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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15화
PAYLUA ORIGINAL · 제15화

15화. 첫 신도는 떠날 권리가 있다

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082자

오프라인 책장
윤재하가 신전에 돌아왔을 때, 노아는 문 앞 계단에 앉아 있었다. 아이의 얼굴이 붉었다. 열이 오르는데도 누나를 기다리겠다며 고집을 부린 탓이었다. 곁에는 마르타와 도란이 있었고, 아이 앞에는 미지근한 물과 젖은 수건이 놓여 있었다. “내가 한 번 치료했는데.” 재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고 후회했다. 치료에 신성 포인트 하나를 썼다고 해서 평생 다시 아프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열은 기적의 승패를 가리려고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릴리는 노아의 이마를 만졌다.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의사를 불렀어요?” “마을 의사가 왔다 갔어.” 마르타가 답했다. “기침과 열이 같이 올라. 해가 지면 다시 보러 오겠다고 했지.” 재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치료 권능을 확인했다. [경미한 생기 회복: 20포인트] [지속성 질환 치료: 진단 결과 필요] [현재 신앙 포인트: 103] 처음 신도가 생겼을 때는 단 한 점으로 노아의 고열을 가라앉혔다. 그때와 지금의 병이 같다는 근거는 없었다. 권능이 비싸졌다고 무조건 사용하면 도움이 될까? 그마저도 지속 효과를 보장하는 설명은 없었다. “일단 의사 말씀부터 듣죠.”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말을 끝까지 보지 않았다. 그날 밤 리아넬 신전의 사제가 방문했기 때문이다. 사제는 하얀 병 하나를 꺼냈다. 뚜껑 안쪽에는 옅은 푸른 빛이 맺혀 있었다. “신성 호흡 치료제입니다. 전문 치료사가 상주하는 대성전으로 오시면 아이를 진찰한 뒤 필요할 경우 치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재하가 물었다. “비용은요?” “일반 환자는 선납 열 닢. 신앙 보호 계약을 맺은 가족은 비용을 대출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계약 조건을 보여 주세요.” “환자 보호자에게만 공개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릴리를 바라봤다. 재하는 즉시 옆으로 비켜섰다. 자신의 신도라고 해서 다른 신전이 그녀에게 조건을 제시할 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릴리 씨가 보고 결정하세요. 질문이 필요하면 제가 옆에 있을게요.” 릴리는 계약서를 받아 읽었다. 글자를 다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따라 읽으려 애썼다. 그중 한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보호 계약 유지 동안 타 신격과의 신앙 관계를 종료한다.] “신님을 떠나야 한다는 거예요?” 사제가 친절한 목소리로 답했다. “중복 보장을 방지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우리 신전은 충성 고객에게 더 좋은 조건을 제공합니다.” 에반이 뒤에서 코웃음을 쳤다. “고객이라는 말은 참 좋아하네.” 재하는 속으로 침을 삼켰다. 그에게는 신도가 서른한 명이었다. 그중 가장 먼저 믿어 준 사람이 릴리였다. 그런데 릴리가 다른 신전을 선택하면 숫자 하나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마음 한쪽이 비는 것 같을 터였다. “떠나도 됩니다.” 그가 먼저 말했다. 릴리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노아가 아픈데, 저를 믿는 일이 그보다 중요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저는 신님을 믿어요. 그런데 지금은….” “알아요.” 재하는 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결정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날 밤 릴리는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신전에서 사라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메모 한 장만 남았다. ‘노아를 데리고 리아넬 신전에 다녀올게요. 제가 직접 조건을 더 물어보고 싶어요. 돌아오는 시간을 약속할 수는 없어요.’ 노아의 침대도 비어 있었다. 에반이 종이를 보고 혀를 찼다. “서명 안 하고 도망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선택을 하러 간 거야.” “알아요.” “그런데 왜 표정이 그래?” “말로 떠나도 된다고 하는 것과, 정말 떠난 뒤에 견디는 건 다르네요.” 재하가 창 밖을 보았다. 마을의 작은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볼일을 보러 오갔다. 그는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신이고 싶었지만, 누가 자신을 택하지 않는 날에는 흔들리는 신이었다. 