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는 밤늦게 잦아들었다. 가시골 사람들은 젖은 옷을 말리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정작 가장 복잡한 일을 맡은 사람은 마르타였다. 대피소에서 빵을 나눠 주는데 예측국 관리들이 나타나 ‘공식 지원품 수령 증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저 빵은 내가 내 돈으로 구운 건데요.”
“예정 구조 지원항목과 유사한 품목이므로 중복 지급 방지를 위해 수령자 명단이 필요합니다.”
마르타는 밀가루가 묻은 앞치마를 털었다. “제 빵 하나 먹으려면 하늘에 신고해야 합니까?”
재하가 끼어들었다. “우리 어릴 땐 간식 받으면 고맙습니다 하고 끝이었어요.”
“신님은 어디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죠?” 관리가 물었다.
“서류가 적은 곳이요. 적어도 빵집 앞에서는.”
관리들은 자신들이 규정을 따른다고 되풀이했다. 그러나 지난밤 구조가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남자 예측국은 곧장 그 성과를 예산 보고에 포함하려 했다. 구조에 참여한 주민들 가운데 누구도 예측국 지원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보고서의 작은 각주로 밀려났다.
세리아는 보고서 원본을 확보했다. 그 안에는 ‘예측 달성률 100퍼센트’라는 숫자가 인쇄돼 있었다. 그 밑에는 구조 대상이었던 창고 관리인이 예정대로 사망했을 경우의 가상 비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사람이 살아남았는데도, 죽었을 때의 비용을 정산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사람이 살아 있는 경우에도 사망 예상 비용을 청구한다고요?” 릴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살아난 결과를 위해 예방 예산을 썼다는 논리죠.” 에반이 대답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았지만.”
에반은 보고서 중간에서 오래된 코드 하나를 찾았다. E-17. 그가 과거 예측 광고 캠페인을 설계할 때 사용했던 문구 분류 코드였다. 처음에는 미래 수요를 예측해 물자를 미리 준비하는 간단한 안내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이후 ‘예측된 도움’을 실적과 채무로 묶는 기능이 덧붙었다.
“그때 제가 문제를 지적했다면 달랐을까요?” 에반이 물었다.
카르도가 짧게 대답했다.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네가 그때 침묵했다면 지금 할 일은 분명하지.”
“증언하라는 거죠?”
“네 이름을 빼고 시스템만 나쁘다고 말하지 마라.”
에반은 보고서 복사본의 마지막 장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그와 예측국이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 공개 심리에서 증언하겠다는 신청서였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사람이 책임을 인정할 때 그를 무작정 감싸는 일은 도움이 아니었다.
0호 조정실로 향하는 산길 중턱에는 낡은 전망대가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가시골의 지붕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비에 젖은 기와와 새로 고친 다리, 흙더미로 막힌 방직 창고가 한눈에 들어왔다. 재하는 그 풍경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전에는 마을을 지켜본다는 것이 그저 높은 곳에 서서 내려다보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보이지 않는 것도 많았다.
“저기 저 좁은 길 보이세요?” 릴리가 물었다.
“네. 집 사이 골목이요?”
“처음 동생이 아팠을 때 제가 약을 구하러 뛰어다니던 길이에요. 신전에서 쫓겨나던 날도 저기로 돌아왔고요.”
재하는 그 길을 다시 바라봤다. 지도에는 점 하나로도 나오지 않는 골목이었다. 하지만 릴리에게는 무척 긴 시간이 쌓인 장소였다. 누군가 그날 릴리가 신전을 다시 찾아갈 확률이 높다고 계산했다면, 그녀가 왜 돌아갔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을까.
“예측국 지도에는 사람의 사정이 없어요.” 릴리가 말했다. “숫자가 맞더라도 그 숫자에 갇힌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죠.”
재하는 손목에 묻은 진흙을 털었다. 신성 포인트의 숫자에 쫓기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 말이 이해됐다. 신도 한 명이 생겼을 때 그는 처음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신도 수를 늘리는 것만이 목적이 되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예측국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망대 아래에는 카르도가 공병들에게 설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구가 부족하면 먼저 돌아가 장비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가 내리는 명령은 과거의 전쟁신과 다르게 짧고 정확했다. 지금 누구에게 어떤 일을 시키는지, 왜 그 일이 필요한지, 위험하면 중단할 수 있는지를 모두 명시했다.
