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종소리가 울리자 플랫폼의 물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윤재하는 누군가의 발목을 붙잡으려는 검은 물결을 보았다. 물결이 아니라 종이였다. 오래된 편지들이 물처럼 움직이며 계단 위를 덮고 있었다. 봉투마다 주소 칸이 비어 있었고, 도장에는 ‘반려’라는 두 글자만 남아 있었다.
“주소가 없어서 구조대가 못 왔다는 건가요?” 재하가 물었다.
하율이 바닥을 두드려 보았다. 돌 아래는 텅 비어 있었다. “종이는 내려놓고 발판부터 확인합시다. 이 아래에 수로가 있어요.”
계단 끝에는 골짜기 마을이 있었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담장은 낡았다. 하지만 마을 곳곳에는 주민들이 직접 만든 화살표가 걸려 있었다. ‘비가 오면 높은 곳으로’, ‘어르신 집 두 번째 골목’, ‘우물 옆 구조함’. 글씨는 제각각이었지만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 방향이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사람들이 이미 대비를 하고 있네요.” 릴리가 말했다.
“그런데 왜 구조 요청은 전달되지 않았을까?”
대답은 마을 입구의 게시판에 있었다.
[주소 미등록지구.]
[외부 지원 대상 아님.]
[자체 해결 권고.]
마을 사람들은 여기에 이름이 있었다. 집도 있었고 아이들이 다니는 길도 있었다. 다만 천계 주소록에 등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도에서 지워져 있었다. 남의 관할이 아니라는 말을 몇 번 반복하면 정말 없는 곳이 되어 버리는 듯했다.
마을의 수로 관리인 소미는 손에 쥔 종을 내려놓으며 일행을 맞았다. 스무 살 남짓한 여성이었다. 장화가 군데군데 찢어졌지만 바닥에 깔린 짚을 능숙하게 피해 걸었다. 그녀는 카르도의 방패와 재하의 신성한 옷깃을 보고 잠시 긴장했다.
“신전 사람이에요?”
“맞습니다.” 재하가 대답했다. “하지만 신전 대표라는 이유로 여기서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 좀 낫네요. 우리 마을에서는 그 말부터 해야 대화가 통해요.”
소미는 잔뜩 구겨진 긴급 통신문 열두 장을 꺼냈다. 지난 장마에 큰 돌이 수로로 밀려들었고, 위쪽 댐의 수문이 열리면 마을이 잠길 위험이 있었다. 지원을 요청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받지 않았다. 회신은 언제나 같았다. 주소가 없다는 이유였다.
“수문은 언제 열립니까?” 하율이 물었다.
“오늘 밤일 수도 있어요. 위쪽에 연락선을 보냈는데 아직 안 돌아왔어요.”
“현장 확인부터 해야겠습니다. 지도와 수위를 보여 주세요.”
재하는 자기에게 기적을 써 달라고 하지 않은 소미를 보고 이상하게 안도했다. 바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율과 소미가 점검 표를 펼치는 동안 릴리는 임시 대피소로 쓰는 곡물 창고를 돌아봤다. 문턱이 높아 지팡이 짚는 노인이 들어가기 어려웠다. 릴리가 몇 사람과 함께 널빤지로 경사로를 만들었다.
카르도는 군용 통신관을 꺼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제9 항로는 천계 군령의 중계 지점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당황하다가 평범한 전령을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소미는 전령을 보낼 골짜기의 바람길을 직접 설명해 주었다. 장비보다 지역에 사는 사람의 지식이 더 정확한 순간이었다.
“신이란 사람들도 길을 모르네요.” 소미가 말했다.
“저희는 길을 잘못 알고도 지도부터 고치라고 우기는 경향이 있어서요.” 재하가 대답했다.
“말은 잘하네.”
점검에 나선 사람들은 상류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댐에 설치된 경보 장치가 멀쩡했지만 소리가 마을로 전해지지 않았다. 두 갈래 신호 중 하나는 우편 통로로 넘어갔고, 그 우편 통로에서는 주소가 없는 요청을 자동 반려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위험을 측정하는 장치와 위험을 알리는 장치가 따로네요.” 하율이 말했다. “댐은 알렸는데 마을은 듣지 못한 겁니다.”
“그럼 당장 그 장치를 바꾸면 되지 않아요?” 재하가 물었다.
“이상 신호를 바로 보내도록 바꿀 수는 있습니다. 다만 마을이 실제 경보를 받는지 시험해야 합니다. 잘못된 경보도 주민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어요.”
소미는 시험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마을 종지기 둘을 불러 경보음을 구별하는 법을 정했다. 짧게 한 번이면 점검, 길게 두 번이면 준비, 끊기지 않고 세 번이면 즉시 높은 곳으로 대피. 다른 지역과 부딪히지 않도록 마을 사람들끼리 합의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장치를 시험하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경보 장치가 멋대로 재하의 이름을 수신 책임자로 표시했다.
