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까지 서른여덟 분.
윤재하는 숫자를 보고 생각했다. 한때 신앙 포인트 100점을 모으지 못하면 신격이 사라진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도 이렇게 초조했었다. 그때는 숫자가 자신을 위협했다. 지금은 숫자 아래에 숨겨진 사람들의 기다림을 지켜야 했다.
“일단 뭘 할 수 있죠?” 그가 물었다.
세리아가 기관실 기록을 펼쳤다. “정산이 시작되면 미도착 요청은 모두 조합 자산으로 등록됩니다. 이후 편지의 원본 열람권도 조합으로 넘어가요. 하지만 운행 기록에는 그 집약에 대한 서명이 없어요.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현장 심리관에게 긴급 제출할 수 있습니다.”
“서류는 얼마나 걸립니까?”
“정상 절차라면 하루는 걸립니다.”
“서른여덟 분인데요.”
“그래서 긴급 절차가 필요해요. 위법 상태가 지금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합니다.”
릴리는 원본 기판의 사진 대신 공개 가능한 로그와 봉인된 증거 목록을 만들어 세리아에게 전달했다. 현장 확인자 두 사람과 주민 대표가 각각 진위를 확인했다. 누구 하나가 기록을 독점하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에반은 기존 분류식에 대한 자신의 설계 참여 자료를 증언으로 붙였다. 카르도는 조합이 보급 인장을 마음대로 수신권 승인처럼 사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 사이 하율은 정차역 신호를 유지했다. 녹슨 플랫폼의 역무실 시계가 삐걱거렸고, 바람절벽역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차가운 바람 속에 신호기를 붙들었다. 가시골 임시 보관역에서는 모과가 식은 차를 나눠 주며 대기 인원을 확인했다.
“왜 신님은 안 들어오세요?” 노아가 물었다.
“내가 편지의 주인이 되는 순간 이상한 계약이 다시 시작될 수 있거든.” 재하가 말했다.
“그럼 신님이 안 해도 되는 일이 많네요.”
“그걸 이제야 알아서 바쁘지.”
노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종이배 하나를 접었다. 배 옆에 작은 글씨로 ‘필요하면 타세요’라고 적었다. 재하는 웃었지만 곧 통신관을 붙잡았다. 심리관의 답장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긴급 심리 접수: 증거의 현재성 확인 요청]
[신청인: 지역 공동 보관 협의체]
[피신청인: 경계 수송 보증조합]
재하가 직접 신청인으로 적히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했다. 적치장 사용을 승인한 주민들과 역무 담당자들이 공동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신에게 편지를 빼앗기지 않을 권리와, 조합에게 편지를 팔리지 않을 권리를 동시에 요구했다.
심리관 하엔이 통신에 나타났다. 예전 신격 승계 사건에서 재하의 동의 문제를 살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윤재하 님, 또 뵙는군요.”
“저도 이렇게 자주 뵙고 싶진 않습니다.”
“이번엔 무슨 신격을 받으셨습니까?”
“안 받았습니다. 그래서 온 겁니다.”
하엔이 잠시 웃었다. 그다음 엄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요청의 무단 자산화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 신청인들이 현장 기록을 실제로 보유한다는 사실, 조합 측이 소유권 이관 동의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확인했습니다. 다만 원본 전체를 누가 소유하는지에 관한 최종 판단은 오늘 내릴 수 없습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릴리가 말했다. “오늘 필요한 건 원본을 팔지 못하게 막는 거예요. 사람이 아직 위험한지도 확인해야 하고요.”
하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임시 보전 명령을 검토하겠습니다.”
남은 시간은 열다섯 분이었다. 조합의 대표가 반론을 제기했다. “정산을 중단하면 관련 치료소와 난방 지원의 지급 보증이 붕괴합니다. 수많은 주민에게 피해가 발생할 것입니다.”
카르도가 앞으로 나섰다. “이미 대체 공급을 준비하고 있다. 철비항의 의약품과 도요 고원의 연료는 조합과 별도 계약으로 옮기는 중이다. 아직 완전하지 않다. 필요한 지원도 요청하겠다.”
“그건 충분한 보증이 아닙니다.” 대표가 말했다.
“그래서 공개하겠다는 거다.” 카르도가 답했다. “보증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구조 요청을 담보로 붙잡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
장수가 수송 명세를 제출했고, 니라는 의료품 배분표를 보냈다. 사란은 수로 장비 유지 계획을 냈다. 모두 충분한 자원은 아니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물품과 동의한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적어 두었다. 조합 대표는 서류를 넘기며 고개를 저었지만, 거짓 숫자라고 주장하지는 못했다.
