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에는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있었다.
윤재하는 처음에 그들을 승객이라고 생각했다. 빈 의자에 앉아 낡은 짐을 품고 있던 사람들, 물 위에 떠 있는 플랫폼에서 손수건을 말리는 사람들, 자기가 들어온 계단을 올려다보는 아이. 모두 표정이 어딘가 어색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데 누구를 기다리는지 잊은 얼굴이었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오래 여기 있었습니까?” 재하가 노인에게 물었다.
“오래라는 말을 처음 배운 날부터.”
“설명 좀 쉽게 해 주세요. 저 학교 다닐 때도 추상적인 문제는 싫어했거든요.”
노인은 빈 우편 자루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이곳엔 누가 도움을 청했는지는 남아 있지 않아. 다만 도와 달라는 말을 듣고도 지나친 자들이 멈춰 서지. 제9 항로의 첫 정차역이야.”
“벌 받는 곳인가요?” 릴리가 물었다.
“어쩌면. 하지만 대답은 각자가 해야 해.”
의자에 앉은 젊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옷은 흙과 소금으로 얼룩져 있었다. 한쪽 팔에는 굵은 밧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릴리가 다가가자 그는 급히 팔을 감췄다.
“상처를 봐도 될까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다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요.”
“다친 사람은 배에 남아 있었어요. 저는 줄을 끊었어요.”
남자의 손이 떨렸다. 그는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폭우 속에서 사람들을 나르던 뗏목과, 무너지는 다리 아래에서 줄을 잡고 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줄을 놓지 않으면 자신이 휩쓸렸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 줄을 끊었다. 그 뒤로 누가 살아남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건 살기 위해 한 선택이네요.” 재하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저에게 괜찮다고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배에 남아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니까요.”
재하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라면 뭐라고 위로할까 생각했다. 곧장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기는 쉬웠다. 하지만 위로받고 싶어 하는 사람과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 항상 같지는 않았다. 남자는 아직 그날의 결과를 몰랐다.
하율이 밧줄 자국을 살피며 말했다. “그 사건을 조사할 자료가 있습니까? 배의 크기나 줄이 놓인 방향이라도 알면 무엇이 일어났는지 확인할 수 있어요.”
“조사?” 남자는 낯선 말을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죄를 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아남은 사람이 있으면 찾자는 겁니다.”
노인은 주머니에서 나무로 된 명찰을 꺼냈다. 명찰에는 글자 대신 작은 매듭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질문이 남았다는 걸 인정하면 이름 하나가 돌아온다.”
남자는 명찰을 받아 들었다. 그가 밧줄을 매던 손놀림으로 매듭을 따라 문지르자 짧은 글씨가 나타났다.
[하백. 뱃사공.]
“하백.” 그가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맞습니다. 제 이름이었어요.”
재하는 하백에게 안전한 자리에서 쉬어도 된다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이곳에서 쉬게 하는 것과 나가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끌고 나갈 이유도 없었다. 릴리는 물과 빵을 건네고 하백의 허락을 받아 팔을 감아 주었다.
플랫폼 한쪽에서는 백발의 여인이 빈 찻잔 두 개를 닦고 있었다. 컵은 오래전에 이가 나갔고 찻주전자에는 물도 없었다. 그럼에도 여인은 잔을 닦아 마주 놓고, 누군가 맞은편 의자에 앉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가 다가가자 여인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님이 계세요?”
“한 사람 더 오기로 했어요.”
“언제요?”
“오늘 저녁이요. 매일 오늘 저녁.”
그녀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오래전 강 건너 마을에 사는 동생과 만나기로 했는데, 다리가 무너진 뒤로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그녀는 동생이 오지 못한 이유를 묻는 대신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만나기로 한 장소를 더 자세히 알려 주지 않았고, 비가 온다는데 오지 말라고 편지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분이셨는데요?” 재하가 물었다.
“비를 싫어하면서도 비 맞는 사람을 먼저 챙기는 사람이었어요. 우산 하나를 들고 나가서 언제나 젖어서 돌아왔죠.”
“그럼 편지를 쓸 수 있었나요?”
“썼어요. 그런데 아무도 읽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유나는 여인의 허락을 받고 옛 편지 한 장을 확인했다. 봉투에는 강 건너 찻집 주소가 남아 있었지만 그 찻집이 현재도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인은 동생을 찾는 일을 원하면서도 자신의 편지가 공개되는 건 싫다고 했다. 유나는 그 조건을 기록했다. 다른 사람을 찾기 위한 정보만 공유하고 사적인 안부는 보관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동생을 데려오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어요.” 릴리가 말했다. “하지만 주소가 남아 있으니 확인은 해 볼 수 있어요.”