재하가 웃으며 말했다. “카르도가 군대식 명령으로도 자유를 지키는 법을 배우네요.”
릴리는 작게 웃었다. “명령 자체가 나쁜 건 아니죠. 누가 명령할 권한을 가졌고 언제 멈출 수 있는지가 중요하겠죠.”
그때 에반이 전망대에 올라왔다. 손에는 작은 접수 기록이 있었다. 예측국 내부에서 산길 붕괴 가능성을 경고한 기술자의 제안서였다. 제안서는 한 달 전에 작성됐지만 미르덴의 승인 없이 공개할 수 없다는 사유로 보류돼 있었다.
“이걸 보면 사고가 우연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에반이 말했다. “현장 직원도 위험을 알았지만, 관리자가 예측 모델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숨겼어요.”
릴리가 문서를 읽었다. “그 기술자는 지금 어디에 있죠?”
“0호 조정실 근무 명단에서 사라졌습니다. 오늘 출근 기록도 없어요.”
재하는 불안한 얼굴로 산 아래를 바라봤다. 그들이 구해야 할 사람은 예측에 적힌 미지의 구조 대상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보고한 위험이 묵살된 직원도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세리아에게 연락해 해당 기술자의 안전 여부를 먼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세리아는 대답했다. “개인정보를 공개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근무지와 마지막 확인 시각을 확인하겠습니다.”
이 작은 확인 요청은 앞으로의 사건을 바꿨다. 예측국이 만든 미래에서는 내부 고발자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위험을 알린 사람의 말을 듣기로 했기 때문에, 그가 남긴 기록이 다음 조사에서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제8 환승선의 중앙 조정실을 찾기로 했다. 하율이 수로에 설치된 철제 표식을 따라가 보니, 신전 북쪽 산비탈에 폐쇄된 작은 철길 하나가 있었다. 지도에서 누락됐지만 암석 아래에는 쇠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옛 공사 기록에는 ‘예고 플랫폼’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릴리는 길을 나서기 전 주민회의를 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그들이 알아야 할 위험과 공개하지 말아야 할 개인 기록을 구분했다.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했다. “신님이 다녀오시면 안 되나요? 왜 또 회의를 하나요?”
재하가 답했다. “제가 혼자 다녀오면 결과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 권한을 갖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재하는 아차 싶었다. 조금 멋있게 말해 버린 탓에 마르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럼 다녀오면 마을회관 지붕도 고쳐 주세요.”
“그건 또 왜요?”
“권한은 싫어해도 책임은 좋아하시잖아요.”
회의장은 웃음으로 풀렸다. 재하는 항복하며 손을 들었다.
산길은 미끄러웠다. 카르도가 앞장서고, 하율이 밧줄을 설치했으며, 릴리는 후방 인원을 확인했다. 에반은 계속 예측국 내부 연락망을 해독했다. 가장 뒤에 따라오던 재하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걷는 일이 생각보다 마음 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이라면 언제나 선두에서 빛나는 검을 들어야 한다는 기대가 없었다.
산길을 오르던 하율은 오래된 표지석 하나를 발견했다. 표지석에는 예전 구조대가 재해 때 사용하던 우회길의 길이가 새겨져 있었다. 예측국의 새 지도에는 없는 길이었다. 하율은 경로를 재고 밧줄을 걸었다. 누군가 “그냥 위쪽으로 올라가면 빠르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는 바닥의 균열을 가리켰다. 빨리 도착하는 길보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중요했다. 카르도는 묵묵히 밧줄을 고정했다. 자신이 이끄는 병사들이 그동안 명령 하나에 어떤 길이든 뛰어들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용기인 줄 알았다. 이제는 위험을 확인하고 멈출 줄 아는 사람이 더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멀리서 종이 세 번 울렸다. 가시골의 수로 점검 신호였다. 예측국 장부라면 이 소리를 사고의 전조라고 적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하율의 지도에는 ‘현장 확인 중’이라고 적혔다. 모든 소리에 결론이 붙을 필요는 없었다. 재하는 그 단어를 마음에 담았다. 확인 중. 신이면서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표현이었다.
