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승강장의 철문에는 아홉 손의 흔적이 있었다. 여덟 개는 뚜렷했고 마지막 하나는 의도적으로 지워진 것처럼 보였다.
윤재하는 잠시 문을 바라봤다. 초보 신이었을 때라면 이런 장면에서 ‘잊힌 신의 봉인이군’ 하고 근엄하게 외쳤을 것이다. 그럴 권능이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상당히 멋진 모습이었을 테다. 그러나 이제 그는 봉인을 보자마자 누가 설치했고 누가 열 수 있는지부터 궁금했다.
“손바닥을 대면 열리는 장치면 설명서도 있어야죠.”
“그 시대에는 설명서를 잘 안 만들었습니다.” 모나가 말했다.
“과거가 항상 낭만적인 건 아니군요.”
하율은 문 주변의 홈을 살폈다. 낡은 물길 아홉 개가 문으로 모여 있었고, 그중 마지막 홈은 막힌 게 아니라 따로 이어져 있었다. 물길은 한곳에 모이지 않고 각각 다른 높이에서 멈췄다.
“여덟 손으로 문을 여는 구조가 아닙니다. 아홉 손이 각각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어요. 하나라도 다른 선택을 하면 그 상태를 유지하는 장치예요.”
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찾는 원본은 문을 열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을 거야. 그 마지막 홈을 따라가 보렴.”
릴리는 하율과 함께 별도 물길을 따라갔다. 모나는 그동안 아홉 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폭우가 지나간 뒤 강가의 사람들은 서로의 도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누가 가장 큰 배를 빌려줬는지, 누가 밤새 횃불을 들었는지, 누가 물속에서 아이를 건져냈는지. 처음에는 고마움을 기억하기 위한 표시였다.
그러나 기록은 빠르게 달라졌다. 사람들은 다시 큰물이 나면 누구에게 달려가야 하는지 알고 싶어 했고, 그 표시는 역할이 되었다. 역할은 기대가 되었고 기대는 언젠가 명령처럼 읽히기 시작했다. 당시 강가의 아홉 구조자는 더 오래 도울 방법을 논의했다. 여덟 사람은 공동으로 사용할 보관소를 세우자고 했고, 마지막 한 사람은 그곳이 누군가의 의무를 강제하지 않기를 바랐다.
“반대한 사람은 구조를 싫어했나요?” 에반이 물었다.
“오히려 제일 먼저 물에 들어간 사람이었어.” 모나가 말했다. “하지만 언제든 돕겠다는 마음과 언제든 도울 의무는 다르다고 했지. 그 사람은 떠날 자유도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어.”
그 대답을 들은 재하는 한참 생각했다. 신도 한 명을 처음 얻었을 때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떠올랐다. 릴리는 병든 동생을 품고 왔고 그는 밤새 곁에 있었다. 처음 신앙 포인트가 생기자 곧바로 치료에 썼다. 하지만 릴리가 이후 평생 자신의 신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런 약속을 강요할 수 없어서였다.
“그 사람이 옳았다고 단정하려는 건 아닙니다.” 재하가 말했다. “공동 보관소도 필요했겠죠. 하지만 반대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남아야 해요.”
카르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군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자원해서 위험한 곳에 갔던 병사를 언제나 자원할 사람으로 계산했다. 결국 병사가 거절하면 배신이라고 불렀지.”
“그런 판단은 아직도 하고 계세요?” 릴리가 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규정을 바꾸고 있다. 하지만 내가 바꾼다고 모든 부대가 따르는 건 아니다.”
중앙 승강장 너머에서 종이 울렸다. 하율이 낮은 물길의 끝을 찾아냈다는 신호였다. 일행이 합류하자 바닥 아래에 작은 목함이 나타났다. 상자는 물에 잠겨 있었지만 안의 돌판은 마른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뚜껑에는 아홉 자리가 그려져 있었고 마지막 자리에서만 작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세리아는 열기 전에 모나에게 물었다. “누가 이 자료를 열람할 수 있게 정했습니까?”
“원래는 아홉 사람 중 누구나 열 수 있었어. 지금 그 사람들이 없으니 공개에 관한 합의가 남아 있는지 확인해야겠지.”
목함 옆에 긴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가 한 일을 기억하는 것은 막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각자 말하게 둘 것. 이 문장은 누구에게나 보여 줘도 좋다.’
“이건 공개 동의가 있네요.” 유나가 말했다. “개인의 다른 기록이 있으면 구분해 보관해야겠지만요.”