심리관의 통신이 잠깐 끊어진 사이 조합은 마지막 제안을 보냈다. 윤재하 한 사람이 임시 수신인이 되면 정산을 한 달 연기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재하는 서류를 보자마자 눈을 찌푸렸다.
“또 저더러 전부 맡으라는군요.”
에반은 조건을 자세히 읽었다. “겉으로는 임시라는 말이 붙어 있지만, 해지하려면 모든 발신인에게 직접 통보해야 하네요. 사만 건을 하루에 한 통씩 처리해도 백 년이 넘게 걸릴 겁니다.”
“제가 그때까지 신으로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그래서 조합에 유리하죠.”
릴리는 서류를 조용히 접었다. “사람의 기다림을 대신 소유하는 계약은 이젠 그만 받으세요.”
“애초에 받을 생각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합이 정산 중단을 빌미로 실제 공급을 끊을 위험은 남아 있었다. 재하는 마을들에 연락해 현재 가장 부족한 물품부터 확인했다. 철비항의 의료품은 비상 운송 한 차례가 확보됐고, 도요 고원의 연료는 장수의 창고에서 이틀치를 꺼낼 수 있었다. 유리해 구조팀은 이번 주 훈련을 줄이는 대신 긴급 출동 인력을 남겼다.
니라는 통신관에서 말했다. “모든 게 안전하다고는 못 합니다. 조합 보증이 빠지면 약품 구매 계약을 새로 맺어야 하니까요. 그래도 당장 환자를 내보낼 필요는 없어요.”
“고맙습니다.” 재하가 답했다.
“고마워하기 전에 일정을 지켜 주세요. 오늘 해낸다고 내일까지 해결된 척하면 안 됩니다.”
“예. 제가 자주 듣는 말이네요.”
그녀는 웃지 않고 다음 필요한 물품의 목록을 보냈다. 현실적인 걱정은 거창한 선언보다 끈질겼다. 재하는 그 목록을 인쇄해 심리 자료에 첨부했다. 임시 판정이 나온 뒤에도 어떤 지역을 우선 살펴야 하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엔이 다시 접속하자 조합 대표는 최후 변론을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의 기다림에도 가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기다림을 관리하려면 비용이 들고, 비용이 드는 이상 관리 권한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릴리가 대답했다. “비용이 드는 건 맞아요. 보관인에게 임금도 줘야 하고, 수송 장비도 고쳐야 하죠. 그런데 비용을 내는 것과 편지를 자기 재산으로 만드는 건 다릅니다.”
“그럼 아무도 비용을 내지 않겠지요.” 대표가 말했다.
에반이 앞으로 나섰다. “저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답장하지 않은 시간을 상품으로 만들었죠. 하지만 지금 지역들이 직접 지원하는 물품을 보세요. 대가와 범위를 분명히 적었는데도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대표는 에반의 과거를 공격했다. “한때 같은 방식으로 돈을 벌던 악마의 말이 증거가 됩니까?”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주장이 아니라 문서와 실제 공급 기록을 보세요. 제가 설계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조사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제 말만 믿고 판정하시면 안 됩니다.”
재하는 그 대답을 듣고 에반이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의 악마라면 자신의 잘못을 감추면서 멋진 문구로 승리를 얻으려 했을 것이다. 지금 그는 자신의 증언이 틀릴 가능성까지 인정하고 있었다.
하엔은 조합의 마지막 조건을 공개 심리 기록에 첨부했다. 사만 건을 한 신에게 떠넘기면 정산을 미루겠다는 제안은 오히려 수신권의 강제 집약 목적을 드러냈다. 재하는 그 점을 짧게 지적하고 자리에 앉았다. 말을 길게 한다고 판정의 근거가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남은 시간은 일곱 분. 정산 시계가 한 번 크게 울리자 가시골 보관역의 직원들이 자리를 지켰다. 도르가 오래된 종을 들고 나와 옆에 세웠다. 그는 처음 신격을 내려놓으려 했을 때 아무도 자신의 의사를 기록해 주지 않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땐 거절이 기록에 없으면 없었던 일이 되었지.” 그가 재하에게 말했다.
“이번엔 남기죠.”
“그래. 누구의 말이든 있었던 일로.”
재하는 도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종소리 하나가 더해졌다. 조합의 차가운 시계 소리와 달리, 그 종은 주민들이 직접 듣고 손으로 울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엔은 판정문을 읽기 전에 한 가지를 물었다. “검은 우편열차의 보관인이 요구한 독립 복제는 준비됐습니까?”
세리아가 답했다. “시범 기록 한 건은 확인했습니다. 전체 복제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현재는 열차를 그대로 보존하고, 독립 감시 절차를 마련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오늘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군요.”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오늘 하지 않으면 끝나는 일이 있으니까요.”
