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182화
PAYLUA ORIGINAL · 제182화

182화. 원점관리국의 흰 장갑

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101자

오프라인 책장
천계 원점관리국의 사절은 아침 아홉 시 정각에 가시골 신전에 도착했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흰 장갑, 은색 지팡이, 흙먼지 하나 묻지 않은 구두까지. 신격을 회수하러 온 사람들이 늘 그렇듯 그는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자신의 방문 기록부터 등록했다. “원점관리국 수신권 심사관 라엔입니다.” 윤재하는 문턱을 넘어오려는 구두 앞에 빗자루를 세웠다. “신발 닦고 들어오세요.” “나는 천계 최상위 공증 권한을 가진 자입니다.” “그래서 더 잘 닦으셔야죠. 이 신전은 주민 공동시설이라 제가 청소만 하는 건 아니거든요.” 라엔은 한참 재하를 바라보다가 발밑의 매트를 밟았다. 그 옆에서 모과가 작은 종을 울렸다. “방문 목적과 열람 범위를 적어 주세요.” “이미 천계에 등록했습니다.” “여기는 천계가 아니고 가시골입니다.” 신이 아닌 모과의 짧은 대답이 라엔을 멈춰 세웠다. 재하는 이상하게 뿌듯했다. 예전에는 천계 기관명이 길어질수록 무조건 겁을 먹었다. 지금은 방문자 명부를 직접 적게 할 수 있었다. 라엔은 수신권 원본이라며 길고 하얀 두루마리를 펼쳤다. 맨 위에는 세상 모든 신격이 원점의 인가를 통해 생겨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문제는 그 아래였다. [원점 인가에 따른 신격은 생성 시점부터 원점관리국의 귀속 재산으로 분류한다.] “귀속 재산?” 재하가 물었다. “행정상 분류입니다.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보존 장치죠.” “누가 허락했는데요?” “원점 규정이 허락했습니다.” “그 규정을 누가 만들었는데요?” “원점에서 승인했습니다.” “그 원점을 누가 승인했는데요?” 라엔은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에반이 옆에서 속삭였다. “신님, 그 질문은 원래 고객센터에서 가장 금지하는 질문입니다.” “왜요?” “계속 물으면 담당자가 본인 이름을 쓰게 되거든요.” 릴리는 심사관에게 편지의 원본을 보여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발신인의 확인문에는 단일 신격이나 기관이 수신인이 아니라고 적혀 있으므로, 원점관리국의 수신 주장은 현재 자료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라엔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확인문을 밀어냈다. “그 발신인은 우리 세계의 법적 주체가 아니다.” “그러면 그 세계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으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모과가 물었다. “국경을 넘는 재화의 관리는 원점의 몫이다.” “편지가 재화인가요?” “기록은 미래의 신앙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릴리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말을 읽기도 전에 재산으로 분류하겠다는 뜻이군요.” 라엔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신격 생성 원장의 일부를 제출했다. ‘전임 신 도르: 사용 중지’, ‘후임 윤재하: 외부 관측 후 자동 배정’, ‘가시골 폐허 신전: 생성 자산 보관처’. 이미 여러 차례 부당한 행정 처리임이 밝혀진 문구들이 한 장의 원장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전 결정이 수정되지 않았군요.” 세리아가 말했다. “원장 자체는 불가침이기 때문이다.” “수정할 수 없는 기록이면 왜 원장입니까?” 세리아는 원본 대조표를 펼쳤다. “도르의 신격은 유효하게 살아 있고, 재하의 강제 승계 효력은 정지됐으며, 그 후 재하는 자발적 선택으로 신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원점의 표가 현재를 반영하지 못합니다.” “원점의 표가 바로 현재다.” 라엔이 지팡이 끝으로 돌바닥을 두드리자 신전의 천장이 희게 빛났다. 창문 사이로 가느다란 선이 내려와 재하의 몸과 봉투를 동시에 향했다. 유나는 봉투를 뒤로 감췄고 카르도는 손을 검집에 얹었다. “폭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카르도가 물었다. “재산의 상태를 확인하는 중일 뿐이다.” “사람을 재산이라 부르는 것부터 문제가 있군.” 카르도의 발끝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전쟁신의 힘이 흔들리자 흰 선들이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라엔은 웃었다. “카르도, 네 병사들의 보급 창고도 원점 인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었나?” 카르도의 표정이 굳었다. 군대의 무기와 치료 보급을 인질로 잡는 말이었다. 