여인은 두 찻잔을 잠시 바라봤다. 그러다 한 잔을 유나에게 건넸다. “찾지 못하면 못 찾았다고 알려 줘요. 그동안은 찾고 있다고 생각할게요.”
재하는 그 부탁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 기다리는 곳에 찾아가 결과가 없다고 말하는 일은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에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람은 영원히 같은 저녁에 갇힐 수도 있었다.
카르도는 구석에서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봤다. 릴리가 그에게 물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은 병사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해 보셨어요?”
“많이 했다.”
“무슨 말부터 했나요?”
“용감하게 싸웠다고.”
“그 전에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부터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카르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패배한 전투의 기록이 남는 것을 싫어하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용맹이라는 말이 가족의 질문을 다 덮어 주지는 못했다. 어떤 사람은 장례를 치를 수 있는지를 알고 싶고, 어떤 사람은 유품이 어디 있는지를 먼저 물었다.
“앞으로는 먼저 물어보겠다. 무엇이 궁금한지.”
“그렇게 해 주시면 좋겠어요.”
에반은 여인에게 오래된 홍보 전단이 있는지 물었다. 찻집 이름이 적힌 물건이라도 있다면 위치 확인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여인은 처음엔 경계했지만 에반이 이를 광고에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히자 작은 종이 표찰을 내밀었다. 푸른색 잉크로 그려진 잔 두 개가 동생이 운영하던 찻집의 표식이었다.
“이런 것도 단서가 되겠군요.” 에반이 말했다.
“그럼 잘 부탁해요.”
플랫폼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가까이 왔다. 모두가 기억을 되찾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어떤 이는 과거 사건을 당장 묻지 말아 달라고 했다. 어떤 이는 자기 목소리만 녹음해서 친척에게 들려주고 싶어 했다. 재하는 한 번에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답답해졌지만, 생각해 보니 여기 온 목적 자체가 모든 질문을 대신 해결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백처럼 확인할 방법이 있는 일을 골라 첫걸음을 떼면 됐다.
플랫폼 반대편에는 푸른 옷을 입은 소녀가 작은 돌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글씨는 같은 문장뿐이었다.
‘이름을 말하면 오지 않는다.’
“누가 오지 않아?” 재하가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말하면 일이 벌어져요.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 척할 수 있어요.”
“무슨 일이?”
“집이 불타요.”
그 순간 플랫폼 아래의 물이 붉게 흔들렸다. 먼 곳에서 타는 나무 냄새가 밀려왔다. 카르도가 몸을 돌려 방패를 들었다. 그러나 불길은 없었다. 냄새만 남았다.
세리아가 소녀 옆에 앉았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불이 날 수 있어. 말해서 생기는 일이 아니라, 네 말을 누가 듣고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할 수 있어.”
“그 사람들이 저를 찾아오면요?”
“그럴 수 있어서 이름은 지금 안 말해도 돼. 대신 안전한지 확인할 방법을 같이 정하자.”
소녀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옷깃에 꽂아 둔 작은 나무 조각을 건넸다. 그 조각에는 불길이 번지던 마을의 지형이 그려져 있었다. 하율이 무릎을 굽히고 살폈다. 하천의 갈래, 언덕의 모양, 지붕이 모여 있는 위치는 실제 지명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정확했다.
“이걸로 찾아볼 수 있겠네요. 이름은 몰라도 괜찮아요.”
소녀는 비로소 글씨 쓰기를 멈췄다.
재하는 여기에 왜 자신이 들어왔는지 조금 이해했다. 첫 정차역은 신도가 없는 곳이 아니었다. 이름을 고백하면 곧바로 구제받는 곳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어떤 행동을 할지 결정하는 곳이었다. 세리아는 소녀에게 기록을 남길지 물었다. 소녀는 위치 그림만 공개하고 본인의 신상은 숨겨 달라고 했다. 유나는 봉투 바깥에 그 조건을 적었다.
플랫폼 끝의 벽에는 수많은 빈칸이 있었다. 아마 기도를 적던 자리가 아니었을까. 에반이 손으로 더듬자 문장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처리 상태: 답변 완료.]
[내용: 불명.]
[요청자: 불명.]
