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백이 작은 조개껍질을 철로에 올려놓자 빈 승강장에 바람이 불었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윤재하는 민망해서 헛기침을 했다. 제9 항로가 사람의 결심으로 열린다면 적어도 장엄한 빛이라도 나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디서나 그렇듯 진짜 필요한 일은 눈에 띄지 않게 시작됐다. 낡은 철로의 모래 사이로 물이 빠지더니 선로가 드러났다.
“정말 기차가 옵니까?” 재하가 물었다.
모나가 멀리서 대답했다. “기차는 오지 않을 수도 있어. 철로는 길이고, 기차는 약속을 지킬 수단이지.”
“이곳 설명은 왜 이렇게 어려워요. 그냥 ‘걸어가세요’라고 하시면 안 됩니까?”
하율이 선로에 발을 얹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철길 상태부터 확인하죠.”
그들은 중앙 승강장으로 향하는 제9 항로의 낡은 선로를 따라 걸었다. 좌우로 얕은 물이 펼쳐졌고, 어딘가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오래된 나무 기둥에는 사람들의 손이 닿은 높이마다 표시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 강이 범람할 때 수위를 재었던 흔적이었다. 표시는 신성한 문자보다 현실적인 수치에 가까웠다.
카르도는 후방에서 걸었다. 징수관 베르가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제복의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은 물 위에도 뚜렷했다. 재하는 그들이 위협적인 무기를 들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했다가, 이곳에서 장부가 칼보다 위험할 수 있다는 걸 떠올렸다.
“저분들이 오면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에반이 물었다.
“막을 근거부터 확인하자.” 카르도가 말했다. “추적하는 것과 공격하는 건 다르다.”
재하는 그를 바라봤다. “어제부터 전쟁신님이 너무 침착해서 오히려 무섭습니다.”
“뭐라고?”
“칭찬입니다. 아마도요.”
선로 한가운데에는 허리 높이의 작은 관문이 있었다. 관문 안에는 두 갈래의 레버가 있고 그 위에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 길을 이용할 대가를 선택하시오.]
[1. 미확인 책임 전체 수락.]
[2. 수신인을 지정하지 않고 돌아가기.]
“우리가 이런 선택지를 싫어한다는 소문이 안 났나 보네요.” 재하가 말했다.
세리아가 관문을 살폈다. 레버 아래의 톱니에는 예측국에서 봤던 강제 수신 장치와 비슷한 각인이 있었다. 하지만 제작 시기는 달랐다. 오래된 관문을 누군가 나중에 개조한 것이다.
“원래 두 번째 선택지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녀가 말했다. “지금은 둘 다 승강장으로 가는 일을 막아요. 원형을 찾아야 합니다.”
하율이 바닥에 몸을 낮추고 레버의 연결부를 살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오래된 수동 개폐 장치였다. 두 레버 뒤에 봉인된 세 번째 손잡이가 숨어 있었다. 거기에는 먼지 속에 희미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임시 통행. 회신 의무 없음.]
“이런 게 있는데 왜 숨겨 놓았죠?” 릴리가 물었다.
에반이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세리아가 관문 개조 승인서에 적힌 서명을 찾았다. 은빛 바탕의 작은 문장. 징수관 베르의 관할 마크였다.
“처음부터 없던 의무를 나중에 붙였군요.”
하율은 움직이는 부분만 안전하게 분리했다. 레버를 막고 있던 검은 봉인을 떼자 지하의 물길이 조금 내려갔다. 이 관문은 물의 흐름까지 통제하고 있었다. 누군가 통행료를 내지 않으면 길뿐 아니라 홍수 때의 우회 배수까지 막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부당한 통행료 때문에 실제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 있어요.” 소미가 통신망 너머에서 말했다. 그녀는 물새골에서 보낸 배수 기록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쪽 상류 수위가 계속 올라갑니다.”
“이번에는 선택을 서둘러야겠군요.” 카르도가 말했다.
재하는 무상의 약속을 쓰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나 세리아가 먼저 경고했다. “강제 계약 조항만 정지하세요. 개폐 장치 자체가 꺼지면 배수로가 닫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재하는 힘을 약하게 조절했다. 빛은 검은 글씨에만 붙었다. ‘미확인 책임 전체 수락’ 문장이 부서지는 동안 수동 손잡이는 남았다. 하율이 손잡이를 당기자 관문이 열렸다. 물이 낮은 쪽으로 흘러가며 선로 위의 이물질을 씻어 냈다.
[강제 통행 계약: 효력 정지.]
[안전 개폐 기능: 유지.]
“권능을 이렇게 세심하게 쓰는 신은 드물 겁니다.” 에반이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지난번에 다 없애려다 기계까지 멈출 뻔했거든요.”
