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은 열 살 때부터 계약서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물론 악마의 열 살이 인간의 열 살과 같은지는 누구도 확인하지 않았다.
“계약서는 훌륭합니다. 제대로 쓰면 서로 원하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으니까요.”
재하가 팔짱을 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걸로 남의 거절을 빼앗았습니까?”
“그때는 거절을 선택지로 넣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배우지 못했어요, 아니면 넣기 싫었어요?”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길게 놓였다. 재하는 그를 몰아세울 생각은 없었지만, 지나간 책임을 말장난으로 덮어 주고 싶지도 않았다.
북쪽 교단의 후원금 사건을 조사하던 릴리는 이름 사용에 관한 명세서에서 낯익은 문양을 발견했다. 에반이 과거 추천 시스템을 설계할 때 쓰던 원형 인장이었다. 교단은 릴리를 실제로 고용하지 않았다. 대신 ‘최초의 신도’라는 평판을 연계 상품처럼 등록하고, 그 이름으로 모인 돈의 일부를 자동으로 정산소에 보냈다.
“이건 제가 설계한 방식의 변형입니다.” 에반이 말했다.
“그럼 당신이 고칠 수 있나요?” 릴리가 물었다.
“막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 권한으로 모두 삭제하면 환불 받을 사람들의 증거도 사라집니다.”
에반은 계산기를 꺼냈다. 작은 검은 계산기에는 거울처럼 반짝이는 숫자가 떠 있었다. 그는 장부를 받은 순서대로 맞췄다. 헌납이라고 적힌 금액 중 어떤 것은 자발적인 후원이었고, 어떤 것은 기적을 받으려면 반드시 내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 낸 돈이었다. 무엇이 어느 쪽인지 말한 사람의 증언 없이는 구분할 수 없었다.
“다 돌려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노아가 물었다.
“돌려드릴 수 있으면 좋지.” 릴리가 답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미 돌려받았고, 어떤 분은 얼마를 냈는지 기록이 없고, 어떤 분은 돌려받지 않겠다고 하실 수도 있거든.”
“그럼 물어보면 되잖아요.”
재하가 웃었다. “요즘은 네가 제일 일을 잘한다.”
에반은 노아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어린이 상담 고문으로 모시고 싶군요.”
“용돈 줘요?”
“일을 시키기 전엔 계약서를 읽어야 합니다.” 릴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와 악마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조사 전날 에반은 오래된 회사 창고에 들어갔다. 물건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반짝이는 광고판, 신전을 홍보하던 종이 상자, 자동 추천 장치의 시제품이 한쪽에 쌓여 있었다. 그중에는 사용자의 거절 횟수를 분석해 다음 광고를 더 자주 보여 주는 작은 기계도 있었다.
“이걸 왜 만들었습니까?” 실라가 물었다.
에반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예전에 거절이 많을수록 설득에 실패한 것으로 계산했다. 지금 다시 보니 누군가 ‘안 하겠다’고 말할 권리를 광고의 장애물로만 취급한 것이다.
“당시엔 성과가 좋았습니다. 판매도 늘고, 후원도 늘었죠. 하지만 사람을 붙잡는 데 성공한 건지 도움을 준 건지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실라는 장치를 폐기하지 말고 먼저 기능과 판매 기록을 보존하자고 했다. 파기할 때는 피해자들이 자신의 자료를 확인할 기회를 가진 뒤 독립 감사의 감독 아래 진행해야 했다.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를 나오자 누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 에반의 조언을 듣고 기부금을 끌어모았던 작은 신전의 회계 담당자였다. 그는 에반을 비난하려고 온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기 잘못을 묻는 법을 알고 싶다고 했다.
에반은 그에게 쉬운 변명을 가르치지 않았다. 어떤 설명을 했고 누가 그 설명을 믿었는지, 물품이 실제로 어디로 갔는지 기록을 남기라고 말했다. 그들은 창고 앞 바람을 맞으며 첫 장부를 쓰기 시작했다. 죄책감이 문제를 고치지는 않지만, 정확한 기록은 다음 일을 시작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달랐다.
조사 회의에는 북쪽 교단 대표가 직접 왔다. 그는 자기 기관이 에반의 프로그램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잘못은 소프트웨어 공급자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에반은 잠깐 참았다가 대답했다.
“제가 사람의 평판을 정산 가능한 항목으로 만든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귀하가 릴리 님의 허락 없이 그 이름을 붙이고, 치료가 필요하면 돈을 내야 한다고 설명한 행위는 귀하가 결정한 겁니다.”
