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장을 받았는데 주소가 없었다.
윤재하는 신이 된 뒤로 온갖 문서를 받아 봤다. 신격 회수 통지서, 진술서 제출 요청, 신앙 담보청의 압류 예고장. 하나같이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적어도 어디로 오라는지는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접근 허가 요청 수신]
[발신자: 무명의 신]
[목적지: 제6지역]
[현재 지번: 삭제됨]
[유효 기간: 첫 종이 두 번째 울리기 전]
“지번이 없으면 어떻게 가라는 거죠?”
누리는 제단 가장자리에서 종이 손가락으로 지도를 두드렸다. 다섯 지역의 윤곽은 선명했지만, 여섯 번째 자리는 얇은 흰색으로 비어 있었다. 빈칸이라기보다 누군가 도려낸 자국이었다.
“허가를 받은 사람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럼 이미 허가를 받은 것 아닙니까?”
“길을 찾아도 들어갈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재하는 지도와 누리를 번갈아 보았다.
“여기 규정 만든 분이 혹시 천계 공무원이었어요?”
에반이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누리는 정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최초 계약은 인간 여섯 지역 대표와 무명의 신이 함께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길 찾는 데도 허가가 필요해요?”
“그 당시에는 주소를 안다는 사실만으로 남의 집에 들어가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재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건 반박하기 어려운 설명이었다.
신전 앞마당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했다. 릴리는 어젯밤 열린 계약 설명회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서류는 두 묶음이었다. 동의한 사람들이 남긴 질문과,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 남긴 이유. 누구의 이름도 신도 명부에 저절로 옮겨 적지 않도록 구분해 둔 것이다. 안나는 방직촌에서 가져온 천으로 여행용 가방의 터진 바닥을 꿰매고 있었다. 그들은 신전에 함께 머무르지만, 맡은 일을 신을 위해 한다는 이유로 무보수 노동으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멀리 가시는 거죠?” 릴리가 물었다.
“제6지역이라는 곳에요.”
“거기는 어디예요?”
“그걸 알러 갑니다.”
릴리는 바늘을 내려놓았다. “모르는 곳이면 제가 같이 가겠어요.”
재하는 대답하기 전에 노아를 보았다. 아이는 마당에서 나무판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아침 약을 먹었는지, 기침이 심해지지는 않았는지 적는 건강표였다. 최근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날씨까지 기록한다고 했다.
“노아는요?”
“마르타 아주머니와 의사가 봐주기로 했어요. 제가 없는 동안의 기록도 부탁드렸고요.”
“그렇더라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신님만 위험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들려요.”
릴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재하는 말을 고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갑시다. 대신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돌아오기로 해요. 그 판단도 같이 하고요.”
“네. 그건 약속할 수 있어요.”
에반은 이미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의 짐에는 식량보다 종이가 많았다. 한쪽에서는 세리아가 천계 감찰관 인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감찰관님도요?”
“공개 심리에서 승인한 독립 감사의 연장입니다. 다만 제6지역이 공식 지적에서 삭제됐기 때문에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합니다.”
“그 말은 도와주실 수 없다는 겁니까?”
“도움이 되는 일과 권한이 있는 일은 다릅니다. 전자는 하겠습니다. 후자는 함부로 약속하지 않겠습니다.”
재하는 그런 대답을 신뢰하게 됐다. 처음 세리아를 만났을 때는 모든 일에 규정을 들이밀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규정이 닿지 않는 곳을 규정이 닿는다고 속이지 않았다.
가방을 정리하던 릴리는 신전의 장부를 탁자에 올려 두었다. 원래 신도 명부와 일상 기록을 함께 보관했던 습관을 바꾸기 위해, 최근에는 잠금장치가 다른 상자를 두 개 만들었다. 신도 등록을 희망하는 사람의 기록은 본인이 열람하고 수정할 수 있게 했고, 계약 상담 기록은 별도 동의를 받을 때만 보관했다.
“장부를 왜 두 개나 만들었어요?” 노아가 물었다.
“너 건강표를 신님 신도 명부에 붙이면 이상하잖아.” 릴리가 답했다.
“근데 신님이 제 건강 걱정하시는데.”
“건강을 걱정하는 것하고 네 정보를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건 다르지.”
노아는 한참 고민하다 손가락으로 두 상자를 가리켰다.
“그럼 제 건강표는 제가 열쇠를 가지면 되는 거네요?”
“맞아.”
재하는 그 대화를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신도 수가 늘어나는 속도만 보며 살았다. 지금은 신도 숫자와 무관한 일을 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신도 한 명이 늘어도 새 수로가 생기지 않았고, 어려운 계약이 저절로 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신도가 늘지 않는 하루에도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놓이게 했다.
도란이 신전 문에 여행 중 업무를 대신할 사람 목록을 붙였다. 수로 시설 확인은 유리포와 직접 연락하게 하고, 치료 신청은 마을 의사와 리아넬 신전의 연계 창구로 안내하기로 했다. 신격의 승인 도장이 없어도 처리 가능한 일은 미리 구분했다. 부재중인데도 신의 이름을 붙여 결재를 늦추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신님이 안 계셔도 하루는 굴러갈 겁니다.” 도란이 말했다.
