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역 기록실의 문은 잠겼고, 창문에서는 검은 장부의 종이들이 커튼처럼 흔들렸다.
“할 말이 있습니다.” 윤재하가 말했다. “제가 여기에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수백 년 치 채무를 넘기겠다는 겁니까? 신계에도 상속 포기라는 제도가 있어야 하지 않아요?”
모나가 웃었다. “네가 올 때부터 그런 얘기를 할 줄 알았지.”
“제가 특별히 예리해서요?”
“너처럼 억울한 눈으로 물어본 신은 많았어.”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재하는 고개를 떨구었다. 신이 됐다는 축복보다 알 수 없는 채무 통지서가 먼저 오는 세상이라니. 전생의 회사에서 받던 야근표가 차라리 단순했다.
세리아는 베르가 남긴 봉인의 효력을 확인했다. 명목은 ‘원본 대조를 위한 임시 출입 제한’. 따라서 원본 대조에 필요한 사람까지 봉쇄하면 명령의 목적을 스스로 위반하는 셈이었다. 그는 그 조항을 이용해 기록 보조원과 하백이 나갈 통로를 열어 달라고 요구했다. 베르는 잠시 망설이다 두 사람의 통행을 허락했다.
“법을 잘 아는 사람을 싫어하는 눈빛이네요.” 재하가 속삭였다.
“저도 그분을 좋아하려고 여기 온 건 아닙니다.” 세리아가 대답했다.
모나는 서가 밑의 낮은 상자를 가리켰다. 상자 안에는 완성되지 않은 작은 뗏목들이 들어 있었다. 각각은 길이가 팔뚝 정도였고 옆면에 흰 조개껍질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모나가 첫 번째를 들어 보이자 껍질 안에 새겨진 말이 드러났다.
‘안 됩니다.’
“누가 거절했나요?” 릴리가 물었다.
“강을 건너려는 사람에게 아무 대가 없이 돕겠다는 약속을 강요했을 때. 그 말을 거절한 사람이지.”
“도움을 거절한 거예요?”
“아니. 강을 건너는 사람을 도울 생각은 있었어. 다만 자기 아이까지 평생 강가에 묶어 두라는 조건을 거절했지.”
모나는 두 번째 뗏목을 꺼냈다. 여기에는 ‘그런 약속은 못 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세 번째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만큼만 하겠습니다’. 뗏목마다 다른 사정이 남아 있었다. 폭우 때마다 구조에 나서는 사람도 있었고, 병든 가족 때문에 그날은 나가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물 앞에서 옳은 일을 하려고 애썼지만 모두가 같은 약속을 하지는 않았다.
“이걸 최초의 거절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뭔가요?” 재하가 물었다.
“신이 되기 전, 사람들은 도움을 서로 부탁했어. 부탁을 거절할 수도 있었고 다른 방법을 함께 찾을 수도 있었지.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나섰어. ‘내가 모두 대신 답하겠다’고. 처음엔 그 사람이 아주 좋은 사람처럼 보였어.”
“최초의 신이요?”
“그 호칭은 한참 뒤에 붙었다.”
모나는 상자 바닥에 얇은 돌판 하나를 펼쳤다. 돌판에는 아홉 사람의 손자국이 있었다. 서로 크기도 모양도 달랐다. 손자국 가운데에는 작은 배 한 척이 그려져 있었다.
“강물이 불어난 날, 아홉 사람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구조 신호를 들었어. 모두 함께 움직여 사람들을 살렸지. 사람들은 그 일을 기억하면서 ‘누군가의 말을 들었다’고 했어. 오랜 세월이 지나며 아홉 손이 하나의 손처럼 이야기됐고, 그 손에 이름이 붙었어.”
“하나의 신이 아니라 아홉 사람이요?” 재하가 물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아직 다 몰라. 역사에는 과장도 있고 잃어버린 조각도 있지. 하지만 이 돌판은 그날 처음부터 한 사람만 있었다는 주장에 반대해.”
에반은 돌판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광고하기 아주 좋은 이야기였겠군요. 하나의 이름, 하나의 약속, 하나의 책임자.”
“그리고 하나가 무너지면 모두의 채무를 넘길 자리도 하나만 남겠죠.” 릴리가 말했다.
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가 원하는 것도 그거다. 처음엔 여러 사람의 선택이었던 걸 한 이름의 소유물로 바꾸는 것.”
