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 발신실은 제8 환승선 지도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예측국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런 시설은 존재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오래된 설계도에는 분명히 발신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었다. 0호 조정실의 지하, 폐쇄된 냉각수 관을 따라 내려가면 도착하는 방이었다.
“왜 이런 곳은 항상 지하에 있을까요?” 재하가 물었다.
하율은 줄자를 챙기며 대답했다. “보통은 지하가 더 조용하고 온도가 일정해서 그렇습니다.”
“전 비밀 조직의 음모 때문인 줄 알았는데.”
“음모도 온도 관리는 필요하죠.”
사람들은 한동안 웃었다. 웃음이 그치자 각자 장비를 챙겼다. 전날 산사태로 토사가 내려온 구간이 있어 충분한 안전 확인이 필요했다. 카르도는 공병 한 명을 보내 지반을 조사하게 했고, 릴리는 대피 명부를 다시 확인했다. 유나는 열차 원본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발신 기록 복사본을 챙겼다. 재하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마르타가 싸 준 식량을 등에 지고 있었다.
“신님, 가방에 빵이 너무 많아요.” 노아가 말했다.
“사람을 구하러 가다가 배가 고프면 일할 힘이 안 나잖아.”
“신님은 배 안 고프시면서.”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먹잖아.”
노아는 생각에 잠겼다가 작은 물통을 하나 더 넣었다. 재하는 그걸 보고 웃었다. 기적보다 쓸모 있는 도움은 대개 이렇게 시작됐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험했다. 냉각수 관의 벽에는 오래된 시간 표식이 남아 있었는데, 숫자가 늘어나는 방향과 실제 통로가 이어지는 방향이 일치하지 않았다. 하율은 숫자를 믿지 않고 밧줄 길이를 재었다. 사람이 직접 걸어간 거리와 도면을 대조하니 좁은 틈 하나가 드러났다. 예측국이 가짜 시각 표식으로 숨겨 둔 지름길이었다.
그들이 벽을 밀자 안쪽에서 종이 냄새가 났다. 먼지와 풀, 오래된 잉크가 뒤섞인 냄새였다. 비밀의 중심이 기계실이라면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발신실에는 기계보다 책상이 많았다. 수십 개의 책상이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고, 각 책상 위에는 빈 봉투가 한 장씩 놓여 있었다.
“이건 무슨 훈련장 같네요.” 릴리가 말했다.
유나는 책상 번호를 읽었다. “예정 수신자마다 쓰는 자리였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펜도 없이 어떻게 편지를 쓰죠?”
에반은 가장 가까운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사람들의 지난 선택을 나열한 장부가 있었다. 누가 어려운 사람을 도왔는지, 어떤 말을 자주 했는지, 거절한 적은 얼마나 되는지가 끝없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줄은 손글씨가 아니었다. 사람의 기록을 이용해 미래에 할 말을 미리 합성한 결과였다.
[예상 작성자: 윤재하.]
[특성: 구조 요청 수신 시 응답률 높음.]
[예상 문장: 내 이름으로 접수해 주십시오.]
재하는 창을 읽고 화가 치밀었다. “제가 언제 이런 말을 했습니까?”
“아직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나가 대답했다. “이 방에서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율은 책상 안쪽에서 작은 바퀴를 발견했다. 바퀴는 종이 표면을 계속 눌러 흔적을 만들고 있었다. 기록이 누적되면 그 흔적이 글씨처럼 보이는 방식이었다. 인간의 필체가 아니라 글씨체를 흉내 내는 장치였다.
“미래에서 날아온 진짜 편지라기보다, 미래에 쓸 거라고 예측해서 미리 만든 문서였군요.” 재하가 말했다.
“일부는 그렇습니다.” 세리아가 반박했다. “하지만 원시 발신실의 일부 봉투는 여전히 검은 열차의 비정상적인 경유 도장을 가지고 있어요. 예측과 실제 시간 이상을 따로 검증해야 합니다.”
그 말에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의 거짓이 발견됐다고 모든 낯선 일을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맞서 온 천계의 오류도 대부분 그런 단정에서 시작됐다.
발신실 맨 안쪽에는 유리 상자 하나가 있었다. 그 안에는 재하가 어제 신전에서 보관한 것과 똑같은 봉투가 있었다. 겉에 찍힌 경유 도장과 종이의 찢어진 모서리까지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신전에 있는 봉투는 봉인이 닫혀 있었는데, 이 봉투는 이미 펼쳐져 있었다.
세리아가 말했다. “복제본인 것 같습니다. 원본은 신전에 그대로 있으니까요.”
