빛 선을 보여 줬다. 선마다 신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리아넬의 치료소, 카르도의 제17보급대, 유리포의 수문. 이전 공개 심리에서 임시 유지 명령을 내린 시설들이었다. “담보청이 장치를 이곳에 감춰 둔 이유가 있군요.” 재하가 말했다. “이 장치를 끄면 너부터 사람을 위험하게 만든 신이 돼. 안 끄면 삼백 년 전 사람들의 기록이 계속 팔리고.” “선택지를 두 개만 보여 주고 둘 다 나쁘게 만들었네요.” 재하가 팔짱을 꼈다. “전 회사에서도 결재 요청서를 이렇게 올렸어요. 이건 결재 안 합니다.” 그는 마을에 실제 남아 있는 물자부터 조사하자고 했다. 장치에 쓰인 광물, 수차를 유지하는 공구, 남아 있는 연료, 혹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하류 시설. 의사와 기술자가 함께 확인해야 기적을 대체할 수 있었다. 세리아는 공식 소송서류를 작성하고, 릴리는 통보받을 사람들을 분류했다. 에반은 장치를 만들 때 쓰인 계약 코드를 그림으로 옮겼다. 오후에는 시험을 하나 했다. 신앙 수취 장치의 연결선 한 줄을 직접 끊는 대신, 기록 재생이 멈췄을 때 각 지역의 표시가 어떻게 바뀌는지 관찰하기로 했다. 누리는 원래 주민들이 남긴 유지보수 절차에 따라 재생을 아주 짧게 일시 정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 기능은 공개 기록을 훼손하지 않고 장치 온도를 식히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허가된 기능이면 안전하지 않습니까?” 재하가 물었다. “원래 장치는 안전합니다. 다만 나중에 덧붙인 수익 전환 장치에는 허가 조건이 없습니다.” “이제 불길한 문장도 익숙해지네요.” 세리아는 재생 정지 전후의 변화를 기록했다. 릴리는 각 연결선에 이름표를 붙였고, 에반은 수익 전환 장치가 스스로 만든 미수취 청구서를 감시했다. 누리가 손잡이를 내리자 회관의 유리판이 어두워졌다. 오래된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검은 장치에 붉은 글씨가 나타났다. [예정 수익 부족] [대체 징수 대기] “아까와 똑같은 문구네요.” 릴리가 말했다. 에반이 인상을 썼다. “재생을 멈춘 지 몇 초밖에 안 됐어. 정상적인 계약이라면 누락된 수익이 있는지 확인해야 해. 하지만 이건 기다리지도 않고 대체 징수를 요구하고 있어.” “그럼 누가 대신 내야 한다고 정해져 있어요?” “여기 들어온 사람, 혹은 마지막으로 기록을 만진 사람. 일단 누구든 찾아 잡는 구조야.” 재하는 손잡이를 올렸다. 회관의 잔향이 돌아왔고 붉은 글씨가 사라졌다. 그는 실험 결과를 작은 종이에 적었다. '재생 장치를 멈춘 뒤 채무 확인 없이 대체 징수 요구 발생.' 화려한 증거는 아니었지만 다음에 문제가 생겼을 때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었다. 세리아는 실험과 함께 잠정 안전 지침을 작성했다. 이제 누구도 혼자 기계를 만지지 말고, 정지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는 연결된 시설들의 위험 수준을 확인하도록 했다. 그 지침을 낡은 회관 문 안쪽에 붙였다. 외부의 신앙 담보청 직원이 보더라도 지울 수 없도록 복사본은 누리가 따로 보관했다. 재하는 마지막 문장을 추가했다. '모르면 멈추고 묻는다.' 에반이 보고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기적 같지 않은 신탁이군.” “이 마을에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어느덧 하늘이 어두워졌다. 마을은 여전히 고요했고, 들리지 않던 걸음소리도 사라져 있었다. 일행은 빈 회관에서 쉬기로 했다. 문이 잠기지 않은 집이 많았지만, 남의 집에 들어가는 대신 공공 공간을 택했다. 공익 열람이 허용된 식기만 꺼내 쓰고, 먹은 뒤에는 설거지도 했다. “우리가 여기서까지 설거지를 해야 해요?” 에반이 물었다. “누가 해 준다고 적혀 있지도 않잖아요.” 릴리가 말했다. “이건 제6지역이 아니라 양심 지역이네.” 재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 모두가 조금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자정을 넘기자 회관의 검은 장치가 짧게 울렸다. [월말 정산 시작] [미수취 신앙 대체 징수] [담보 대상: 제6지역 임시 방문자 네 명] 재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깐, 우리 아무것도 서명 안 했는데?” 네 사람의 발아래에서 검은 고리가 생겼다. 고리는 실처럼 얇았지만 한 발도 움직일 수 없게 붙잡았다. 재하는 ‘무상의 약속’을 발동하려 했으나 안내창은 뜨지 않았다. [신격 등록 조회 불가] [권능 인증 실패] 그 순간 검은 장치에 아주 작은 글씨가 새겨졌다.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다.’ 재하는 이를 악물었다. 믿음을 돈으로 만드는 장치는 끝내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의 이름까지 가져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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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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