[수신 책임자: 윤재하.]
[미등록 지역 사고 발생 시 책임 일괄 이전.]
“잠깐. 전 지금 경보음이 들리는지만 보려고 왔거든요?”
세리아가 장치 안쪽을 살폈다. “제8 항로의 예측국 기능과 다른 계통이지만 비슷한 방식이에요. 주소가 없으면 첫 응답자를 법적 수신인으로 삼도록 되어 있습니다.”
“법적 수신인이 되지 않으면 경보를 못 듣는다는 거죠?”
소미의 얼굴이 굳었다. “우리를 도우면 도운 사람이 처벌받는 구조군요. 그래서 아무도 안 오는 거였어.”
“법이 아니라 그릇된 설계입니다.” 세리아가 정정했다. “우선 별도의 현장 경보를 울리고, 수신인 자동 지정은 자료로 보존하겠습니다.”
재하는 손끝에 권능을 모았다. ‘무상의 약속’은 강제로 대가를 떠넘기는 조항에 반응했다. 희미한 금빛이 자동 지정 창을 둘러쌌다. 하지만 이번에도 장치 전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정보 전달의 기능과 잘못된 책임 이전은 구분되어 있었다.
[강제 수신인 지정: 일시 정지.]
[현장 경보 기록: 유지.]
“이거 좋네요.” 재하가 말했다. “일을 하면서 책임을 멋대로 넘기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좋긴 한데 지금 경보가 울려요.” 소미가 외쳤다.
상류의 수위가 갑자기 높아졌다. 예상보다 빠른 흙탕물이 밀려오면서 댐 위쪽의 임시 둑을 덮었다. 하율은 점검 중인 사람들을 즉시 물러나게 했다. 릴리는 창고에 모인 주민들의 인원을 확인했고, 소미는 종을 연속해서 세 번 울렸다. 이웃들이 사전에 정한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하는 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의 권능은 약속을 다루지, 강물을 마음대로 지배하지 못했다. 대신 짐을 들고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를 부축했다. 카르도는 돌무더기를 치우는 사람들과 함께 안전한 통로를 확보했다. 전쟁신의 커다란 손이 이번에는 검을 잡는 대신 낡은 대문을 받치고 있었다.
소미는 마지막 집을 확인하러 뛰어갔다. 곡물 창고 아래에 사는 남매의 집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대피했지만 집 안에 혼자 남은 개가 울고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자 쌓아 둔 땔감이 무너졌다. 재하가 몸을 돌릴 틈도 없이 하율이 긴 막대로 잔해를 지탱했다.
“두 사람 다 나오세요! 여기 오래 못 버팁니다!”
소미는 개의 목줄을 잡고 기어나왔다. 재하는 땔감이 흩어지지 않도록 마지막 막대를 받쳤고, 하율이 손짓하자 바로 물러났다. 다음 순간 흙탕물이 골목으로 들이닥쳤다. 그 누구도 마지막 물건 하나까지 지키겠다고 남지 않았다.
해 질 무렵 물은 대피 구역 아래에서 멈췄다. 마을 일부가 잠겼지만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 창고에서는 따뜻한 물을 나누어 주었다. 릴리는 젖은 옷을 말릴 공간을 마련했고, 카르도는 복구 물자를 보내려면 주민회의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소미의 말을 군용 장부 첫 줄에 적었다.
소미가 재하에게 물었다. “신님은 우리 마을 이름을 천계에 등록할 건가요?”
“그게 필요하다면 의견을 들어야겠죠. 그런데 등록을 안 해도 경보를 받아야 한다는 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름을 고르지 못한 건 아니에요. 남이 정한 주소에 들어가기 싫었던 거죠.”
그녀는 게시판의 ‘미등록’ 표지를 떼어 냈다. 그 밑에는 주민들이 손으로 적은 이름이 있었다.
[물새골.]
“우리끼리는 이렇게 불러요.”
“좋은 이름이네요.”
“천계 서류에 없다는 이유로 없는 곳은 아니죠.”
유나가 물새골의 경보 시험 결과를 독립 기록으로 남겼다. 사고를 막는 데 쓰일 장소 정보는 공유하되, 주민 개인 명부는 동의받은 경우에만 보관하기로 했다. 재하는 기록을 작성한 뒤 소미에게 확인받았다. 이번에는 ‘처리 완료’라는 단어 대신 ‘대피 완료, 복구 진행 중’이라고 적었다.
