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수 명령서에는 큰 글씨로 ‘적법’이라고 적혀 있었다.
윤재하는 그 단어가 제일 수상했다.
“적법하다고 맨 위에 써 놓으면 실제로도 적법해지는 건가요?”
미르켈은 놀랍게도 웃지 않았다. 그는 절차가 적법하다고 믿었고, 지금까지 그 믿음 때문에 불편한 질문을 받지 않았다.
“담보청은 미실현 기대 신앙을 관리할 법적 권한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럼 기도를 거절한 사람도 자동으로 동의했다는 말입니까?”
“해당 기록은 소유자 미상의 자산으로 분류됩니다.”
“소유자를 모른다는 것과 소유자가 없다는 건 다르죠.”
재하의 말에 회수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검은 장갑의 손끝이 유리병에 닿자 병이 연기처럼 흐려졌다. 안에 있던 작은 빛이 검은 숫자로 변했다.
릴리가 낮게 신음했다.
“저걸 그냥 가져가게 둘 수는 없어요.”
“우리가 대신 가져가서도 안 되죠.”
재하가 답했다. 말은 쉽지만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병을 부수면 그 안의 기록도 사라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회수 기사를 때려눕힐 힘은 없었다.
누리가 종이 손을 들었다.
“보존소 운영 규칙 제3조. 원소유자가 확인되지 않은 기록의 반출에는 원기록자 또는 정당한 공익 열람인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공익 열람인이 누군데요?” 재하가 물었다.
“공동 기록을 남긴 지역에서 적법하게 대표 권한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리아가 주머니에서 유리포 확인서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우르센의 진술과 공동 회관의 기록 보존 위임장입니다.”
미르켈의 동공에서 장부가 빠르게 돌아갔다.
“해당 문서는 강변 시설 보수의 증언이지, 기록 처분 동의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세리아가 차분히 대꾸했다.
“그러니 귀하도 처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최소한 저 마을 기록에 대해서는 원 소유자 확인 전까지 그대로 보존해야 합니다.”
누리가 작은 망치를 두드렸다. 유리병의 검은 빛이 멈췄다.
[유리포 관련 기록 1,804건: 처분 정지]
[사유: 대표 열람권자 이의 제출]
미르켈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이의 신청 자체가 기적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알아요. 하지만 가져가지는 못하겠네요.”
재하는 나머지 선반을 바라봤다. 유리포의 기록을 지켰다고 해서 모든 기록이 안전해진 건 아니었다. 다른 지역에서 온 병들은 여전히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중 몇 개는 이미 담보청 수레로 옮겨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어떻게 합니까?” 릴리가 물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의 의사를 확인해야죠.”
“지금 당장요?”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기록을 남겨야 해요.”
그중 가장 앞쪽에 놓인 병의 번호를 보고 에반이 발을 멈췄다. 그 병은 다른 것보다 색이 흐렸다. 안쪽에서 흔들리는 빛이 너무 약해 금방 사라질 것 같았다.
“이런 건 오래 방치하면 무엇이 되는지 알아?”
그가 재하에게 물었다.
“모릅니다.”
“계정에서 사라져. 기록이 소멸하는 건 아니야. 다만 사람이 남긴 바람의 내용이 지워지고 숫자만 남지. 그때부터는 누가 왜 기도했는지도 아무도 알 수 없어.”
재하는 병 바깥쪽의 숫자를 살폈다. 몇 차례나 새로 찍은 흔적이 보였다. 신앙이 거래될 때마다 정산 단위가 바뀐 것이었다.
“기록을 남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기록 방식도 중요하군요.”
“응. 아무나 읽을 수 없게 보관하는 것과, 아무도 되찾을 수 없게 만드는 건 다르니까.”
안나는 지하에 내려오자마자 방직 작업장 시절에 보았던 상표를 알아봤다. 포장용 천 한쪽에 작은 매듭 세 개가 있었다. 겉으로는 구호품 표시였지만 실제로는 작업장에서 따로 분류한 신성 원료를 뜻했다.
“이 표시는 어디로 보내는지 아세요?”
“아는 만큼 말씀해 주세요.” 세리아가 답했다.
안나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작업장의 관리자는 특별 주문품이라는 말만 했고, 일반 천보다 비싼 값을 받았다. 완성된 상자에는 신전 이름 대신 담보청이 발급한 거래 번호가 찍혀 있었다.
