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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16화
PAYLUA ORIGINAL · 제16화

16화. 악마의 전 직장은 담보청이었다

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064자

오프라인 책장
에반은 자신이 불태우려던 카드가 윤재하의 손에 들어간 이유를 오래도록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불이 붙지 않는 카드가 문제였다. 그래서 신전 뒤편 소각장에서 가만히 서 있었는데, 마침 야간 당번을 돌던 도란이 그 모습을 보았다. “야밤에 뭘 태우려고 하나?” “지난 회사 명함.” “그럼 왜 안 타?” “회사에서 지급한 물건은 퇴직 후에도 반납 의무가 있거든.” 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재하에게 말했다. “신님, 이 악마가 회사 명함을 불태우다가 실패했어.” “그런 일까지 보고하지 마!” 에반이 소리쳤을 때는 이미 늦었다. 재하는 카드를 집어 들고 적힌 글자를 읽었다. 그의 얼굴에는 대단한 분노 대신 피곤한 사람 특유의 표정이 떠올랐다. “신앙 담보청 선임 보증설계관?” “경력이 좀 있어.” “그냥 마케팅 담당이라고 했잖아요.” “마케팅과 금융 설계는 생각보다 가깝지. 둘 다 사람들이 아직 갖지 않은 미래를 팔잖아.” “그 말이 멋있어 보일 줄 알았습니까?” 에반이 입을 다물었다. 둘은 신전 뒤쪽의 창고로 들어갔다. 릴리와 노아는 안쪽에서 쉬고 있었다. 재하는 창문을 닫고 카드와 누리가 준 원계약 사본을 나란히 놓았다. “어디까지 관여했는지 말해 주세요.” 에반은 한참 후에 의자를 당겼다. “처음에는 자발적인 기도를 미래 소득으로 계산하는 일이었어. 큰 신전은 명절마다 얼마의 신앙이 모이는지 알 수 있었지. 그걸 토대로 오늘의 기적을 빌리고 내일 갚는 거야. 문제는 예측이 틀렸을 때 생겼어.”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손실이 나지. 대출한 신전이 책임져야 했어. 원래는.” “원래는.” 에반이 반복했다. “하지만 큰 신전은 시장에서 지기 싫어했어. 그래서 나 같은 보증설계관에게 새로운 상품을 주문했지. 신도와 신격을 하나의 보증 단위로 묶는 계약. 사람 한 명이 다른 곳으로 기도하러 가더라도 그 신앙의 예상 수익만큼은 이전 신전이 청구할 수 있게 한 거야.” 재하는 카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사람의 미래 선택을 팔았군요.” “그때는 다들 그렇게 불렀어. 안정적인 신성 공급 구조.” “누군가 싫다고 했을 텐데요.” “당연히.” 에반은 손톱으로 탁자를 긁었다. “우리는 거절할 자유를 없애는 대신, 거절한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는 방식을 택했어. 치유 순위를 늦추고, 군사 보호에서 제외하고, 기적 신청 자격을 제한했지. 선택은 여전히 자유라고 광고했어.” 재하의 속이 서늘해졌다. 유리포에서 보았던 바로 그 제안이었다. “그래서 이 일을 잘 안 거군요.” “잘 알았지. 내가 설계했으니까.” 긴 침묵이 흘렀다. 에반은 재하가 화를 내기를 기다렸다. 쫓아내든, 책임을 묻든, 무엇이든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하는 먼저 물었다. “그 상품 때문에 실제로 다친 사람이 몇 명인지 압니까?” “정확한 수는 몰라.” “그럼 기록을 찾읍시다.” “나를 용서하겠다는 거야?” “아니요.” 재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 앞에서 미안하다고 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잖아요.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본인이 설명해야죠.” 에반은 그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꾸짖는 말보다 더 아팠다. “난 이미 담보청을 떠났어.” “그 이유는요?” “상품이 성공했으니까.” 재하가 눈썹을 찌푸렸다. “성공해서 그만뒀다고요?” “실패했을 때는 조작할 수 있는 숫자가 있었어. 그런데 성공하니까 전쟁도 질병도, 마을이 붕괴하는 일도 모두 회수 가능한 수익으로 보이더군. 누군가 죽어도 유가족이 남으면 기대 수익이 유지됐고, 사람을 구하면 기적 대출 수요가 늘었어.” 에반은 머리를 숙였다. “어느 날 내가 만든 상품을 설명하려고 한 여자를 만났어. 남편이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남편 이름으로 등록된 신앙을 상환해야 한다고 했지. 그 여자가 물었어. ‘그 사람이 돌아오면 빚도 돌아오나요?’ 나는 대답을 못 했어.” 재하는 브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여자가 누구였죠?” “이름은 모른다. 당시에는 고객번호로만 봤거든.” “그래서 떠난 겁니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나는 그다음 날도 출근했어. 여섯 달 더 일했지. 떠난 건 마지막에 내가 만든 계약이 소유자를 지정할 수 없는 신뢰까지 담보로 잡기 시작한 뒤였어. 그때 비로소 계산서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거든.” 