구조가 끝났다고 마을이 곧바로 평온해진 건 아니었다. 젖은 곡식은 내일까지 말리지 못하면 썩을 수 있었고, 무너진 담장에는 더 큰 비가 오기 전에 임시 버팀목을 세워야 했다. 주민들은 서로 도구를 빌려 주면서도 누구 집부터 손볼지를 두고 다퉜다. 큰비를 함께 피했다고 하루아침에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건 아니었다.
소미는 임시 회의를 열었다. 먼저 물이 찬 집의 위치를 표시하고 안전하지 않은 구간에는 줄을 둘렀다. 아이들은 잔해가 쌓인 골목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안내했다. 제9 항로에서 온 사람들도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어떤 집 안으로 들어갈지는 집주인의 동의가 필요했다.
“우리 집은 먼저 손대 주세요.” 대장장이가 말했다. “화덕이 젖으면 내일부터 도구 수리를 못 해요.”
“우리 집은 지붕이 없어요. 오늘 밤을 어디서 자요?” 젊은 부부가 반박했다.
재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신이라면 멋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릴리가 나서서 긴급한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건물을 먼저 확인하자고 제안했다. 하율은 화덕의 상태를 살피고 불을 피우면 오히려 위험한지 조사했다. 대장장이의 작업장은 통풍이 충분할 때까지 하루 더 말려야 했다.
“그럼 오늘은 도구를 못 만듭니다.” 대장장이가 한숨을 쉬었다.
“안전한 임시 작업대가 있으면 될까요?” 카르도가 물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군의 수리대 하나를 가져올 수 있다. 빌리는 기간과 필요한 장비를 적어 달라.”
소미가 즉시 조건을 확인했다. 군 장비를 빌린 대가로 마을이 군의 관할에 편입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카르도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런 조건을 적는 걸 거부하지 않았다. 전쟁신이 직접 빌려준 망치에도 반환 기한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편 유나는 마을 게시판의 낡은 종이를 살폈다. 사고가 발생하기 전 열두 번이나 보냈던 구조 요청 중 일곱 번은 ‘처리 완료’라는 회신을 받았다. 내용은 없었다. 다른 다섯 번은 기록조차 남지 않았다. 그녀는 원본을 보관할지 소미에게 물었다. 소미는 재발 방지에 필요한 부분만 공개하되 개인의 집안 형편이 적힌 부분은 빼 달라고 했다.
“남들이 우리를 불쌍하다고 부르는 건 싫어요.” 소미가 말했다. “우리가 어떤 위험에 놓였는지 제대로 아는 건 필요하지만요.”
“차이가 크죠.” 유나가 대답했다. “앞으로는 그 차이를 표시하겠습니다.”
에반은 마을 사람들이 만든 경보표를 보며 작은 안내문을 작성했다. ‘주소가 없어도 위험 신호를 보낼 수 있습니다. 신앙 등록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문장은 그의 옛 광고와 완전히 달랐다. 사람들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보다 무엇을 강요받지 않는지가 먼저 적혀 있었다. 소미는 문구를 보고 ‘우리가 쓰는 종의 소리’를 함께 실어 달라고 했다. 문서는 매일 주민들이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했으니까.
밤이 되자 사람들은 대피소에서 빵과 수프를 먹었다. 재하는 구석에서 어린아이에게 물을 건네다가 자기 옷을 흠뻑 적셨다. 아이는 그가 신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아저씨, 신발도 젖었어요”라고 했다. 재하는 웃으며 대답했다. “신의 권능으로 신발 말리는 법을 배워야겠네요.” 아이는 자기가 아는 대로 볕 잘 드는 곳을 가리켰다.
재하는 물새골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소미와 이웃들이 할 일을 서로 알고 있었다. 그가 한 일은 작은 부분이었다. 이곳에서 중요한 건 신이 왔다가 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음 비가 오면 사람들이 경보를 듣고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때 노인이 역 쪽에서 나타났다. 빈 자루가 하나 줄어 있었다.
“첫 주소를 찾았군.”
“우리가 찾은 건 아니에요.” 재하가 말했다. “저분들이 이미 갖고 있던 이름을 들었죠.”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른 점이지.”
그가 내민 나무표에는 다음 정차역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세 번째 정차: 잃어버린 질문에 대한 실제 기록.]
재하는 하백의 매듭 명찰을 떠올렸다. 폭우 속에서 줄을 끊은 뱃사공과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 물새골의 침수 기록을 확인하다가 그는 수로의 오래된 다리 위치가 하백이 묘사한 강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어쩌면 하백 씨가 찾는 답이 가까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율은 지도를 들여다봤다. “비슷하다고 같은 곳은 아닙니다. 유역 기록실로 가서 연도부터 확인해야 해요.”
재하는 그 말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 확실히 확인한 다음 말해 주는 편이 좋았다. 예측으로 만든 편지와 달리, 실제 구조 기록은 느리고도 정확해야 했다.
제17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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