“우리는 그냥 치료실로 가는 물건이라고 생각했어요.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서요.”
재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안나 씨가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고 운반했나요?”
“아뇨. 상자도 열 수 없었어요.”
“그럼 모르는 부분은 모른다고 적으시면 됩니다. 불필요한 책임까지 떠안지 마세요.”
안나는 잠깐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전 작업장에서 하던 모든 일이 나쁘다고 결정돼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곳에서 번 돈으로 미로를 먹여 살렸고, 동료들 중에는 지금도 그 일자리 말고 선택할 곳이 없었다.
“그 일터도 없어지나요?”
“우리가 지금 멈추려는 건 동의 없는 신앙 거래예요. 그곳에서 만든 천까지 모두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불법 거래와 합법적인 노동은 분리해 조사할 겁니다. 증거가 나오면 관련자별 책임을 따져야겠죠.”
안나는 그제야 자기가 본 매듭의 위치와 포장 방식을 자세히 설명했다. 에반은 숫자와 매듭을 연결하더니, 어느 지역으로 운송되었을지 추정한 목록을 만들었다. 그가 과거의 일을 잘 안다는 사실이 아프게 드러났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세리아는 명부를 확인하다 눈살을 찌푸렸다. 재하와 함께 조사하던 중에는 한 번도 자기 기관의 기록을 이렇게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시스템이 보내 주는 숫자라면 대체로 믿었다. 누군가 그 숫자를 일부러 지웠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목록에는 회수 기사가 누군지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 이름을 기록하라고 하세요.”
“기사들은 익명으로 근무합니다. 업무상 위해를 피하기 위해서요.”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사정도 있겠죠. 다만 기록한 기관의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남길 수 있지 않나요?”
세리아는 수정판에 한 줄을 추가했다.
[집행기관 관리책임자 확인 요청]
회수 기사 하나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삼켰다. 재하는 그 기사가 명령을 내린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했다. 누가 시켜서 어떤 일을 했는지 따지는 일도, 실제로는 쉬운 정의가 아니었다.
병들을 모두 옮기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회수관은 번호가 잘 보이지 않는 병부터 수레에 실었다. 재하는 누리에게 병이 원래 어느 선반에 있었는지 묻게 했다. 누리는 한 병도 빠짐없이 대답했다. 종이 인형에게는 수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보존 기록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움직임을 멈추면 좋겠어요.” 릴리가 말했다.
“멈출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찾아야지.” 세리아가 답했다.
재하는 유리포 증언서에 적혀 있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렸다. 공동의 기록을 맡은 사람은 그 마을 사람의 허락 없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원계약이 아직 효력을 가진다면 바로 그 한 줄이 도움이 될지 몰랐다.
“세리아 씨, 압수 명령이 불법인지 단정하지는 맙시다. 대신 계약에 따른 처분 권한이 증명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합시다.”
“법정에 설 생각입니까?”
“이미 섰잖아요. 이번에는 서류라도 더 챙겨 가려고요.”
릴리가 웃었다. 얼마 전에는 아픈 동생 때문에 신이 되었다는 남자를 믿었고, 지금은 그 남자가 장부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더 믿게 되었다. 무턱대고 기적을 쓰지 않는다는 게 때로는 다른 사람을 지키는 길이었다.
그들은 회수된 병의 번호와 반출 시간을 빠짐없이 적었다. 세리아는 명령서 사본에 이의 표시를 했고, 누리는 별도의 보존 장부에 빠져나간 기록을 남겼다. 에반은 말없이 기사들이 나르는 상자의 규격을 적었다.
“왜 상자 크기를 적어요?”
“나중에 누가 무엇을 어디로 옮겼는지 추적하려고. 이건 내가 잘하는 일이야.”
지상의 종이 울릴 무렵, 갑자기 회수 기사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미르켈의 수정판에 붉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회수 대상 중 실사용 중인 응급 치료 신성 확인]
[외부 계약 지출분 회수 시 현장 치료 서비스 중단 가능]
재하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에반이 대답했다.
“담보청이 가져가는 신성 중 일부는 리아넬 같은 치료 신전에 빌려 준 거야. 계약을 갑자기 취소하면 그 신전의 치료실도 영향을 받아.”
“그럼 무조건 회수하지 말아야 하나요?”
“그것도 문제지.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것을 치료 중이라는 이유로 무한정 빌려 쓰게 둘 수도 없잖아.”