재하가 씁쓸하게 웃었다. “양심보다 계산이 먼저였네요.” “그렇지.” 에반은 반박하지 않았다. 에반이 처음 담보청의 금빛 건물에 들어간 날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천계에는 비가 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건물 입구의 대형 분수는 밤낮없이 맑은 물을 뿜었다. 신들이 어디에서 그런 물을 끌어오는지 그는 묻지 않았다. 실적이 좋으면 언젠가 분수 옆 사무실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뿐이었다. 당시 에반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복잡한 계약을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로 바꾸는 능력이었다. 누군가에게 ‘미래 신앙 소득의 조건부 양도’라고 하면 화를 냈지만 ‘가족을 지키는 보호 약속’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은 그것을 설득이라고 불렀다. 처음 맡은 상품은 병영의 부상병들을 위한 것이었다. 전쟁신은 다음 전투에서 사용할 기적이 필요했고, 병사들은 오늘 치료받아야 했다. 신전은 미래 봉헌을 담보로 치료 기적을 빌렸다. 실제로 많은 병사가 회복됐다. “좋은 일을 하고 있네.” 그때 에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가 빚을 졌다는 사실보다 누군가가 살아났다는 결과가 눈에 잘 들어왔다. 문제는 치료받았던 병사 중 한 사람이 신전을 떠나고 싶다고 말한 날이었다. 그 병사는 전쟁이 끝났으니 가족에게 돌아가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신전이 예측한 다음 열 해의 봉헌은 그 병사의 선택 때문에 줄어들었다. 상관은 에반에게 해결책을 요구했다. “본인의 결정은 존중하되, 금융상 손실은 막을 수 없나?” 에반은 일주일 만에 약관을 만들었다. 떠날 자유는 그대로 두고, 떠나면 보호 혜택을 잃게 하는 방식이었다. 병사는 결국 남았다. 서류에는 ‘자발적 재가입’이라고 기록됐다. 에반은 승진했다. 그 뒤로 상품은 빨리 퍼졌다. 군인 가족에게는 전쟁 보호, 농부에게는 수확 기원, 환자에게는 치료 보장, 뱃사공에게는 안전 항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두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필요하다는 이유로 선택의 대가를 높이는 방식은 똑같았다. 작은 마을의 사제들은 처음에는 항의했다. 하지만 큰 신전이 미래의 신앙을 앞당겨 기적을 쓰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그쪽으로 몰렸다. 작은 신전도 살아남으려면 같은 계약을 맺어야 했다. 그렇게 모두가 다르다고 말하면서 같은 시스템에 매달리게 됐다. 한 번은 에반의 후배가 물었다. “아무도 서명하지 않은 미래 신앙은 누구 것인가요?” “현재 관리하는 신전이 우선권을 가진다.” “당사자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요?” “그런 복잡한 예외는 법무실에서 처리해.” 후배는 고개를 끄덕였고, 에반도 자신의 설명이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전월 대비 성장률이 큰 그래프가 늘 그들의 판단을 옳게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떤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다. 계약을 맺은 사람들은 치료받을 권리를 부여받았지만,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때도 에반은 책임을 다른 부서에 넘겼다. 자신은 치료 순위를 설계하지 않았고, 신성 공급 안정화 구조만 만들었다고 말했다. “결국 사람이 죽었겠죠.” 재하가 낮게 물었다. 에반은 끄덕였다. “그랬겠지. 난 기록을 직접 확인하지 않았어. 그게 제일 부끄러워. 내가 모른 게 아니라, 알면 계속 일할 수 없을까 봐 안 본 거야.” 재하는 에반을 쳐다봤다.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이 눈앞에 있다고 해서 진실이 더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에반이 정말로 책임을 지려면 누구를 어떻게 해쳤는지 찾아야 했다. 하지만 에반도 모르는 피해자들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모르는 걸 지금이라도 기록해요.” 에반이 놀란 얼굴로 올려다봤다. “그것도 기록할 가치가 있어?” “누가 조사해야 하는지 알 수 있잖아요. 당신이 증언할 수 있는 범위와 없는 범위도 구분해야 하고요.” 한때 에반은 누군가의 미래를 숫자로 바꾸는 일을 잘했다. 지금 그는 처음으로 자기 과거를 숫자 하나로 정리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재하는 당장 에반에게 신전을 떠나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침 회의를 시작할 수도 없었다. “앞으로 신전에서 계약 관련 조언을 할 때는 전에 관여한 상품인지 먼저 알려 주세요.” “알겠어.” “사람들에게 계약을 권유하는 일도 당분간 맡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에반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영업을 못 하면 내가 여기서 할 일이 없어지는데.” “아니요. 