“당신도 책임이 있겠죠.”
“맞습니다.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책임이 귀하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교단 대표는 얼굴을 붉혔다. 릴리는 조용히 증인 명단을 받았다.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지만, 후원한 사람들 모두가 피해자인지 단정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쓰인 장부에 누가 어떤 말을 듣고 돈을 냈는지부터 확인하려 했다.
며칠간 열린 조사에서 다양한 사정이 드러났다. 어떤 사람은 릴리가 활동하는 진료소를 진심으로 돕고 싶어 돈을 냈다고 했다. 그 돈이 진료소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또 다른 사람은 노아의 치료와 같은 기적을 받으려면 먼저 후원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빚을 냈다고 했다. 그에게는 환급보다 부당한 약속을 인정받는 일이 먼저였다.
“다른 신전을 믿었는데도 여기서 내역을 공개해야 하나요?” 한 노인이 물었다.
“공개할 필요는 없습니다.” 릴리가 말했다. “본인 기록을 확인한 뒤 필요한 정정을 요청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첫 신도 이력도 함께 점검해 달라고 요구했다. 처음 자신이 재하를 믿었을 때 포인트 한 점이 생겼고, 재하는 그 한 점으로 노아를 치료했다. 그 사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그 장면을 재현하면 또 다른 돈벌이가 된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제가 받은 도움을 누군가의 영업 사례로 팔게 하진 않겠어요.”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 뜻도 아닙니다.”
에반은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자기 회사의 오래된 계좌를 열었다. 과거 그는 신앙 배분식 설계 자문료와 마케팅 수익으로 제법 많은 돈을 모았다. 일부는 이미 다른 곳에 투자돼 있었고, 일부는 피해 기록과 연결돼 있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재산을 모두 털어 한 번에 해결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말조차 멋있게 들리기 위한 광고 문구가 될까 봐 두려웠다.
대신 독립 환급 기금을 만들었다. 자기 자산 중 출처가 확인된 금액을 먼저 내고, 어떤 사람들이 환급 대상인지 결정하는 위원회에는 자신을 넣지 않았다. 회계 자료는 주민 대표와 피해자들이 선임한 감사인에게 맡겼다.
“제가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일은 계속하겠습니다.” 에반이 말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얼마를 돌려줄지는 제가 정하면 안 됩니다.”
재하가 물었다.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그럼 왜 시작했어요?”
“충분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더 쉬운 핑계니까요.”
재하는 더 묻지 않았다. 악마는 드물게 웃지 않았다.
조사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돈이 아니라 사람의 반응이었다. 한 후원자는 아무것도 돌려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도와주려던 마음까지 잘못으로 분류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반면 다른 후원자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기적을 샀다’는 표현이 남았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꼈다.
릴리는 두 사람에게 똑같은 안내문을 보내지 않았다. 기부를 계속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앞으로 후원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볼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고, 환급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정정과 지급 절차를 따로 알려 줬다. 과거의 공통 장부를 그대로 내놓는 대신, 당사자별로 필요한 자료를 확인해 보냈다.
한 젊은 여성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말했다. “저는 돈보다 그때 왜 선택권이 없었는지 듣고 싶어요.”
에반은 그녀 앞에서 자신의 설계를 설명했다. 기부를 하지 않으면 치료받기 어렵다는 문구가 왜 표시됐는지, 어떤 부분은 자신이 만들었고 어떤 부분은 교단이 수정했는지 구분했다. 여성이 그의 설명을 듣고 바로 용서해 주지 않자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며칠 뒤 그녀는 독립 위원회에 증언을 남겼다. 익명으로 보관해 달라는 조건이었다. 에반은 자신의 잘못이 공적인 기록으로 남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그 증언을 자기 교훈담에 인용하지 않았다. 피해자가 원치 않는 한 그 사람의 이야기는 그의 성장을 증명하는 소재가 될 수 없었다.
재하는 그날 밤 장부를 정리하는 에반을 보았다. 악마는 평소보다 훨씬 천천히 계산기를 눌렀다. 틀린 숫자가 나오면 처음부터 다시 계산했다. 오래된 피해를 바로잡는 일이 얼마나 지루한지, 그리고 지루하더라도 계속해야 하는 일인지 그는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그 무렵 귀가선의 채권회수단이 가시골 사건을 문제 삼았다. 에반의 환급 기금에 들어간 돈 중 일부가 귀가선의 연체료 재원으로 등록된 적이 있다는 이유였다. 채권회수단은 돈을 가져오겠다고 했고, 환급 위원회는 실제 출처가 확인될 때까지 지급을 보류했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들이 또 기다리게 됩니다.” 릴리가 말했다.