재하는 장갑 낀 손으로 복제본을 들었다. 첫 문장은 그가 결코 자발적으로 쓰지 않을 문장이었다.
‘본인은 향후 발생하는 모든 구조 요청의 최종 수신 책임을 수락합니다.’
그 다음에는 낯익은 지명들이 이어졌다. 가시골, 도요 고원, 철비항, 유리해, 무진 분지, 북방 무명도시. 그리고 검은 우편열차에 쌓인 사만 이백열여섯 건의 미배달 기록. 그 모든 기다림을 한 사람의 미래 서명으로 묶겠다는 선언이었다.
“서류가 많을 때는 통합하면 편하죠.” 에반이 말했다. “하지만 이건 분류가 아니라 책임의 삭제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사연과 출발지를 하나의 이름 뒤로 감추는 것이니까요.”
재하는 마지막 쪽에서 낯선 문장을 발견했다.
‘최종 서명자가 실패하면 모든 미이행 대가는 기존 발신인의 책임으로 복귀한다.’
누구도 부담하지 않아야 할 강제 비용을 결국 편지를 보낸 사람에게 되돌린다는 뜻이었다. 열차가 보관해 온 사람들은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다. 그들에게 ‘네 요청이 처리되지 않았으니 네 탓’이라는 청구서를 보내려는 셈이었다.
발신실에서 발견한 예측 장부는 읽으면 읽을수록 섬뜩했다. 사람들의 말투와 걸음 속도, 다른 사람을 도운 횟수, 도움을 거절한 뒤 느꼈을 법한 감정까지 숫자로 분류돼 있었다. 모든 항목은 확률로 바뀌고, 확률은 예상 문장으로 바뀌었다. 그 예상 문장이 결국 서명란에 들어가 있었다.
재하는 가장 아래쪽에서 노아의 이름을 찾았다. 아이가 종을 여섯 번 울릴 가능성과 일곱 번 울릴 가능성이 나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주변 어른이 제지할 가능성’이라는 별도의 항목도 있었다. 아이가 자기 뜻을 말하면 어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까지 계산해 놓은 것이었다.
“이거 정말 기분 나쁘네요.” 재하가 말했다.
릴리는 노아의 기록 위에 종이를 덮었다. “아이의 이름은 조사 자료에 필요할 때만 보여 주세요. 그 애가 무슨 말을 했는지 마을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어요. 예측국이 어떤 마음으로 읽었는지는 아이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세리아는 기록의 공개 범위를 분리했다. 원본은 감찰을 위해 보존하되 개인 이름과 생활 정보는 가리고, 예측 모델이 어떤 절차로 서명을 위조했는지만 공개하기로 했다. 진실을 밝힌다는 이유로 다시 사람의 사생활을 빼앗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에반은 장부 가운데 오래된 광고 평가표를 발견했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고안한 문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당신만이 이 사람을 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응답하지 않으면 모든 손실은 당신 책임입니다.’ ‘조금만 양보하면 모두가 안전해집니다.’ 각각은 상황에 따라 선의로 읽힐 수도 있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출구를 막고 그 문장만 반복하면 협박이 된다.
재하가 말했다. “저도 처음 신도가 없을 때는 누군가 제 신도가 되어 주지 않으면 소멸한다고 들었어요. 만약 릴리에게 그 말을 먼저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동정해서 잠깐 신도가 되어 줬을 수도 있겠죠.” 릴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오래는 못 갔을 거예요. 저는 동생을 살려 달라고 간절히 바라던 사람이었지, 다른 사람의 생존 책임까지 떠맡으려고 찾아간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재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자신의 불안이 얼마나 컸는지 기억했다. 하지만 그 불안을 남에게 옮기지 않았기에 첫 번째 믿음이 생겼다. 그 차이를 과거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문서 속 수많은 이름을 보며 다시 배웠다.
유나는 발신실의 유리 상자를 봉인하고 말했다. “저는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이지만, 편지에 적힌 모든 말이 옳다고 보증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사람은 자기 말에 책임질 수 있어도, 남이 예측한 자기 말까지 책임질 수는 없죠.”
카르도가 대답했다. “군령을 전달하는 병사에게도 같은 기준이 필요하겠군. 명령이 있었다고 해서 그 명령이 언제나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니까.”
