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골 신전의 점심 메뉴는 감자수프였다. 윤재하는 숟가락을 들었다 놓기를 세 번 반복했다. 식탁 맞은편에서 노아가 그의 수프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 드실 거면 제가 먹어도 돼요?”
“안 먹는 게 아니라 생각 중이야.”
“그럼 생각은 다른 데서 하세요. 수프 식어요.”
신이 된 지 오래되면 신성한 식탁 예절도 생길 줄 알았는데, 현실은 아홉 살짜리에게 식사 속도를 지적받는 나날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아가 이제 병석에 누워 있지 않고 따뜻한 수프 한 그릇을 두고 투정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이 열리고 보관인 유나가 들어왔다. 어제 제9 항로에서 발견한 봉투를 들고 있었다. 봉투를 감싼 천은 젖지 않았는데 붉은 봉인만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보관 상태가 바뀌었습니다.”
“수신인이 확인됐어요?”
“아뇨. 수신인 칸이 반응하지 않아요. 다른 기록을 대조해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재하는 수프를 내려놓았다. 봉투 앞면에는 분명 한글로 ‘윤재하를 신으로 보낸 사람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신으로 보낸 사람’은 이름이 아니었다. 호칭인지, 기관인지, 누군가의 착각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혹시 제가 열어야 한다는 뜻 아닐까요?”
릴리가 고개를 저었다. “신님이 신이 된 당사자이긴 해도 편지의 수신인은 아니에요.”
“압니다. 그냥 혹시 하고.”
“그 ‘혹시’가 사람들 편지를 몇백 년씩 보류시켰잖아요.”
재하는 입술을 다물었다. 릴리가 자신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수백 번 반복된 잘못을 짚는다는 걸 알았다.
유나가 문서 두 장을 꺼냈다. 하나는 제9 항로의 보관 규정, 다른 하나는 복수 세계 공동 경유실의 외부 우편 규정이었다. 두 곳 모두 본문 열람 전에 수신 자격을 확인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순서가 달랐다. 첫 번째는 발신자의 지정 의사를 확인하도록 했고, 두 번째는 수신을 주장하는 자에게 확인 권한을 먼저 부여했다.
“둘 중 하나를 적용해야 합니다.” 유나가 말했다.
“어느 쪽이 새 규정이죠?”
“두 번째가 더 새롭습니다.”
“그럼 새 규정이 낫겠네요.”
에반이 자리에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신님, 새 제품이 좋은 제품이라는 생각은 마케팅업자가 가장 좋아하는 오해입니다.”
“그런 말은 당신이 하지 마요.”
“제가 해 봐서 압니다.”
재하는 문서를 다시 읽었다. 두 번째 규정을 적용하면 스스로 수신인이라고 주장하는 강력한 신격이나 기관이 먼저 열람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과거 검증실이 강제 승계의 증거를 독점하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봉투를 보관차에 남겨 두고, 발신자에게 본문 열람을 승인할 의향이 있는지 묻는 회신을 보내기로 했다. 문제는 발신인의 이름이 없다는 점이었다.
[발신 경로: 지구 외부 응답망]
[응답 후보 000001과 동일한 경유선]
[실명 표시: 비공개]
[발신 의사 확인: 유효]
“이 경유선이라면 후보 000001에게 편지를 보낸 셈이 되지 않습니까?” 세리아가 물었다.
“아니요.” 유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같은 우체국을 이용했다고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들은 동의 요청을 보낼 때도 후보 번호를 기입하지 않았다. 대신 발신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 응답만 기록했다. 수신인 확인에 필요한 범위의 설명 허용, 계속 봉인 유지, 원래 세계로 반송. 어떤 답을 골라도 연락처와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세리아가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회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열람 보류가 원칙입니다.”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신이 되고 나서 기다리는 일만 배운 것 같아요.”
하율이 밖에서 들여다보았다. “다리 공사가 끝나려면 나흘 더 걸립니다. 기다리면서 자재 운반을 하시면 됩니다.”
재하는 조용히 숟가락을 들었다. 기다리는 중에도 할 일은 많았다.
그날 오후, 노아는 편지함에 붙일 표지판을 그렸다. ‘받는 사람이 정해질 때까지 누구도 뜯지 않아요.’ 글씨의 마지막 획이 삐뚤었지만 뜻은 분명했다. 마르타는 비에 젖지 않도록 표지판 위에 지붕을 달았고, 모과는 주민회의에서 그 문구를 확인해 주었다.