“그래서 기록을 우회해서는 안 됩니다.” 실라가 답했다. “잘못 만든 돈의 이동 경로를 확인하지 않으면 누가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할지 몰라요.”
회계 감사는 예상보다 복잡했다. 천계의 오래된 정산 장부는 신앙 포인트와 현물 자원을 임의로 환산한 흔적이 많았다. 어느 교단이 낸 헌납이 실제 누구의 치료에 쓰였는지, 단순히 다른 기관의 부채를 갚는 데 들어갔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하율은 부품 장부를 꺼내 보여 줬다. 현장에서 구입한 쇳덩이 하나의 가격이 천계 계산표에서는 축복 세 번과 같은 금액으로 적혀 있었다.
“축복 세 번으로 다리를 고칠 수 있나요?” 하율이 물었다.
“제 기적이라면 어쩌면 가능합니다.” 재하가 말했다.
“그럼 책임 보증도 하시겠습니까?”
“철제 교량은 전문가에게 맡기겠습니다.”
사람들이 웃었다. 웃고 나니 다시 숫자를 검토할 힘이 생겼다. 환급은 천천히 진행되겠지만, 적어도 무엇이 실제 비용인지부터 분명히 하기로 했다.
환급 위원회는 명세서를 마을 게시판에 붙이기 전에 몇 차례 내용을 수정했다. 처음에는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모든 거래를 공개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환자들의 이름과 병력이 담긴 내역도 있었다. 결국 위원회는 지급 총액과 미완료 건수는 공개하되, 개인의 이름과 구체적인 의료 정보는 보호하기로 했다.
하율은 공개 장부에 약품과 자재의 실제 구매 가격도 적었다. 이전처럼 신앙 포인트를 임의 환산하는 대신, 장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비용만 비용이라고 적었다. 그 결과 일부 사업은 생각보다 비쌌고, 다른 사업은 불필요한 중간 수수료가 붙어 있었다. 에반은 자기가 몰랐던 돈의 흐름을 알아 갈수록 얼굴이 굳었다.
“정직하게 쓰니까 숫자가 보기 싫어지는군요.”
“그래도 읽어야 해요.” 실라가 말했다. “피해자들은 그 숫자 때문에 오래 기다렸으니까요.”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에서 새로 배울 일이 아직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좋은 문구를 만드는 재능보다, 불편한 질문을 듣고 다시 확인하는 습관이 그에게 필요했다.
이날 저녁 에반은 릴리에게 작은 봉투를 건넸다. 자기 회사 광고에 릴리의 이름이 사용된 모든 광고 문구를 수정했다는 확인서였다. 삭제한 기록과 변경 이유도 남겼다.
릴리는 그를 바라봤다. “고맙지만, 제가 당신을 용서해야 할 의무는 없어요.”
“압니다.”
“일을 더 하셔야 할 거예요.”
“그것도 압니다.”
“그럼 저녁은 드시고 가세요.”
에반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용서와 식사가 다른 일이라는 걸 이해하는 데 그의 계산기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늦은 밤, 독립 회신망에 새로운 소식이 왔다. 귀가선의 제동 장치가 건드려졌고, 미퇴임 신청자 1,309명의 기록이 다시 하나의 정산 계정으로 묶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계정을 강제로 끊으면 병원과 구조 회랑의 장치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누가 이런 연결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재하가 물었다.
실라가 차갑게 답했다. “원점의 한 부서가 아닙니다. 각 기관이 자기 재원을 지키려고 서로를 묶어 둔 결과예요.”
릴리는 마지막으로 피해자의 선택을 기록하던 상담원들에게 당부했다. 환불을 신청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를 명단에서 지우지 말고, 나중에 새 자료가 확인되면 다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을 남기자는 것이었다. 다만 그 사람을 계속 찾아가 설득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에반은 그 결정을 장부에 적었다. 과거 그는 대답하지 않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광고를 보냈다. 이번에는 침묵도 하나의 응답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려고 했다. 상대가 연락을 원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그것이 그가 새롭게 배우는 업무 방식이었다.
에반은 방금 내놓은 환급 기금의 내역을 내려다봤다. 한때 그는 이런 연결을 효율이라고 불렀다. 이제 그것을 풀어내지 않으면 누군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제가 만든 부분은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그는 말했다. “다만 누군가가 묻기 전에 먼저요.”
제19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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