[긴급 판정]
[검은 우편열차 미배달 요청 40,216건의 일괄 자산화: 잠정 금지]
[편지 원본의 파기 및 제삼자 일괄 열람: 잠정 금지]
[공공 안전 관련 위험 확인: 지역 공동 보관 협의체의 독립 감독 아래 계속]
[후속 심리 기한: 30일]
정산 시계가 멈췄다. 검은 우편열차의 객차에서 낮은 떨림이 흘렀다. 누군가 크게 환호했지만 재하는 곧장 사람들에게 안전 구역을 유지해 달라고 부탁했다. 기계가 멈췄다는 사실만으로 위험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유나의 목소리가 보관차에서 들려왔다. “고마워요. 지금은 원본을 지울 필요가 없어졌네요.”
“이제 나오셔도 됩니까?” 릴리가 물었다.
“아직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저와 함께 지킬 수 있는 길이 열렸어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하율은 처음으로 역무실 모자를 벗었다. “내가 스물여섯 해 동안 지킨 건 기차역이 아니었구먼.”
재하가 물었다. “그럼 뭔데요?”
“누군가 도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지.”
가시골 주민들은 그날 밤 열차를 구경하러 오지 않았다. 대신 교대로 경계 신호를 확인하고, 임시 보관역 주변의 접근로를 정리했다. 릴리는 시급히 연락해야 하는 위험 항목의 목록을 지역별로 나눴다. 세리아는 조합이 장부를 다시 조작하지 못하도록 변경 이력을 보존했다. 에반은 자신의 증언을 철회할 수 없다는 문장에 서명했다. 카르도는 구조 인력이 무리하지 않게 다음 날의 휴무표를 먼저 작성했다.
재하는 늦게야 쉼터로 돌아왔다. 지붕 아래에는 모과가 남겨 둔 따뜻한 수프가 있었다. 그는 한 숟갈 먹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적도 없는 첫날에 릴리와 노아 곁에 밤새 있었던 것처럼, 오늘도 누군가를 대신 소유하지 않고 옆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었다.
“이제 끝났어요?” 노아가 물었다.
“끝난 건 아니야. 그래도 오늘 밤은 열차가 편지들을 빼앗기지 않을 거야.”
“그럼 편지도 자요?”
“글쎄. 편지는 잠들진 않을 텐데.”
“그럼 제가 재워 줄까요?”
노아는 종이배를 접은 뒤 그 안에 작은 종이를 넣었다. ‘답장을 꼭 받지 않아도 괜찮아요. 필요하면 여기 있어요.’ 재하는 그 문장을 오래 읽었다. 아이가 건넨 종이배는 어떤 계약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신앙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도르가 창문 너머로 열차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 열차가 어떤 이름으로 불릴지는 그곳에 편지를 남긴 사람들이 정하겠지.”
“검은 열차라는 이름이 마음에 안 드세요?” 재하가 물었다.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네. 다만 사람들이 두려워해서 붙인 이름만으로 전부 설명되는 것은 아쉬워서.”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편열차는 검게 보였지만 그 안에 담긴 말들은 서로 달랐다. 끝난 부탁도 있고, 아직 위험한 신호도 있었다. 누군가의 감사와 거절, 기다림이 뒤섞여 있었다. 하나의 색으로 묶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모두가 잠든 새벽, 세리아에게서 마지막 통신이 왔다. 긴급 판정의 효력을 검증하던 중, 조합의 분류기 아래에 숨겨진 두 번째 장부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검은 우편열차 미도착 요청: 40,216건]
[미발송 대기 문서: 1건]
[발신 시각: 아직 오지 않음]
[수신처: 가시골 신전]
재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미배달 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 보냈으나 닿지 못한 것이니까. 하지만 아직 보내지 않은 편지가 왜 열차의 가장 오래된 장부에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 줄이 한 번 더 깜빡였다.
[작성자: 윤재하]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자신은 그런 편지를 쓴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또 그의 이름을 도용한 걸까. 아니면 언젠가 자신이 쓰게 될 말을 이 오래된 장치가 먼저 기다리고 있는 걸까.
재하는 서둘러 답장을 쓰지 않았다. 먼저 원본과 서명 시각부터 확인하자고 세리아에게 말했다. 자기 이름이라고 해서 무조건 자신이 썼다고 믿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검은 열차는 가시골 외곽에서 조용히 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맨 아래에 붙은 미래의 편지 한 장은, 신도의 숫자보다 훨씬 어려운 질문을 재하에게 남겼다.
제16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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