그날 낮, 리아넬 신전에서 편지가 왔다. [보호자 릴리 — 계약 심사 진행 중] [기존 신앙 관계 유지 여부 확인 요청] [답변 기한: 오늘 정오] 재하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저는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므로 릴리의 의사를 대신 답할 수 없습니다. 기존 관계 종료 여부는 릴리 본인에게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종이를 다시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은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더니 말했다. “이렇게 하면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해.” “그러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거죠.” “그 말을 이렇게 쉽게 하는 신이 어떻게 일주일 만에 백 점을 모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걸 보려고 같이 있는 거잖아요.”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 같은 날 아침, 릴리는 신전을 나서기 전에 오래 망설였다. 어릴 때부터 신전은 기도를 바치는 곳이었다. 언젠가 성녀가 되면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성녀가 된다는 것이 한 명의 신을 평생 따라야 한다는 뜻인지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노아에게 두꺼운 외투를 입히면서 물었다. “몸이 많이 아프니?” “숨 쉴 때 가끔 답답해. 근데 누나가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 “내가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 “재하 신님도 걱정하잖아.” 노아가 웃었다. 릴리도 웃으려 했지만 입술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 치료받았던 날을 기억했다. 기적은 따뜻했지만, 그 전에 재하가 물을 끓이고 밤새 손을 잡아 주었던 시간이 더 선명했다. 그녀는 손에 든 계약서를 접었다. 치료받고 싶은 마음과 신앙을 지키고 싶은 마음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신하는 것은 아닐 텐데, 신전은 자꾸 선택지를 둘로 줄였다. “우리, 먼저 의사한테 가자.” “리아넬 신전이야?” “응. 거긴 치료 잘한다고 하니까.” “그럼 재하 신님은?” “신님은 우리 마음대로 선택해도 된다고 했어.” 노아는 잠깐 생각했다. “그 말은 참 좋은 것 같아. 나도 커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래.” “어떤 일?” “수로 고치는 일. 사람들이 물 때문에 싸우지 않게.” 릴리는 동생의 손을 더 꼭 잡았다. 그러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마을에서 출발했다. 설명하면 재하가 말릴 것 같아서가 아니라,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자기 선택을 스스로 내린 뒤에야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아넬 신전은 눈부시게 깨끗했다. 흰 대리석 바닥에는 실내 정원이 비쳤고, 치료실 앞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앉아 있었다. 약초 냄새와 향 냄새가 섞여 있었다. 벽에는 치료 기적의 성공 사례가 걸려 있었다. 접수대 직원이 웃으며 물었다. “보호 계약은 있으세요?” “없어요.” “그러면 정회원 전환을 먼저 안내해 드릴까요?” 릴리는 노아를 내려다봤다. 아이가 작은 기침을 했다. “계약 없이 진료만 받을 수 있나요?” 직원은 잠깐 눈을 깜빡였다. 아무도 먼저 그렇게 묻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능합니다. 다만 진료비가 더 비쌉니다.” “얼마죠?” 직원은 작은 가격표를 보여 주었다. 정회원 비용보다 높았지만, 계약 없이도 진료받을 길은 있었다. 접수대에는 그 가격표가 눈에 띄게 놓여 있지 않았다. 릴리는 한참 동안 동전을 세었다. 필요한 돈은 조금 모자랐다. 이대로 돌아가야 할까 생각하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자라는 건 내가 빌려줄게.” 안나였다. 유리포에서 돌아온 뒤 릴리의 표정이 좋지 않아 따라왔다고 했다. 그녀는 방직 작업장에서 빠져나온 뒤 작은 수선 일을 시작했다. 크게 벌지는 못하지만 당장 얼마를 빌려줄 여력은 있었다. “그건 안나 언니 돈인데요.” “알아. 그래서 빌려준다고 했잖아. 일해서 갚으면 돼.” “이자도 있나요?” 안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없어. 다만 갚는 날짜는 네가 정해. 못 지키면 말하고.” 릴리는 작게 웃었다. 자신은 기적의 대출 계약을 피해 여기 왔는데, 정작 사람 사이의 작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빚에는 자기 믿음을 통째로 넘긴다는 조항이 없었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진료실의 의사는 노아의 가슴을 듣고 목을 살폈다. 감염 후 기도가 예민해졌을 가능성을 설명하며, 당장 고가의 지속 치료 기적이 필요하다고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대신 호흡이 더 나빠지거나 열이 지속되면 다시 오라고 했다. “그럼 지난번에 기적으로 나았는데 다시 아픈 건 왜죠?” 