관문을 조사하는 동안 하율은 일행에게 바닥에 함부로 기대지 말라고 경고했다. 수로가 선로 아래를 가로지르는 지점에서는 낡은 판자가 젖어 있었다. 처음 보기에 단단했던 바닥도 사람의 무게를 받으면 쉽게 꺼질 수 있었다. 그는 얇은 쇠막대로 곳곳을 두드린 뒤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을 표시했다.
릴리는 그 표시를 따라 기록 보조를 옮겼다. 노인은 무릎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없었다. 카르도가 그를 들어 옮기겠다고 하자 노인은 먼저 자신의 물건을 챙기게 해 달라고 했다. 작은 가방에는 가족이 남긴 사진 두 장과 나무로 만든 숟가락 하나가 있었다. 전쟁신은 왜 그런 물건을 챙기는 데 시간이 필요한지 묻지 않았다.
“고마워요.” 노인이 말했다. “전쟁신이 사람을 내려놓을 때 이렇게 조심할 줄은 몰랐어요.”
카르도는 눈길을 피했다. “다칠 수 있으니까.”
“그런 걸 아는 신이면 사람들도 조금 덜 무섭겠죠.”
재하는 그 말을 듣고 카르도를 슬쩍 바라봤다. 카르도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귀 끝이 붉어졌다. 전쟁신이 칭찬에 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재하는 입술을 꾹 눌렀다. 언젠가 놀릴 기회가 생길 것이다. 단 지금은 수문부터 열어야 했다.
에반은 관문 옆의 작은 표지판을 발견했다. 어쩐지 광고판처럼 화려한 글씨였다. ‘미래의 모든 위험은 하나의 책임자로부터 해결됩니다.’ 그는 그 문장을 읽고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자신의 광고 문구와 너무 비슷했다. 글씨의 배열과 단어 사이를 띄운 방식까지 익숙했다.
“이건…… 제 스승이 썼던 형식입니다.”
“에반 씨에게 스승이 있었어요?” 재하가 놀랐다.
“악마도 배웁니다. 다만 뭘 배웠는지 자랑하지 못할 때가 있죠. 제게 계약을 설명하는 일을 가르친 사람은 늘 이렇게 말했어요. 모든 문제에는 한 사람이 책임져야 사람들이 안심한다고.”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모릅니다. 오래전에 천계와의 계약을 끝내고 사라졌어요. 그때 저는 그 말을 좋은 원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에반은 표지판의 뒷면을 살폈다. 거기에는 작은 글씨로 ‘구조 실패 시 책임 이전 동의 간주’가 적혀 있었다. 책임자를 명확히 한다는 약속이 실제로는 실패를 아무나 떠넘기기 위한 구멍이었던 셈이다. 그는 증거 보존을 위해 표지판을 떼지 않고 사진처럼 남기는 복사 기록을 만들었다.
“제가 오래전에 배운 문구라도 여기서 한 일은 제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세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 관문을 누가 언제 개조했는지는 더 확인해야 해요. 책임을 인정하는 태도와 근거 없는 책임을 떠맡는 일은 구분하세요.”
“네. 그 말도 배우겠습니다.”
바닥 아래에서 물이 한 차례 크게 울렸다. 선로 바깥의 돌벽에 물이 부딪혀 튀었다. 하율이 압력계를 확인하니 수위는 아직 관리 가능한 범위였지만 우회 배수로가 닫힌 채라 여유가 많지 않았다. 그는 관문을 여는 일을 단순한 계약 분쟁이 아니라 실제 설비 안전 문제로 기록했다. 재하는 그 서류를 보며 처음 이곳에 올 때 노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가장 위험한 건 남을 위해서라며 너무 쉽게 대답하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때로는 신중함을 핑계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도 위험했다.
“어떻게 하면 지금 움직이면서도 남의 권리를 건드리지 않을까요?” 재하가 물었다.
하율은 안전 표식을 하나 더 그렸다. “사람을 움직이는 일과 계약을 체결하는 일을 분리하면 됩니다. 물길이 위험하면 물길을 점검하고, 책임 문제는 따로 검토하면 돼요. 물은 서류 결재를 기다리지 않으니까요.”
그 말이 재하에게는 꽤 중요한 답처럼 들렸다. 신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처리하려는 마음이 옅어졌다. 그는 다른 사람의 선택을 대신할 수 없는 만큼, 지금 눈앞에 있는 물길을 안전하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태기로 했다.
그들은 관문을 지나려다가 멈췄다. 뒤쪽에서 물이 철썩이는 소리가 들렸다. 베르의 징수관들이 관문 앞에 섰다. 대장은 열린 수문과 효력이 멈춘 계약 조항을 보고 분노했다.
“불법 개입이다. 미결 책임의 회수를 방해한 죄로 통행을 금한다.”