목함 안에는 돌판과 나뭇조각 몇 개가 있었다. 돌판에는 분명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하나의 신이 아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먼저 가 보자. 갈 수 없는 사람은 그 이유를 숨기지 말자. 돌아오지 못한 사람을 잊지 말자. 그러나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의무를 물려받지는 않는다.’
재하는 그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어떤 고대의 초월자가 계시처럼 남긴 문장이 아니었다. 강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한 약속이었다. 그 약속이 오랫동안 살아남았기에 훗날 신앙의 시작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이걸 그대로 전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전해도 되지.” 모나가 말했다. “다만 모든 사람의 기도가 이 돌판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하진 마. 세상의 역사는 한 곳에서만 흐르지 않았으니까.”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최초’라고 부르고 나면 다른 곳의 이야기를 지워 버리기 쉬웠다. 그는 그 함정을 여러 번 봤다. 최초의 신도, 최초의 구조 편지, 최초의 거절. 각각은 어떤 기록의 첫머리일 뿐, 세상 모든 일을 독점하는 원인이 아니었다.
그때 목함 안에서 더 작은 종이 한 장이 발견됐다. 고대의 돌판과 달리 비교적 최근의 종이였다. 우편열차의 인장과 비슷한 무늬가 찍혀 있었고, 징수관 베르의 서명도 보였다.
[원형 계약을 제9 항로 전용 보관으로 전환.]
[비공개 사유: 분산된 동의는 정산 효율을 저하시킴.]
에반이 입술을 깨물었다. “숨긴 이유를 아주 솔직하게 적었군요.”
세리아는 종이를 빛에 비춰 보았다. 베르의 서명 옆에는 검은 우편열차의 옛 감독관 직인도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후대의 개입이었다. 원형 계약을 지우거나 훼손하지 않았지만, 열람을 막아 법적 효력이 없는 것처럼 만든 것이다.
“원본이 사라진 게 아니었어요.” 유나가 말했다. “누군가 찾을 수 없게 옮겨 놓은 거예요.”
돌판을 기록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빛을 한쪽에서만 비추면 글씨 몇 자가 사라져 보였다. 하율은 작은 거울로 여러 각도에서 빛을 반사했고 유나는 각도마다 보이는 글자를 구분해 적었다. 세리아는 누가 해석한 문장인지 표시했다. 모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예전 기록 보조들의 방식과 비슷하다며 웃었다.
“그 사람들도 같은 돌판을 봤을까요?” 재하가 물었다.
“같은 걸 본 사람은 많았겠지. 하지만 각자 원하는 것만 읽은 사람도 많았어.”
돌판의 가장자리에는 아홉 구조자가 남긴 작은 표시가 있었다. 하나는 배 모양, 하나는 밧줄, 하나는 등불, 또 하나는 열린 손. 다른 표시들은 지워지거나 겹쳐져 정확히 알아보기 어려웠다. 하백이 밧줄 표시를 보고 손을 뻗었다. 자기 매듭 명찰과 닮았기 때문이다.
“이 표시를 제가 써도 될까요?” 그가 물었다.
모나는 잠시 생각했다. “너는 그 표시를 소유하려는 거니, 네가 하려는 일을 설명하는 데 쓰려는 거니?”
“다른 사람에게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싶어요. 강가에서 밧줄을 매는 일을 할 수 있다고요.”
“그럼 네가 그걸 한다는 사실만 분명히 하렴. 옛사람의 자리를 네가 대신 차지한 건 아니니까.”
하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새 명찰에 자신의 이름과 ‘뱃사공’이라는 직업을 적었다. 오래된 표시를 그대로 베끼는 대신 자기가 쓰던 매듭을 추가했다. 그것은 전통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일이었다.
릴리는 돌판 아래의 작은 발자국들을 살폈다. 어른의 손자국이 아니라 아이가 남긴 듯한 흔적이었다. 아홉 구조자 중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그날의 어른들만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생겼다. 노아에게 보여 줄 생각이 들다가, 증거로 단정할 수 없으니 먼저 사진만 기록해 두기로 했다.
“왜 이런 작은 흔적은 역사책에서 빠졌을까요?” 릴리가 물었다.
에반이 대답했다. “설명하기 쉬운 이야기를 만들다 보면 자잘한 것부터 지웁니다. 영웅 한 사람이 모든 걸 해결했다는 문장에 아이들의 발자국은 잘 안 들어가죠.”
“하지만 아이들은 살아남은 이야기를 다르게 기억할 수도 있을 텐데요.”
“맞습니다. 그 가능성까지 남겨야겠죠.”