재하는 한동안 생각했다. 강둑에서 마주한 상황과 같았다. 한쪽을 살리기 위해 다른 쪽을 침수시키는 쉬운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산 중지와 치료 중단을 구분합시다.”
세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죠?”
“담보청이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권리만 정지하고, 이미 치료받기로 한 사람에게 공급하는 신성은 갑자기 끊지 않는 거예요. 새로운 계약은 당사자 동의를 받아야 하고요.”
“그걸 어떻게 법적으로 설명합니까?”
재하는 무상의 약속을 떠올렸다. 붉은 실과 검은 실 사이에 투명한 줄이 있었다. 기적을 사용하기로 한 약속과, 그 약속을 뒷받침한다는 담보 계약은 분명히 다른 줄이었다.
“권리를 돌려주기 전에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필요는 없잖아요.”
재하가 투명한 줄은 그대로 두고 검은 줄의 매듭을 건드렸다.
[소유권 주장 분쟁 표시]
[기존 응급 치료 공급 계약: 유지]
[신규 담보 거래: 임시 보류]
[소모 신성: 18포인트]
순간 그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유리병들을 통해 권능을 확장하는 것은 한두 사람의 계약을 풀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몸 안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에반이 그를 부축했다.
“이런 짓을 왜 혼자 해!”
“혼자 해야 하는 일인 줄 알았으니까요.”
“신격이라고 해서 모든 책임을 대신 질 필요는 없어.”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에반이 그동안 가장 자주 하던 말은 신앙 포인트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었으니까.
미르켈은 상황을 지켜보다 조용히 명령서를 접었다.
“귀하는 담보 거래를 중지시켰습니다. 이것은 원채권 심사와 별개로 신계 질서를 교란한 행위입니다.”
“제가 한 일은 기록을 임시 보존한 겁니다.”
“분쟁의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그럼 함께 범위를 좁힙시다. 실제 동의가 있는 계약부터 확인하면 되잖아요.”
미르켈은 잠깐 주저했다. 서류에는 그렇게 하는 절차가 없었다.
“제 판단 권한 밖입니다.”
“그럼 판단할 사람한테 올려 주세요.”
그는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떠나기 전 마지막 통지서를 남겼다.
[신앙 담보청 본부 심리 회부]
[원채권 확인 심리: 2일 후]
[관련 지역 신성 공급 제한 검토]
계약의 처리를 잠시 멈춘 뒤에도 재하는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에반은 물병을 건넸다. 신격이 기적을 쓸 때 소모하는 포인트와 실제 몸에 남는 피로가 같지 않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음에 이런 일을 하려면 범위를 미리 정해야 해. 지금 네가 한 건 이 방 전체의 계약을 한꺼번에 붙잡은 거라고.”
“사람 몇 명을 보호할 때하고 차이가 크네요.”
“그래. 그리고 이번에는 정산을 영원히 취소한 것도 아니야. 조사하는 동안 무단 처분을 막은 거지.”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치료받을 사람들까지 위험하게 만들지는 않았으니까.”
“그건 아직 지켜봐야 해.”
에반은 장부를 펼쳤다. 일부 치료 기적은 공급 계약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나중에 권리 확인이 길어질 수 있었다. 환자들에게는 언제, 어떤 이유로 공급이 달라질 수 있는지 알려야 했다.
세리아도 그 점에 동의했다. 그녀는 치료기관에 보내는 별도 통지서를 만들었다. 이번 임시 보전이 기존 치료를 중단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명시했다. 사람들을 위해 시작한 일이라면 그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 먼저 설명하는 것이 맞았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노아가 재하에게 달려왔다. 아이는 체온이 많이 내려가 있었고, 얼굴에 혈색도 돌아왔다. 릴리는 의사의 소견대로 쉬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님, 오늘은 무슨 기적을 쓰셨어요?”
재하는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받던 치료가 갑자기 끊기지 않게 잠깐 묶어 놨어.”
“그게 기적이에요?”
“글쎄. 서류 작업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노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도 사람 살리는 거네요.”
그 말에 재하는 웃으려다 멈췄다. 지붕 위로 검은 구름이 움직였다. 담보청이 제시한 심리까지는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신전 입구에 새 표지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불법 신성 거래 혐의: 윤재하 신전]
[신앙 거래 주의 지역]
누가 달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에반은 문구를 한 번 읽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진짜로 홍보가 시작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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