그 말을 들은 세리아는 카르도를 바라봤다. 전쟁신이 이렇게 말하게 되기까지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가 바뀌었다고 과거의 책임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는 과거의 계산만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재하는 잠시 기계에서 눈을 돌렸다. 책상 위에는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이 너무 많았다. 그중 일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더더욱 함부로 서명할 수 없었다. 그는 유나에게 원본 대조가 끝나지 않은 편지는 개봉하지 말라고 다시 부탁했다. 내용을 안다는 것과 그 내용을 처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별개였다. 세리아는 임시 봉인 목록을 새로 만들었다. 미르덴이 그동안 원본을 공개하지 않고 예측만 주장했던 이유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원본을 읽으면 수많은 서로 다른 사정이 보이고, 하나의 미래로 묶어 버리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재하는 복제 봉투에 찍힌 글자를 다시 살펴봤다. 서명 부분은 그가 인간 시절 쓰던 글씨와 닮았지만, 받침 한 획의 방향이 달랐다. 그 작은 차이를 발견한 건 릴리였다. 그녀는 재하가 밤마다 마을 공문을 적을 때 연필을 기울이는 버릇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측국은 많은 정보를 모았지만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다.
그때 발신실의 문이 닫혔다. 미르덴이 회중시계를 들고 나타났다. 이번에는 정중한 인사를 생략했다. 그의 눈은 오랜밤을 새운 사람처럼 붉었다.
“당신들이 미래를 바꾸려고 여기까지 올 줄 알았습니다.”
재하가 대꾸했다. “미래가 아니라 위조 서명 공장을 찾아온 겁니다.”
미르덴은 부정하지 않았다. “기계가 사람의 행동을 확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입니다. 사람이 두려워서 결정을 미루는 동안 구조 요청은 쌓입니다. 한 사람이 책임을 수락하면 모두가 움직일 수 있어요.”
“그 사람이 책임을 질 능력이 없으면요?”
“능력을 갖도록 시스템이 압박합니다.”
릴리의 얼굴이 굳었다. “그 압박 때문에 마을 수로가 막히고 사람이 갇혔어요. 그걸 돕는 거라고 부르세요?”
미르덴은 한참 만에 고개를 숙였다. “제가 만든 제도를 변호하는 말밖에 남지 않았군요.”
에반이 앞으로 나섰다. “제도 때문에 사람이 위험해졌다면 제도부터 멈춰야 합니다. 제가 만든 광고도 그 말을 가렸습니다. 이번엔 그 책임을 공개 기록으로 남기겠습니다.”
미르덴은 에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승인서를 꺼냈다. 두 사람이 함께 서명한 문서였다. 초기 예측국의 약속은 ‘사람이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위험 정보를 공개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정반대가 됐다.
“왜 이렇게 바꾸셨습니까?” 세리아가 물었다.
미르덴이 대답했다. “한 번 틀렸습니다. 기록을 공개했는데, 사람들이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예측이 틀렸다고 예산이 삭감됐어요. 다음에는 정보를 숨겼습니다. 그래야 계산이 맞았습니다. 그다음에는 사람들이 계산대로 행동하게 만들었죠.”
하율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처음 목적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옳다는 걸 증명하려고 실제 사람들을 위험하게 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미르덴은 시계를 닫았다. 그러자 발신실의 빈 책상에서 종이들이 떠올랐다. 아직 작성되지 않은 편지들이 일제히 재하를 향해 움직였다.
[집단 예정 수신 확정까지: 12분.]
재하는 ‘무상의 약속’을 사용해 보았다. 빛은 일부 문서에서 반응했다. 그러나 모든 서류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강제 동의 부분은 무효가 될 수 있었지만, 실제로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의 원본은 남겨야 했다. 그것까지 지워 버리면 피해자가 증거를 잃는다.
“문서 전부를 태울 수는 없습니다.” 재하가 말했다.
카르도가 검집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 서류가 누구에게 속하는지 증명할 방법을 찾자.”
유나는 말없이 보관차의 원본 대조표를 펼쳤다. 각 편지에는 보내는 사람의 의사와 보관 동의 여부가 서로 다르게 기록돼 있었다. 그 차이가 살아 있는 한, 미래의 통합 서명으로 모두를 묶을 수 없었다.
그때 책상 맨 끝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재하의 이름이 적힌 봉투가 아니었다. 발신인이 공란이었다. 그리고 그 문서는 발신실의 어느 예측 장부에도 없었다.
[수신처: 편지를 먼저 발견한 사람.]
[내용: 예정된 구조보다 먼저, 지금 살려 달라는 사람을 찾아라.]
하율이 귀를 기울였다. 벽 뒤에서 실제로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 번,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두 번. 기계의 박자가 아니라 사람이 도움을 청하는 소리였다.
재하는 고개를 들었다. 서류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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