카르도는 돌판 옆의 좁은 홈을 살폈다. 옛 구조자들이 이곳에 도구를 걸어 두었던 흔적이었다. 그가 손가락을 넣자 녹슨 쇠고리 하나가 빠져나왔다. 고리에는 마모된 문구가 적혀 있었다.
‘먼저 오는 사람이 잡을 것.’
“먼저 오는 사람이 잡으라는 건 명령처럼 보입니다.” 카르도가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 썼는지를 봐야죠.” 하율이 대답했다. “구조용 밧줄을 처음 잡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게 버티라는 뜻일 수도 있어요. 누가 반드시 제일 먼저 와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카르도는 그 말을 곱씹었다. 그는 한때 병사들에게 가장 앞에 서는 것이 영광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에게도 영광이라는 말을 빌미로 무리한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이제는 누가 실제로 가능한지 확인하고 역할을 정하려 했다. 그 변화가 과거를 사라지게 하지는 않겠지만 다음 구조를 다르게 만들 수는 있었다.
재하는 돌판 가운데의 작은 배를 손끝으로 따라 그렸다. 그것은 신의 왕좌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건네던 도구였다. 누가 만든 배인지도, 몇 번이나 물에 들어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작은 배 하나가 수백 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에게 질문을 남기고 있었다.
“어떤 신화보다 어렵네요.” 재하가 말했다.
모나가 대답했다. “신화는 끝을 알고 나서 들을 수 있지만, 사람의 선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 말을 듣고 재하는 문서 끝에 한 줄을 추가했다. ‘원본에 없는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는다. 다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있음을 표시한다.’ 무척 평범한 문장이었지만 아홉 사람의 자리를 되찾는 데는 그 한 줄이 필요했다.
그들이 돌판의 공개 범위를 정하는 동안 모나는 작은 나무함을 하나 더 보여 주었다. 그 안에는 원본과 모양이 다른 사본들이 들어 있었다. 후대의 필경사들은 원본 문장을 그대로 옮긴 사람도 있었고, 편하게 읽으라고 단어를 바꾼 사람도 있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먼저 가 보자’가 ‘가장 높은 자가 모두 대신 대답한다’로 바뀐 문서였다. 재하는 두 문장을 나란히 읽고 고개를 저었다. 단어 몇 개가 달라졌을 뿐인데 행동해야 할 사람의 범위와 권한이 뒤집혀 있었다.
세리아는 문서마다 제작 시기를 분리해 정리했다. 이제 누군가 원본을 왜곡해 자신이 원하는 명령을 내리려 하면 적어도 그 차이를 보여 줄 수 있었다. 역사가 완벽해지지는 않겠지만, 역사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 줄어들었다.
베르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번에는 징수관들만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쇠수레가 따라왔다. 수레에는 검은 저울이 실려 있었고, 저울의 한쪽 접시에는 미답변 편지들이 쌓였다.
“그 원본을 옮겨도 채무는 사라지지 않는다.” 베르가 말했다. “기다린 사람의 시간은 값이 있다. 그 값을 누군가 내야 한다.”
“시간의 값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재하가 대답했다. “기다린 사람이 피해를 입었으면 그 피해를 확인하고 보상해야죠. 하지만 기다렸다는 이유로 아무나 책임자로 붙이면 안 되는 거예요.”
“누군가 책임지지 않으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그 말에 하백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날 줄을 끊었습니다. 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냈는지 확인하는 데 오래 걸렸죠. 그런데 제가 강을 건너던 사람들에게서 빚을 징수했다면, 그들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겁니다.”
베르는 하백을 무시했다. 그는 저울을 들어 올렸다. 검은 접시가 무거워지면서 물길의 흐름이 느려졌다. 저울은 실제 사람의 기다림을 힘으로 바꾸고 있었다.
“선택하라, 윤재하.” 베르가 외쳤다. “네가 미응답 전체를 떠맡거나, 이 항로가 보관하던 모든 도움의 기록을 영구 봉쇄하겠다.”
카르도가 일행을 돌아봤다. “저울의 연결 구조를 먼저 찾아야 한다. 칼로 깨면 보관 기록까지 잃을 수 있어.”
재하는 저울을 보았다. 구해야 할 사람의 목록이 아니라, 아직 구해 달라는 말을 다 전하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는 이번에도 영웅처럼 선뜻 나서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선택을 둘만 주실 거면, 제가 세 번째를 찾겠습니다.”
베르가 냉소했다. “그런 선택은 없다.”
“그 말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재하가 대답했다. “그리고 늘 어딘가에 레버가 하나 더 있었죠.”
제17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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