“그 계약 원본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아직 못 봤습니다.” 재하가 대꾸했다.
“원본은 중앙 승강장에 있다. 그러나 확인할 권한은 징수관에게만 주어진다.”
모나가 앞으로 나섰다. “네가 그렇게 정한 거겠지. 처음부터 그런 규칙이었던 적은 없어.”
베르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는 장부를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 검은 잉크가 허공으로 떠올라 관문을 가득 채웠다. 이번에는 누군가를 붙잡으려는 줄처럼 움직였다. 하백이 뒤로 물러났고 릴리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카르도는 검을 뽑으려다 수로 지지대를 바라봤다. 싸우다 물길이 무너지면 아래의 물새골이 위험했다.
“그만두시오!” 카르도가 외쳤다. “여기서 물길을 건드리면 민간인이 다친다.”
베르는 차갑게 말했다. “공식 주소가 없는 민간인은 보호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재하가 대답했다. “말씀 잘하셨네요. 오늘 기록에 꼭 남기겠습니다.”
“그런 기록은 효력이 없다.”
“효력이 있는지는 나중에 따지죠. 지금 누가 사람을 보호하지 않겠다고 말했는지는 모두 들었습니다.”
세리아는 발언 시각과 위치를 적었다. 유나는 독립 보관 도구로 그 내용을 확인했고, 하백과 하율은 각자 자신이 들은 말을 기록했다. 똑같은 말을 적었다고 같은 소유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서로 다른 목격이 하나의 사실을 확인해 주는 과정이었다.
베르가 다시 장부를 흔들자 선로가 검게 변했다. 작은 틈마다 종이 조각들이 끼어 배수가 느려졌다. 하율은 즉시 사람들을 물러나게 했다. 그는 장부의 힘을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수로가 견딜 시간을 먼저 계산했다. 수문 개방 후 수위가 떨어지는 속도는 빨랐지만, 종이가 걸린 구간은 압력이 여전히 높았다.
릴리는 모나에게 물었다. “물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습니까?”
“오래된 우회 선로가 있어. 다만 중앙 승강장 쪽의 문을 열어야 해.”
“그럼 앞으로 가야겠네요.”
재하는 베르를 돌아봤다. “다음에는 토론할 때 물길을 막지 마세요. 분위기도 나빠지고 진짜로 위험하니까.”
그들은 수동 관문을 지나 다음 구간으로 향했다. 베르는 더 따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장부에서 자꾸 종이 하나가 떨어져 물에 뜨는 걸 재하는 보았다. 이 구역에서 강제 계약을 멈춰도 다른 곳에서 같은 장치가 작동할 수 있었다.
수문이 움직인 뒤 하율은 압력계를 한 번 더 살폈다. 수치가 내려갔다고 모든 구간이 안전해진 건 아니었다. 그는 우회 배수로의 물이 제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확인하러 몇 걸음 내려갔다. 재하는 혹시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물었지만, 하율은 사람들을 안전한 위치에 세워 달라고 했다. 재하는 그 부탁을 듣고 카르도와 함께 통행 표식을 세웠다. 누구도 그의 신격을 묻지 않았다. 손에 들린 팻말을 제대로 세우는지만 확인했다.
물길 반대편에서 징수관 하나가 잠시 작업을 지켜봤다. 그는 베르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지만 수문이 터지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일행이 그에게 안전 구역을 알려 주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대적인 조직에 속한 사람까지 무조건 같은 생각을 한다고 믿지 않는 일. 재하는 그것 또한 배워 가고 있었다.
중앙 승강장 입구의 오래된 간판에는 처음으로 분명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아직’을 대신 팔 수 없다.]
그 아래에는 훨씬 새로운 잉크로 낙서가 덧붙어 있었다.
[다만 누군가의 침묵에는 값을 매길 수 있다.]
재하는 두 문장을 차례로 읽었다. 첫 줄은 손으로 새긴 흔적이었고 둘째 줄은 인쇄된 계약 문구였다. 같아 보이는 돌에도 서로 다른 시대의 손길이 남아 있었다.
“누가 덧붙였는지 대강 알겠네요.”
그가 간판 뒤편으로 돌아가자 잠긴 철문이 보였다. 문에는 아홉 개의 손바닥 모양이 파여 있었다. 하나는 나머지와 달리 손가락 끝이 지워져 있었다.
하백이 말했다. “여기를 지나가려면 아홉 사람이 다 있어야 하는 겁니까?”
모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홉 사람의 이름이 없어도 돼. 다만 여덟 사람이 마지막 한 사람을 대신해 선택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필요해.”
재하는 지워진 손자국을 만졌다. 손끝이 차가웠다. 사라진 마지막 구조자의 거절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제176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