그는 함부로 칼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선을 신전 밖으로 물리며 병사에게 주민 대피로를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하율은 그동안 라엔의 지팡이에서 나온 선을 관찰했다. 선들이 사람의 몸을 직접 묶는 것은 아니었다. 신성한 표시를 실제 시설의 허가 정보와 연결해 잠금 장치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신전 주방의 수도가 멎자 마르타가 밖에서 소리를 질렀다. “신님! 오늘 설거지는 또 안 하겠다는 계략입니까?” “제가 일부러 수도를 잠갔다고 생각하시면 너무합니다!” 하율은 수동 밸브를 찾아 물을 다시 열었다. 반면 치료소의 냉각기는 원점 신성 인증이 남아 있어서 수동으로 돌릴 수 없었다. 주민들의 의료 자재가 상할 위험이 생겼다. 재하는 라엔을 향해 돌아섰다. “제 몸이나 편지를 회수하겠다는 건 이해 못 하겠지만, 이 동네 약까지 건드릴 겁니까?” “원점 질서가 유지되면 공급은 재개된다.” “협박이군요.” “질서를 설명하는 것이다.” 세리아는 라엔이 고의로 발생시킨 서비스 중단을 기록했다. 유나는 치료소의 물품 목록을 확인했고, 릴리는 주민들과 함께 변질되기 쉬운 약품을 임시 냉장고로 옮겼다. 마르타는 빵집의 지하 저장실을 내주었다. 재하의 권능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사람들이 먼저 해결했다. 작업을 마친 하율은 점검표의 맨 아래에 ‘임시 저장 성공, 장기 보관은 확인 전’이라고 적었다. 재하는 그 문구를 괜히 멋있다고 느꼈다. 아직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기록하는 태도가 천계의 웅장한 직인보다 믿음직했기 때문이다. 마르타는 내일 아침도 온도를 두 번 확인해야 한다며 노아에게 시계를 보여 줬다. 라엔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신전의 기적이 멎었는데도 마을은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 “비효율적이다. 모두에게 통일된 명령을 내리면 더 빠를 텐데.” “신님은 항상 명령을 잘못 내리니까요.” 모과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물어봐요.” 재하는 그 대답에 무척 서운해하려다가, 틀린 말이 아니라서 그만두었다. 약품을 임시 저장실로 옮기는 동안에도 흰 선은 가시골 천장 곳곳에 붙어 있었다. 하율은 일부 선이 신성한 명령이 아니라 허가 장치의 상태 표시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붉게 빛나는 선 자체를 지워도 약품 냉각기가 다시 작동하진 않았다. “그럼 지금 해야 할 일은 뭔가요?” 재하가 물었다. “냉각기가 멈추기 전과 후의 온도 기록을 남기고,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물품부터 옮겨야죠. 이후에는 대체 전원과 수리 부품이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릴리는 치료소의 문을 열어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사실을 설명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말도 빼지 않았다. 어떤 보호자는 겁이 나서 약을 당장 다른 지역으로 옮기자고 했고, 어떤 사람은 추운 날씨에 이동시키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제가 신님께 부탁하면 바로 고쳐 주실까요?” 한 노인이 물었다. “가능한 일을 알아보고 있어요.” 릴리가 답했다. “신님이 지금 이 기계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노인의 표정은 실망스러웠다. 릴리 역시 마음이 아팠다. 예전 같으면 기적을 약속하며 불안을 덮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기대가 무너지면 피해는 다시 환자의 몫이 된다. 그녀는 대신 노인에게 지금 필요한 약의 보관 조건을 읽어 주고, 어떤 상태가 되면 다른 치료소에 연락할지 설명했다. 마르타의 저장실에서는 임시 냉각 상자를 설치했다. 빵집 주방의 열기가 아래로 내려오지 않게 두꺼운 판을 덧댔고, 온도계를 두 개 달았다. 하율은 어느 수치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측정을 반복했다. 재하는 자신이 보기엔 둘 다 비슷하다고 했다가 또 한 번 기술자의 한숨을 들었다. “신님, 비슷해도 다른 상황이 있어요. 약에는 허용 범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 재는군요.” “그리고 한 사람이 잘못 읽어도 다른 사람이 확인할 수 있게요.”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점관리국의 단독 확인과 가장 다른 점이 바로 거기 있었다. 숫자를 하나로 통일하지 못한 게 약점이 아니라, 서로 대조할 수 있도록 남겨 둔 것이 장점일 수 있었다. 오후 늦게 라엔이 냉각실을 찾아왔다. 그는 기술자들이 맨손으로 분해한 부품을 보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원점 인증이 없는 정비는 향후 보증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다.” “지금 고장 난 걸 방치하면 피해가 생깁니다.” 