“조금 서운하네요.”
“그럼 일부러 일을 망쳐 둘까요?”
“그런 서비스는 사양합니다.”
마르타는 재하의 손에 말린 과일을 쥐여 줬다. 신성 포인트가 생긴 뒤로 재하가 식사를 거르는 일이 많았다. 스스로 기적을 쓰면 배고픔도 참아야 할 것처럼 굴었지만, 몸이 없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가진 신이었다.
“빈 신전에 처음 온 날도 아무것도 못 먹었다면서요.” 마르타가 말했다. “이제는 부엌에 먹을 게 있으니 챙겨요.”
재하는 말린 과일을 주머니에 넣었다. “고맙습니다. 돌아오면 설거지할게요.”
“돌아오는 것부터 해요.”
짧은 말이 이상할 만큼 크게 들렸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 직전, 카르도의 병사 토마스가 봉투를 가져왔다. 전쟁신의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재하는 무심코 어깨를 움츠렸다. 카르도와 관계가 조금 나아졌다고 해도 그 신이 서류를 보내면 좋은 소식이 들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제6지역 통행 시 사용 가능한 구 병참로 현황]
[현재 소유 및 통제권 주장 없음]
[주의: 북서부 돌다리는 실재 여부 확인되지 않음]
편지 끝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군 지도를 믿지 마라. 지도는 지워진 곳에 가장 먼저 거짓말한다.’
에반이 휘파람을 불었다. “카르도가 조언까지 하다니. 이 정도면 우호국이네.”
“그분이 우릴 좋아해서 보내신 걸까요?” 릴리가 물었다.
“아니. 저 지역에서 자기 병사들이 사라진 적이 있거든.” 에반의 표정이 굳어졌다. “카르도는 잃어버린 병사의 이름을 못 견뎌 해. 자기가 지켜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을 장부에서 지워 놓는 걸 특히.”
세리아가 종이를 접었다. “그 사실은 공문에 없습니다.”
“내가 아는 사실이라고.”
“그렇다면 증언으로 기록하겠습니다.”
“저기, 다들 이제 걸어도 될까요?” 재하가 끼어들었다. “종이 두 번 울리기 전에 가야 한대요.”
길은 마을 북서쪽에서 시작했다. 유리포로 가던 강변길을 한참 거슬러 오른 뒤, 무너진 풍차를 지나 오래된 군용 이정표가 서 있는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이정표에는 ‘다섯 지역으로 가는 길’이라고 적혀 있었다. 화살표는 여섯 개였다.
“이거부터 이상한데요.”
“원래 여섯 개였으니까.” 에반이 말했다. “누군가 글씨만 고친 거야.”
재하는 돌기둥을 만져 보았다. 다섯이라는 글자 주변의 돌이 다른 부분보다 거칠었다. 칼끝으로 숫자를 긁어 낸 흔적이었다. 에반은 손가락으로 먼지를 훑고서 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마법으로 지운 게 아니네. 사람이 직접 고쳤어.”
한참을 더 가자 냇물이 나타났다. 오래된 지도에는 돌다리 하나가 표시되어 있었지만, 눈앞에는 물 위로 허공만 펼쳐져 있었다. 맞은편 둑에는 길의 흔적이 있었고, 강물 아래로 일정한 간격의 돌기둥이 이어졌다.
“다리가 무너졌군요.” 재하가 말했다.
세리아는 수첩을 꺼냈다. “아직 결론 내리지 마십시오. 돌기둥에는 최근까지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릴리가 물가에 쪼그려 앉았다. 바닥에 넓적한 돌 하나가 반쯤 잠겨 있었다. 그 돌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길은 찾을 수 있다. 들어올 사람인지는 직접 묻는다.’
누리가 제단에서부터 따라오더니 재하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종이 인형은 돌에 새겨진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런데 마지막 단어를 읽는 순간 물 위의 공기가 얇게 떨렸다.
[통행 권한 확인 중]
[동행인 네 명의 의사 확인 필요]
“동행인 네 명?”
재하는 자기를 포함해 사람 수를 세었다. 릴리, 세리아, 에반, 그리고 자신. 누리는 사람 숫자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누리가 아주 엄숙하게 손을 들었다.
“저는 보존소의 이동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억울하진 않아요?”
“문서는 출입할 때 세지 않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물 위에 네 개의 빈칸이 떠올랐다. 첫 칸에는 윤재하의 이름이 적혔다. 그 아래로 질문이 나타났다.
[당신은 이곳에 남겨진 신앙을 소유하려 합니까?]
“아니요.”
두 번째 질문은 릴리 앞에 나타났다.
[당신은 이곳의 사람들을 대신해 동의할 권한이 있습니까?]
“없어요. 듣고 기록할 수는 있어요.”