재하는 에반에게 물었다. “예측국이 우리를 이렇게 자세히 안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까지 맞힐 수 있을까요?” 에반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당신이 빈정거릴 횟수 정도는 맞힐 겁니다.” 재하가 즉시 반박했다. “그럼 그 숫자부터 틀리게 만들죠.” 그러나 곧 그는 말을 멈췄다. 숫자를 틀리게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상대의 계산에 휘둘리는 일이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평소처럼 하겠습니다. 저쪽이 저를 지루하게 계산하든 말든.”
산길 바깥에서는 비에 씻긴 나뭇잎이 흔들렸다. 자연에는 지시서가 없었다. 비가 오면 잎이 젖고, 바람이 불면 나무가 휘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 현상을 지켜보며 위험한 길을 피해 걷는 것이지, 자연이 예측표에 맞도록 명령하는 일이 아니었다. 하율은 짧게 쉬어 가자고 했고, 일행은 물을 나누어 마셨다.
하율은 쉬는 동안 밧줄의 매듭을 다시 확인했다. 물기가 스며들면 풀릴 위험이 있었다. 카르도는 묵묵히 새 매듭을 배웠다. 빨리 걷는 것보다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는 길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폐쇄 철길 끝에는 작은 벽돌집이 있었다. 문패에는 숫자만 적혀 있었다. 0호. 문 안에는 천계의 권위도 없고 신상이 없었다. 낡은 시계들과 여러 장의 지도, 마을마다 서로 다른 날씨와 사고 예측이 적힌 칠판뿐이었다.
하율이 놀라 말했다. “이걸 보세요. 열차가 실제로 갈 수 있는 선로와 예상된 선로가 다르게 그려져 있어요. 예측국은 다음 사고를 먼저 정한 뒤 그쪽으로 시설을 연결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기록을 살폈다. 마을의 동의 없이 놓은 플랫폼, 열리지 않는 배수문, 위험을 유도하는 우편 경유. 수십 지역에서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어 있었다. 실제 구조 요청이 더 많이 들어올수록 예측국의 예산과 영향력이 커졌다.
에반이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회람을 찾았다.
[제8 환승선 운영 원칙: 미래의 선택을 기록한다.]
[실무 보충: 기록한 미래에 맞추어 현재의 경로를 조정한다.]
“처음 원칙과 보충이 정반대잖아요.” 릴리가 말했다.
“두 문장 사이에 수십 년이 있습니다.” 에반이 대답했다. “예측이 틀린다고 인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두 번째 문장을 만들었겠죠.”
재하는 벽면의 달력을 살펴봤다. 붉은 표식이 찍힌 칠일째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대규모 조정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조정 대상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낯익은 문구가 있었다.
[미래 발신자: 윤재하.]
[회신 예정: 최초 구조 요청 1건.]
재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미래에 누군가를 돕는다는 예측만은 너무 정확해 보였다. 이 세계에서 그는 이미 수많은 사람의 구조 요청을 들었고 또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확할 법한 예측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행동이 남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율은 조정실 아래에서 위험한 소리를 들었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벽 뒤에 거대한 레일 전환장치가 숨어 있었다. 제8 환승선의 선로를 실제로 움직이는 장치였다.
“이걸 건드리면 어떻게 되죠?” 재하가 물었다.
“연결된 도시의 물류와 구조망이 동시에 멈출 수 있습니다. 모든 예측 플랫폼이 여기에 묶여 있거든요.”
“그럼 부수면 안 되겠네요.” 카르도가 말했다.
재하가 그를 바라봤다. 전쟁신의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이 ‘부수면 안 된다’라니.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조정실의 문이 그때 닫혔다. 미르덴의 목소리가 천장에서 울려 퍼졌다.
“원본을 본 이상 당신들도 예상 경로에 포함됩니다. 귀환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지정된 발신 서명에 동의하십시오.”
문 위에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현재의 윤재하가 미래의 윤재하에게 서명을 위임합니다.]
재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현재의 저는 그런 말 안 했는데요.”
미르덴이 대답했다. “아직은요. 하지만 여기서 살아 나가려면 하시게 될 겁니다.”
카르도가 검집을 움켜쥐었다. 하율은 벽면의 환기 통로를 살폈다. 릴리는 재하를 바라봤다.
“그 사람이 고른 선택지 말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출구부터 찾아요.”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을 팔겠다는 사람에게 오늘의 행동까지 맡겨 둘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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