검은 종이가 문틈을 두드렸다. 제한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밖에서 하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물새골의 소미에게 메시지를 보내 과거 강의 지형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소미는 이 마을의 다리가 무너지던 옛날 이야기까지 알려 주는 노인들이 있다고 답했다. 재하 일행은 이곳의 기록만으로 끝내지 않고 바깥의 증언도 기다리기로 했다.
세리아가 돌판의 손자국을 기록하고 모나에게 공개 범위를 물었다. “아홉 사람의 흔적은 증거로 제출해도 됩니까?”
“흔적 자체는 공개해도 돼. 단 사람의 이름을 임의로 붙이지 마. 모르는 건 모르는 거야.”
릴리는 손자국을 보다가 묘하게 익숙한 형태를 발견했다. 한 사람의 손은 손가락이 여섯인 것처럼 찍혀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두 손이 어긋나 겹친 흔적이었다. 북방 무명도시에서 발견했던 ‘여섯 번째 손가락’의 비밀과 비슷했다.
“이런 식으로 여러 사람의 손을 겹쳐 찍은 게 하나의 기호가 됐을지도 몰라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동일한 제작 방식인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해요.”
재하는 한숨을 쉬었다. “이분들하고 다니다 보니 추리할 때 함부로 소리 지르지 못하겠어요. ‘범인은 너야!’ 같은 걸 해 보고 싶은데.”
“근거가 충분하면 하셔도 됩니다.” 릴리가 미소 지었다. “보통은 부족하겠지만요.”
돌판이 발견된 뒤에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질문을 했다. 릴리는 아홉 사람이 그날 구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고, 유나는 돌판이 얼마나 오래 보관됐는지 확인했다. 에반은 왜 그들의 이야기가 한 신의 전기로 바뀌었는지를 궁금해했다. 재하는 누구의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정할 수 없었다. 여러 질문이 함께 남는 게 이곳의 원형 약속과도 어울렸다.
모나는 기록실 한쪽에 있던 낡은 동전을 꺼냈다. 동전 앞면에는 작은 배가, 뒷면에는 얼굴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처음 만든 동전은 배만 있었지만 후대에 제작된 것은 얼굴이 더 커져 배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 얼굴을 ‘최초의 신’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기록실에 남은 제작자 서명에는 그 얼굴이 실존 인물을 본떠 그려졌다는 말이 없었다.
“기념하려고 만든 상징이 진짜 얼굴처럼 굳어진 거군요.” 재하가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 모나가 답했다. “하지만 모든 동전을 조사한 건 아니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는 처음부터 다른 형상을 썼을지도 몰라.”
“또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해야 하는군요.”
“그게 싫으냐?”
“아뇨. 처음에는 싫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 틀린 걸 확신하는 것보다는 낫거든요.”
에반은 동전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얼굴이 있으면 사람들은 설명을 듣기 쉬워합니다. 홍보물에서 가장 효과가 좋은 방식이에요. ‘어떤 사람들이 강물을 건너 서로 도왔다’보다 ‘위대한 한 사람이 모두를 구했다’가 더 빨리 퍼지죠.”
“그럼 원래 있던 여러 사람의 공로가 사라져도 괜찮다는 건가요?” 릴리가 물었다.
“안 괜찮죠.” 에반이 대답했다. “저는 그걸 알고도 잘 팔리는 이야기를 골랐습니다. 여기서는 제가 직접 그 차이를 기록해야겠어요.”
그는 양피지에 두 줄의 제목을 적었다. 첫 번째는 ‘최초의 신이 남긴 위대한 구원’. 두 번째는 ‘폭우 날 강가에서 서로를 도운 아홉 사람의 흔적’. 그는 첫 번째 줄을 지우지 않았다. 잘못 팔렸던 문구를 증거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 아래 ‘근거 없는 단일 인물 주장’이라고 명확히 적었다.
세리아는 두 번째 제목에도 한 줄을 덧붙였다. ‘돌판의 아홉 손자국을 근거로 하되, 개별 인물의 신원과 당시 참여 인원은 추가 검증 필요.’ 에반이 그 글을 읽고 쓰게 웃었다. “광고 제목이 점점 길어지네요.”
“정확하면 조금 길어도 됩니다.”
“세리아 님은 제 업종의 천적이에요.”
모나는 이 장면을 보고 오래 웃었다. 그러다 아홉 번째 손자국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곳에는 다른 자국과 달리 조금 깊게 찍힌 부분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 흔적을 지우려고 표면을 갈아 낸 것 같았다.
“왜 마지막 사람만 지워졌을까요?” 릴리가 물었다.