동의 요청을 보낸다고 해서 상대가 반드시 답할 의무가 생기지는 않았다. 실라는 그 사실을 특히 강조했다. 귀가선이 원래 지키던 규칙에는 ‘재촉하지 않는 응답’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한 번 보낸 질문에 답이 오지 않으면 기다림의 이유를 조사할 수는 있지만, 상대의 침묵을 벌금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재하는 그 말을 듣고 지구의 휴대전화 알림을 떠올렸다. 업무 메신저를 읽고도 대답하지 못하는 밤이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출근하면 상사의 첫 질문은 대개 일이 아니라 왜 어제 답을 안 했느냐는 것이었다. 죽어서 신이 되었는데 비슷한 독촉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어느 정도 기다릴까요?” 그가 물었다.
“기한을 발신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다릅니다. 다만 보관 상태를 점검할 주기는 정해야 합니다.” 실라가 말했다. “가령 봉인이 손상되지 않았는지 하루마다 확인하는 식으로요.”
유나는 기록 보관대를 세 구역으로 나눴다. 첫째는 본문을 열람할 수 없는 봉인 보관, 둘째는 수신 자격만 확인하는 검증, 셋째는 당사자가 허락한 문장만 다른 곳에 전달하는 구역이었다. 그동안 공동 경유실은 이 세 기능을 한 책상에서 처리해 왔다. 그러니 누가 봉투의 주소를 확인하러 왔다가 본문까지 보는 일이 생겼다.
“이렇게 나누면 자리가 세 배나 필요하겠네요.” 에반이 말했다.
“세 배로 늘려야 할 건 자리보다 책임입니다.” 유나가 대답했다. “같은 사람이 확인하고 기록하고 혼자 승인하면 나중에 자기 실수까지 감출 수 있으니까요.”
재하는 자발적으로 책상 운반을 맡았다. 신성한 손으로 종이 상자를 들어 옮기는 일은 멋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편지를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돕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문제는 상자의 크기를 제대로 읽지 않고 문턱을 지나려다 반쯤 걸렸다는 점이었다.
“신님, 세워서 들어요.” 하율이 말했다.
“세우면 흔들리는데요.”
“그러니까 두 사람이 함께 드는 겁니다.”
릴리가 옆에서 상자를 받쳐 주었다. 그녀는 재하가 신이라고 해서 무게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라며 웃었다. 재하는 작은 일 하나에도 도움을 받으면서 ‘신도를 늘려 힘을 얻겠다’고 외쳤던 처음을 떠올렸다. 그때는 누군가에게 기대면 신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오히려 도와 달라고 물을 수 있는 것이 자신이 배운 기술이었다.
오후에는 주민회의가 열렸다. 사적인 편지 한 통 때문에 신전의 창고와 통신 설비를 사용해도 되는지 묻는 자리였다. 모과는 발신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필요한 공간과 인원, 보관 기간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반대 의견도 나왔다. 한 주민은 며칠 전 공동 수로의 누수 점검이 미뤄졌다며, 재하가 자신의 과거에만 신경 쓰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재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과거가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설을 쓰는 사람들이 비용을 부담한다면,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고 해서 공공 업무가 저절로 밀려도 되는 건 아니었다.
“수로 점검은 오늘 끝내겠습니다.” 재하가 말했다. “편지 보관은 공동 경유실의 예산으로 처리하고, 신전 창고를 쓴 시간과 물품은 따로 기록하겠습니다.”
“신님 돈은 어디서 나는데요?” 마르타가 물었다.
“신의 권위로…….”
“그런 예산 항목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논쟁 끝에 주민회는 보관 작업에 신전의 일부 공간을 일주일만 제공하기로 했다. 그 뒤에는 다시 승인받아야 했다. 노아는 왜 사람들이 이렇게 귀찮은 회의를 하냐고 물었다. 릴리는 사람이 서로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어떤 사람은 편지가 급하고 어떤 사람은 물길이 급하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고 말하려면 누군가는 서로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 했다.
저녁 무렵 수로 점검을 마친 재하의 옷은 진흙투성이였다. 에반이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신님, 고객을 모으려면 오늘 같은 모습은 홍보에 쓰지 마십시오.”
“어떤 모습이 좋은데요?”
“하얀 옷, 먼 곳을 바라보는 눈, 뒤에서 내려오는 빛.”
“그럼 실제로 수로를 고치는 사람은 화면 밖에서 일해야겠네요.”