기록을 정리하고 설명하는 일도 있어요.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어떤 문구를 읽었는지 당신은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신이 죄인에게 일자리부터 주는 거야?” “여기서 일하는 것이 처벌을 면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당신 대신 용서를 결정할 수 없어요.” 에반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도 그 말 때문에 조금 더 오래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럼 내 월급은?” “지금까지도 월급 준 적 없잖아요.” “그러니 이번에 책정해 줘야지.” “신전이 아직 적자입니다.” 두 사람은 잠깐 웃었다. 웃음이 끝나자 다시 불편한 침묵이 찾아왔다. 재하는 그 침묵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래 잘못된 일을 웃어넘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에반은 자신의 카드 뒷면에 붙은 손때를 한동안 바라봤다. 그가 지금까지 버리지 못한 것은 그 명함이 아니라 과거에 잘나가던 자기 모습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명함을 지운다고 피해자의 사정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그는 카드를 숨기지 않고 탁자 가운데로 밀어 놓았다. 그날 밤 세리아를 불러 기록을 남겼다. 에반은 자신의 경력, 업무, 알고 있는 약관 개정일을 서명했다. 재하는 에반을 대신해 진술하지 않았고, 세리아도 그를 즉시 면책하지 않았다. “고의로 작성한 부당한 보증 약관이라면 책임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압니다.” “그리고 이 진술이 담보청에 알려지면 그쪽에서는 증인을 제거하려 할 겁니다.” “그쪽에선 나는 이미 제거 대상일 거야.” 세리아는 에반의 명함을 봉투에 넣었다. 그 순간 안쪽의 숨은 문양이 드러났다. [최초 계약 변경 제안서] [작성자: 에반] [변경 대상: 무명의 신격 기록 보존소] [상태: 반려] 재하가 놀란 눈으로 에반을 봤다. “당신, 이 신전하고도 관련이 있었어요?” 에반은 카드의 뒷면을 만졌다. “삼백 년 전 최초 계약이 있었고, 그 후에 나는 그걸 바꾸라는 명령을 받았어. 나는 다른 신들처럼 인간의 이름을 지워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무명의 신이 내게 딱 한마디를 했어.” “뭐라고요?” “네가 지우려는 이름을 그 사람이 직접 지우라고 했느냐.” 재하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변경이 반려된 거군요.” “그 뒤로 기록소가 봉인됐지. 나는 그 신을 설득하지 못했고, 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했다고 들었어.” “당신은 그때부터 진실을 알았는데도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습니까?” 에반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내가 가장 잘한 일처럼 떠들던 경력이, 사실은 네가 가장 싫어할 일이었으니까.” 재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을 함께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숨긴 사실 때문에 다시 피해가 생기면 안 됩니다. 더 숨긴 게 있으면 지금 말해요.” 에반은 고개를 저으려다가 멈췄다. “하나 있어. 유리포의 압류 명령은 미르켈 단독 판단이 아니야. 네가 원계약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 담보청 본부의 원장에게 자동 통지가 갔어.” “원장이요?” “이름 없는 사람. 회수부에서는 그냥 ‘서명권자’라고 불렀지.” 세리아의 수정판이 울렸다. 전송된 문서에는 그 이름 대신 검은 공백이 남아 있었다. [감사 대상 보전 명령] [관련자: 윤재하, 세리아, 에반, 릴리 외] [증거 자료 임시 압수 예정] 재하는 답장을 작성했다. ‘대상자 명단에 노아를 포함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압수할 물건의 목록을 먼저 보내십시오.’ 에반이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 위대한 서명권자에게 첫 번째로 할 말이 그거야?” “아이가 왜 관련자입니까.” 말은 짧았다. 하지만 에반에게는 그 짧은 말이 이상할 만큼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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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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