“아홉 번째의 거절은 후대의 설명과 맞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게 전부인지는 아직 모르지.”
재하는 기록을 조작한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찾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 흔적만으로는 제작 당시부터 파손됐는지, 후대에 지운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하율은 돌 표면의 결을 살피고 다른 부분보다 마모가 늦게 일어났다는 점을 확인했다. 지운 흔적이 있다는 정도까지는 말할 수 있었다.
“이것도 중요해요.” 재하가 말했다. “적어도 누군가가 왜 사라졌는지 물을 수 있으니까.”
모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제9 항로를 찾은 신들 가운데 많은 이가 처음부터 자기 이름이 돌판에 적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왜 한 손이 사라졌는지 질문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이름으로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판을 보존하기 전에 유나는 아홉 자국의 방향과 깊이를 별도 도면에 표시했다. 훗날 다른 연구자가 확인할 때 기록자의 판단과 실제 흔적을 구분하기 위한 조치였다. 재하가 귀찮지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오히려 그 일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봉투 한 장이 잘못 분류돼 평생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은 일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확인의 흔적을 남기는 게 자신의 일이었다.
릴리는 돌판을 직접 만지고 싶어 하는 노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에게는 사진부터 보여 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것을 소중하게 다루는 이유는 무조건 손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사람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재하는 그 말을 듣고 신전의 낡은 계단을 고칠 때 돌에 남은 이름을 지워 버리지 않도록 당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해가 지기 두 시간 전, 베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징수관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장부는 지금까지 본 어떤 것보다 깔끔했다. 분류 번호도 완벽했고 이자 계산도 정확했다. 재하는 그 사실이 더 불편했다. 계산이 정확하다고 청구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원본을 제출하시오.” 베르가 말했다.
모나는 아홉 손의 돌판을 탁자 위에 올렸다.
베르는 첫눈에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아주 조금 떨렸다. “설화의 유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장부의 근거는 무엇이죠?” 세리아가 물었다. “귀하는 단일한 최초 서명자가 모든 책임을 인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는 독립된 아홉 사람의 흔적이 있습니다. 단일 서명 원본을 제시할 책임은 귀하에게도 있어요.”
“나는 유효한 후계 조항을 가지고 있다.”
“후계 조항이 무엇을 이어받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면 그 조항이 적용되는 범위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베르가 장부를 펼쳤다. 짙은 잉크가 번지며 방 안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벽에 붙어 있던 ‘처리 완료’ 표식들이 살아 움직이듯 떠올랐다. 재하의 이름을 찾아 붙으려 했다. 그는 손을 뻗어 ‘무상의 약속’을 시험했다.
빛은 여러 표식 중 일부에만 닿았다. 실제로 응답한 사람이 있고 남아 있는 질문도 있었다. 모든 회신을 무효화할 수 없었다. 재하는 무릎을 꿇고 마지막 표식을 읽었다.
[미확인 거절: 1건.]
[신격 승계 절차에 의해 삭제됨.]
“거절 기록이 하나 더 있어요.” 재하가 말했다.
모나의 얼굴이 굳었다. “아홉 사람 가운데 마지막 한 명의 것이야. 그 사람은 구조에는 참여했지만 나중에 단일 신의 이름으로 묶이는 걸 거부했지. 그 서신은 돌판이 아닌 다른 곳에 남겨졌어.”
“어디에요?”
“제9 항로의 중앙 승강장. 처음 회신이 돌아온 자리.”
베르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곳에는 들어갈 수 없다!”
재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급하게 막는 이유는 알 것 같았지만, 아직 증명할 근거는 없었다. 대신 모나에게 물었다. “가는 길이 있습니까?”
모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햇빛이 물 위에 떨어지자 바닥의 돌들이 반짝였다. 그 반짝임 속에 좁은 선로 하나가 나타났다.
“있어. 다만 그곳으로 가는 기차는 표를 파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돌아가겠다고 선택한 사람이 움직여.”
하백이 문밖에서 그 말을 들었다. 그는 낡은 매듭 명찰을 손에 쥐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왜요?” 재하가 물었다.
“저는 줄을 끊은 날 이후 돌아가지 못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돌아가서 물어볼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 길을 여는 일이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면 해 보고 싶습니다.”
모나는 하백에게 작고 흰 조개껍질 하나를 건넸다.
“좋아. 네가 돌아갈 곳을 네가 정해.”
플랫폼 아래에서 멀리 기적 소리가 울렸다. 장부의 이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누군가가 그 숫자만 바라보지 않았다.
제17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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