세 번째 질문은 세리아에게 향했다.
[공적 문서가 없더라도 사실을 기록하겠습니까?]
“하겠습니다. 대신 확인하지 못한 부분도 그대로 적겠습니다.”
마지막 질문이 에반에게 나타났다.
[당신은 이곳에 남긴 서명을 인정합니까?]
악마의 얼굴에서 피가 가셨다.
“누가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응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단, 입장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에반은 물 위에 떠 있는 글자를 오래 바라봤다. 이전에는 어떤 마법적 심사도 농담으로 흘려보내던 그였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인정해.”
그가 말했다.
“내가 여기까지 계산서를 가져왔어. 누군가는 기도를 숫자로 바꿨고, 나는 그 숫자를 팔 수 있게 만들었지.”
모든 빈칸이 닫혔다. 강물 위로 돌다리가 나타났다. 없었던 다리가 생겼다기보다, 보이지 않던 윤곽을 눈이 뒤늦게 찾아낸 것 같았다. 젖은 이끼와 작은 균열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재하는 조심스럽게 발을 올렸다. 돌은 차가웠고 단단했다. 그는 다시 세리아에게 물었다.
“이것도 기록하시겠어요?”
“네. 통행 허가는 받았지만, 다리가 원래 없었는지 감춰져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다리 가운데에는 오래된 돌기둥 하나가 남아 있었다. 새로 나타난 길에서는 유독 그 기둥만 색이 달랐다. 세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나무 자를 꺼냈다. 돌기둥 아랫부분에 새긴 수위표와 마모 흔적을 재기 시작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기록하실 겁니까?” 에반이 물었다.
“다리가 있다는 증언을 남기려면 최소한 건널 수 있는 실제 구조물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마법으로 안 보이던 다리인데 재료가 중요해?”
“중요합니다. 환영이면 무게를 견딜 수 없을 수도 있고, 실제 다리라면 다른 사람도 안전하게 지나갈 방법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재하는 다리 옆으로 돌멩이 하나를 던져 보았다. 돌멩이는 강물에 떨어져 작은 물결을 만들었다. 그는 그제야 마음을 조금 놓았다. 다리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이 특정 조건에서 돌다리를 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다리 위에 이끼가 끼어 있었고, 옆면에 작은 조개가 붙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지나오려면 뭘 해야 합니까?” 재하가 누리에게 물었다.
“본인의 출입 목적과 의사를 확인해야 합니다. 목적을 숨긴 사람도 들어올 수는 있지만, 기록을 훼손하려는 행동에는 보존소가 대응합니다.”
“거짓말까지 다 걸러 주는 마법은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그랬다면 삼백 년 전에 이 마을의 기록이 사라지지 않았겠지요.”
재하는 그 말을 듣고 돌기둥을 바라봤다. 안전을 보장한다는 시스템에도 빈틈이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허가를 받았다고 해서 뒤에서 무엇을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감시가 아니라, 잘못을 발견했을 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록과 사람들의 판단일지도 몰랐다.
다리를 건넌 뒤에는 새소리도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숲은 죽지 않았는데도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나뭇잎은 흔들렸고 햇빛도 바닥에 떨어졌다. 다만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되돌아왔다. 마치 뒤에서 다른 누군가가 따라오는 듯했다.
릴리가 뒤돌아봤다. “누가 오는 것 같아요.”
“저도 들었어요.”
재하는 한 발짝 멈췄다. 발소리도 멈췄다.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여섯 걸음이 들렸다.
“우린 네 사람인데.”
누리가 말했다. “그곳에는 항상 늦게 도착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누군데요?”
“그 이름은 아직 열람할 수 없습니다.”
숲을 빠져나오자 마을이 보였다. 지붕이 낮고 담장이 가지런한 작은 마을이었다. 우물가에는 물동이가 놓였고 방앗간의 수차는 천천히 돌아갔다. 그런데 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빨랫줄에 걸린 천들은 오래전에 마른 상태였고, 기척 없는 바람에 조금씩 흔들렸다.
마을 입구의 돌비석에는 이름 대신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이름은 돌아올 사람의 입으로 불러 주십시오.’
재하는 수첩을 꺼냈다. 이름과 날짜를 적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입구를 한 걸음 지나자 수첩 맨 위에 적었던 자기 이름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뭐야.”
그가 당황해 다시 이름을 쓰려는 순간, 허공의 안내창이 울렸다.
[주의: 제6지역 내부에서는 신격명의 외부 등록 상태가 일시 중지됩니다.]
[현재 이름: 조회 불가]
에반이 뒤에서 소리쳤다.
“재하! 네가 누군지 말해 봐!”
재하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자신의 이름은 기억났다. 릴리의 얼굴도, 노아가 쓴 건강표도 기억났다. 그런데 안내창 안에서는 그 무엇도 확인되지 않았다.
“윤재하요.”
신격 시스템이 차갑게 답했다.
[등록되지 않은 이름입니다.]
마을의 낡은 종이 울렸다. 첫 번째 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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