하율이 말했다. “통일된 품질 관리 규정은 모두를 보호한다.” “그 규정으로 수리를 막아 놓고 장비가 고장 나면 누구 책임입니까?” 라엔은 대답 대신 부품 표면의 규격을 확인했다. 정작 그 부품은 원점관리국이 독점 공급하던 회사 제품이었다. 신성 인증을 받았다는 표식이 있었지만 수리할 수 있는 메뉴에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에반이 조용히 말했다. “그 비밀번호 체계를 제가 광고한 적 있습니다. ‘안전하고 빠른 통합 관리’라고요.” “그 시절 광고 문구의 묘비를 세우시죠.” 재하가 말했다. “좋습니다. 다만 묘비 건립 비용은 제 개인 돈으로 내겠습니다.” 라엔은 이런 농담이 왜 나오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크게 웃지 않았다. 부품 하나가 멈추면 환자의 약이 위험해진다는 사실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율은 라엔에게 최소한의 수리 권한을 요청했다. 라엔은 그 요청을 서면으로 내라고 했다. “이미 냈습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아침에 두 번, 낮에 한 번. 모두 접수 완료로 표시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응답을 기다려라.” “응답이 오기 전에 사람이 피해를 입으면 그 피해도 기록해야 합니다.” 세리아의 말에 라엔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원점의 질서를 지키려고 하지만 그 질서가 일으키는 실제 위험을 보려 하지 않았다. 가시골 사람들은 그 틈에서 작은 선택을 했다. 응답이 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신, 할 수 있는 안전 조치부터 한 것이다. 해가 진 뒤 도요 고원의 기술 담당자가 연락을 보내왔다. 원점관리국의 인증 장치와 호환되는 독립 전원 장치를 실험한 적이 있다며 도면을 제공했다. 철비항 구조대는 부품의 운송을 돕겠다고 했다. 그 지역들 역시 과거 강제 계약에 묶여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도울지 스스로 정할 수 있었다. 재하는 통신창의 작은 얼굴들을 바라봤다. 자신이 한 사람의 신도를 얻기 위해 거리를 헤매던 날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제 많은 사람이 서로를 돕고 있었지만 그 도움을 재하의 신앙 포인트로 환산할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안전하게 교체할 수 있는지는 우리가 결정하겠습니다.” 하율이 말했다. “기술자들이 검증을 마치기 전에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재하는 짧게 대답했다. “이번만큼은 제가 부품 대신 응원을 드리겠습니다.” “응원은 가능하지만 작업대는 치워 주십시오.” 재하는 얌전히 의자를 옮겼다. 라엔이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신이면서 시키는 대로 의자를 나르는 광경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재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쪽도 도와주실 거면 의자 하나 드릴까요?” 라엔은 아무 말 없이 나갔다. 그가 남긴 흰 선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선 밖의 사람들은 이미 다음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날이 저물 무렵 라엔은 하루의 유예를 선언했다. 유예가 끝나면 원점관리국은 지구 편지와 재하의 생성 기록을 함께 압류하겠다고 했다. 세리아는 즉시 공동 경유실에 이의 신청을 보냈다. 하지만 라엔이 제출한 관할 규정은 너무 오래돼, 적용을 정지할 임시 심리 주체조차 표시돼 있지 않았다. 그때 에반이 사라진 서류 한 장을 들고 나타났다. 낡은 홍보 계약서였다. 그가 과거 원점관리국의 외주 업무를 맡았을 때 받은 서식이라고 했다. 계약서 맨 아래에는 ‘원점이 창설되기 전의 응답은 원점의 재산이 아니다’라는 예외 조항이 있었다. “제가 이걸 왜 기억하지 못했는지 알겠습니다.” 에반은 종이를 흔들었다. “광고에 쓰면 안 되는 문구였거든요. 그런데 이용 약관에는 남아 있습니다.” 재하가 활짝 웃었다. “드디어 악마가 약관을 읽어서 좋은 일을 했네요.” “신님, 제 직업 전체를 그렇게 평가하진 마십시오.” 재하는 조항의 끝을 읽었다. 원점이 생기기 전 누군가가 먼저 도움 요청에 응답했다면, 그 기록은 원점관리국의 자산이 아니었다. 문제는 하나였다. 원점이 창설되기 전의 응답을 증명할 원본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단 한 곳을 제외하면. 유나가 낮게 말했다. “제9 항로의 중앙 승강장.”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182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18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