“내용도 없는 답변이라니.” 에반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우리가 만든 형식입니다.”
“에반 씨가 만들었어요?”
“제가 광고 계약을 만들기 전부터 비슷한 게 있었어요. 다만 ‘기록 불완전’이라는 말을 없애고 ‘처리 완료’만 남기도록 권고했죠. 사람들이 불안해하면 사용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 고객이 무엇을 요청했는지도 모르고 완료라고 했다고요?”
“그걸 오늘 제가 또 처음 듣는 것처럼 말할 자격은 없겠죠.”
에반은 손수건을 꺼내 벽의 먼지를 닦았다. 그가 지운 글자가 아니라 오래전 누군가가 남긴 작은 흠집이 드러났다.
‘못 들었다면 못 들었다고 남길 것.’
글씨는 흔들렸고 매끄럽지 않았다. 공문이나 천계의 서식과 달리, 손가락으로 바위를 긁어 낸 흔적이었다.
하백이 다가왔다. “저 말은 알아요. 뗏목을 타고 가던 사람이 했습니다. 폭우가 너무 심해서 서로 말이 안 들렸거든요. 누군가는 들었다고 거짓말을 했고, 누군가는 못 들었다고 소리쳤어요. 그날 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에요.”
“누가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재하가 물었다.
“모릅니다. 그런데 저 말이 왜 여기에 있죠?”
노인이 자루를 들어 올렸다. “기록 이전의 세상에는 모든 것을 아는 신이 없었어. 그래서 사람들은 모른다고 말하는 법부터 배웠지. 첫 회신은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생겼다.”
“그럼 최초의 신이 ‘읽었습니다’라고 답한 건 아닙니까?”
“나는 그런 말 안 했어.”
노인의 대답은 교묘했다. 재하는 그가 본 것을 숨기는지, 정말 모르는지 구별할 수 없었다. 불편했지만 무리해서 캐묻지 않았다.
다음 플랫폼으로 가는 문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문에는 손잡이가 두 개 있었다. 하나에는 ‘대신 답하기’, 다른 하나에는 ‘질문을 돌려주기’라고 적혀 있었다.
“위험할 정도로 유도적인 선택지인데요.” 세리아가 말했다.
카르도가 대신 답하기 쪽을 잡으려 하자 릴리가 재빨리 그의 팔을 붙잡았다.
“왜 그걸 선택하세요?”
“빨리 문을 열려고.”
“전쟁신님.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빠른 손잡이를 잡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카르도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손을 내렸다. 재하는 질문을 돌려주기 쪽에 손을 얹었다. 문이 열리면서 하백의 명찰이 빛났다.
[미확인 질문: 뗏목의 생존자.]
[조회 가능한 장소: 세 번째 정차역의 유역 기록실.]
하백이 재하를 바라봤다. “찾을 수 있습니까?”
“찾을 수 있는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찾았다고 미리 말하지는 않을게요.”
“그 말이면 됩니다.”
일행이 떠나기 전에 하백은 벤치에 놓아둔 오래된 밧줄을 풀어 보았다. 그는 같은 매듭을 세 번 묶었다가 두 번 풀었다. 손이 익숙한 일을 하자 호흡이 조금 고르게 돌아왔다. 릴리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자 하백은 오늘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 이상했다고 했다. 잊고 있던 사람이 돌아온 게 아니라, 오래 피하던 질문을 다시 만난 것 같다고 했다. 재하는 그 말을 고쳐 주지 않았다. 자신도 처음 신이라는 이름을 받았을 때 기뻐하기보다 당황했으니까.
하백은 그들에게 함께 가겠다고 요청했다. 일행은 그가 어디까지 동행할지, 몸 상태는 괜찮은지, 위험이 있으면 되돌아갈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것은 특별한 의식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부탁을 듣고 서로 가능한 범위를 정하는 과정이었다. 하백은 마지막으로 빈 벤치를 바라봤다. 그곳에 남아 있던 기다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걸어갈 길이 생겼다.
문이 열리자 축축한 바람이 불었다. 그 너머에서는 긴급 구조 종이 울리고 있었다. 종 사이로 누군가 울먹이며 말했다.
“주소가 없어요. 그래서 아무도 안 와요.”
재하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여기서는 또 문장 해석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요.”
릴리가 치료 가방을 챙겼다. 하율은 밧줄을 들었다. 카르도는 이번에는 누구보다 먼저 앞서 나가지 않았다. 누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부터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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