에반은 입술을 다물었다. 누구의 얼굴이 나오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홍보를 하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사이 봉투의 운송 기록이 하나 더 드러났다. 지구에서 발송된 뒤 천계의 여러 부서가 먼저 내용을 읽으려 했지만 전부 실패했다는 로그였다. 실패 사유는 보안 장치의 오류가 아니었다. 발신인이 설정한 ‘수신인 확인 전 본문 열람 금지’ 조건이 변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선택이 제대로 지켜졌네요.” 릴리가 말했다.
“아직입니다.” 유나가 답했다. “끝까지 지켜지는지 봐야죠.”
재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대개 ‘이제 다 해결됐다’고 믿는 때였다. 그는 기록표에 자기 이름 대신 당번 시간만 적었다. 야간 보관 책임을 맡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유나였고, 자신은 그 시간에 필요하면 상자를 옮기는 도우미일 뿐이었다.
밤 당번을 바꾸는 시각이 되자 재하는 봉투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편지 한 통을 지키려는 것이 그의 옛 기억을 찾으려는 열망과 섞이기 쉬웠다. 그래서 다음 당번에게 넘길 때는 자기 추측을 쓰지 않았다. 봉인의 상태, 마지막 확인 시각, 요청한 동의의 범위만 남겼다. 누군가 다음 날 기록을 읽더라도 재하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보관 상태가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있게 했다.
유나는 기록을 살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좋은 인계입니다.” 재하는 이상하게 뿌듯했다. 신격을 얻은 날부터 처음 듣는 제대로 된 업무 칭찬 같았다. 그러나 유나는 곧 창고의 빈 상자 세 개를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이건 분리수거장으로 옮겨 주세요.” 칭찬의 유효기간은 역시 매우 짧았다.
해가 기울 무렵, 봉투가 아주 가볍게 떨렸다. 유나가 봉인의 온도를 확인했다. 그 안에서 뜨거운 빛 대신 미세한 종이 마찰음이 들렸다.
[발신인 의사 확인 요청: 도착]
[응답: 수신인 확인 설명을 허용합니다. 단, 본문과 발신인의 신원은 공개하지 않습니다.]
재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최소한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 있게 됐다. 유나는 응답과 함께 도착한 짧은 확인문을 읽었다.
[수신인은 단일 신격, 관측 기관, 천계 부서가 아닙니다.]
[수신인에게 적용되는 명칭: 처음으로 손을 내민 자들.]
재하는 문장을 두 번 읽었다. 한 사람도 아니고 한 신도 아닌 ‘자들’. 제9 항로에서 확인한 아홉 구조자의 기록이 떠올랐다. 최초의 신이 한 인물이 아니라 서로를 구하러 갔던 여러 사람의 선택에서 비롯됐다는 기록. 편지를 받을 대상은 바로 그 선택을 이어 온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그날 저녁 기록실의 당번표에는 재하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민들이 지키는 다리의 못이 빠진 곳을 점검했다. 손바닥에 진흙이 묻었지만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누군가의 편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의 하루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그 시간을 함부로 멈추지 않기로 했다.
그때 오래 잠잠하던 지구 경유망의 종이 울렸다. 세리아의 눈앞에 경고창이 나타났다.
[수신 권한 주장 접수: 천계 원점관리국]
[주장 사유: 모든 신격 생성 기록의 최초 소유자]
[봉투 인도 요구까지: 24시간]
“원점관리국?” 재하가 물었다.
에반이 웃음을 멈췄다. 평소 같으면 기관의 로고부터 비판했을 악마가 조용히 봉투만 바라보았다.
“그 이름은 홍보 자료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에반이 낮게 말했다. “천계가 신을 만드는 기관은 여러 곳이라고 했잖아요. 틀린 건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 처음부터 출입문 하나를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재하가 물었다. “그게 누구예요?”
“이름 대신 직책으로 불립니다.” 에반은 잠시 말을 멈췄다. “원점 공증자.”
재하는 빈 편지함을 바라봤다. 한 사람의 편지에 수신인이 누구인지 묻는 일부터 시작했는데, 이제 천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관이 모든 신의 최초 소유자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소유자라니.” 그가 중얼거렸다. “신이 회사 비품도 아니고.”
노아가 옆에서 고개를 들었다. “신님, 그럼 망가뜨리면 변상해야 해요?”
“저는 원래 변상할 돈도 없었는데.”
누군가 웃을 만한 질문이었지만 아무도 크게 웃지 않았다. 재하는 봉투를 다시 유나에게 돌려주었다.
“그 기관이 뭐라고 주장하든, 발신인의 허락 없이 넘기지 맙시다.”
이 작은 원칙 하나를 지키는 데 또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질지 그는 아직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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