의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한 번의 회복이 평생의 면역을 보장하지는 않아요. 치료는 필요한 때마다 상태를 살펴 결정해야 합니다.” 릴리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신이 이겼느냐가 아니라 노아가 안전하게 숨을 쉬는 것이었다. 진료를 마친 뒤 그녀는 신전 복도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벽에는 ‘신앙 보호 계약 체결 시 치료비 부담 완화’라는 큰 문구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바로 옆 작은 글씨로 적힌 계약 해지 절차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 글씨는 왜 이렇게 작을까.” 안나가 대답했다. “작게 쓰면 사람들이 덜 물어보니까.” 릴리는 그 문장을 기억하기로 했다. 자신이 성녀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직 몰라도, 사람들이 묻지 못하게 하는 글씨를 읽어 주는 일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저녁에 릴리가 돌아왔다. 노아는 의사가 써 준 일반 약을 먹었고, 열은 조금 낮아진 상태였다. 전문 진료에서는 병이 재발한 것이 아니라 먼지와 감기로 호흡기가 예민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며칠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소견이 붙었다. “그 신전에 들어가려면 서명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진찰은 돈을 내고 받을 수 있더라고요.” 릴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출을 하지 않고 진료비만 낼 수도 있었어요. 돈은 안나 언니가 빌려 줬고요. 제가 일해서 갚기로 했어요.” 재하는 숨을 내쉬었다. “그럼 잘됐네요. 하지만 다른 신전을 믿는다고 해도 저는 화내지 않겠습니다.” 릴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저를 계속 떠나게 만들고 싶으세요?” “그건 아닌데….” “저는 남으려고요. 제가 고른 거니까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에반이 박수를 두 번 쳤다. “감동적인 장면인데 신규 신도는 없네.” 릴리가 그에게 젖은 수건을 던졌다. 릴리는 다음 날부터 동생의 상태를 표에 적기로 했다. 아침과 저녁에 열이 있는지, 기침은 얼마나 하는지, 잘 먹는지 간단하게 기록하는 일이었다. 의사가 알려 준 경고 신호도 침대 옆에 붙였다. “이런 걸 다 써야 해?” 노아가 물었다. “응. 네가 아프면 우리도 더 잘 알 수 있잖아.” “그럼 내가 안 아픈 날도 쓰자. 기분 좋았던 날도.” 릴리가 웃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재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깨달았다. 자기 손에서 금빛 기적이 나왔던 한순간만큼, 그 뒤에 몸을 살피고 다시 진찰받는 평범한 일도 중요했다. 신이라면 한 번에 모든 문제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은 편리하면서도 위험했다. 노아는 잠깐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그런데 신님, 제가 아파도 제 이름이 누구의 장부에 안 들어가면 좋겠어요.” 재하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저도 그래요. 그래서 그 장부를 찾아보려는 거예요.” 그날부터 릴리는 신전의 기록을 맡으면서 아이들과 가족의 건강 기록을 신앙 장부와 따로 보관했다. 필요한 사람이 자기 기록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작은 규칙이었다. 문제는 해결된 듯했다. 그러나 릴리가 가져온 진료 내역서에는 아주 작은 글씨가 있었다. [의료 서비스 제공자: 리아넬 신전] [해당 신성 조달 보증인: 천계 신앙 담보청] [진료비와 무관한 신성 심사 기록은 7년 보관] “왜 병원 진료에 담보청이 끼어 있죠?” 재하가 물었다. 에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치유 기적의 원료를 빌려 쓰는 거야.” “무엇을 원료로요?” “회수된 신앙.” 릴리가 노아의 손을 꽉 쥐었다. 재하는 문서의 보증 기관 이름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데, 정작 그 도움을 공급하는 줄의 맨 위에는 사람들의 믿음을 압류하는 기관이 있었다. 그날 밤 에반은 혼자서 신전 뒤편 오래된 소각장으로 갔다. 그는 품속에서 검은 인장이 찍힌 작은 카드를 꺼냈다. 손가락으로 문구를 몇 번 쓸더니 불속으로 던지려 했다. 하지만 카드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전 신앙 담보청 선임 보증설계관 에반] [재직 기록 열람 권한: 영구 보존] 에반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날 만든 계약은 여전히 내 이름을 기억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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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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