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골 쉼터의 종이 새벽 세 시에 울리면 보통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지붕에 고양이가 올라갔거나, 누군가 세상이 끝난다는 공문을 들고 찾아왔거나.
윤재하는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렸다.
“오늘은 고양이였으면 좋겠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세 번 났다. 노아였다.
“신님! 하늘에 기차가 다녀요!”
“고양이보다 나쁘네.”
그는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 공기는 축축했고, 밤하늘을 가로지른 검은 선은 어제보다 굵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선은 끊어져 있지 않았다. 가늘게 떨리는 두 줄의 레일이었고 그 위를 빛 없는 객차가 느린 속도로 지나갔다. 바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 방 안에서 봉투를 뒤적이는 듯한 바스락거림이 골목마다 스며들었다.
릴리가 신전 계단에 서 있었다. 손에는 세리아가 보낸 전보가 들려 있었다.
“공동 경유실에서 숫자를 다시 세었대요. 사만 이백열여섯 건.”
“보낸 사람은요?”
“대부분 불명. 수신처도 불명. 같은 사람의 요청이 여러 건 있는지도 아직 모른대요.”
재하는 숫자를 입속으로 굴렸다. 사만 이백열여섯. 처음 신이 됐을 때는 한 명도 없는 신도를 어떻게 늘릴지만 궁리했다. 지금은 신도 숫자가 아니라, 누가 어디서 도움을 기다리는지조차 알 수 없는 요청의 숫자를 보고 있었다.
신성 창이 열렸다.
[검은 우편열차: 경유 허가 요청]
[요청 처리 기관: 신격 미지정]
[자동 대체 수신인: 인근 신격 윤재하]
[승인하면 전체 요청의 관리 책임이 이관됩니다.]
재하는 확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이상하게 익숙한 문장이네.”
그는 창을 릴리에게 보여 주었다. 릴리는 마지막 줄에 손가락을 올렸다.
“이관된다는 말은 누가 쓰신 거죠? 보낸 사람이 맡긴 것도 아닌데.”
“그래서 먼저 조사해야죠.”
재하는 ‘전체 수락’ 아래 아주 작게 적힌 ‘현장 정보만 요청’을 눌렀다. 돌아온 것은 지도 한 장과 역 이름 하나였다.
[제1정차 예정지: 녹슨 플랫폼]
[정차까지 04시간 12분]
[주의: 신격의 직접 탑승 제한]
신에게 타지 말라는 열차라니. 상당히 정중한 모욕이었다.
아침 식탁에 모인 사람들의 의견은 다양했다. 에반은 처음부터 머리를 굴렸다.
“검은 우편열차. 이름이 좋군요. ‘가장 오래 기다린 당신의 사연을 찾아드립니다.’ 구호를 붙이면 대중의 관심을—”
“사연을 광고로 쓰진 말아요.” 릴리가 잘랐다.
“아직 요금표도 못 꺼냈는데.”
“요금표도 넣어 두세요.”
모과는 차를 따르며 한숨을 쉬었다. “어제 주민회의에서 신전 지붕부터 고치기로 했잖아요. 재하 씨가 떠나면 누가 회의록 서명해요?”
“제 표 하나 없어도 결정되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래도 본인에게 배정된 지붕 수리 당번은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지 마요.”
재하는 도망가듯 일어나려다가 못 한 봉지를 들었다. 가시골의 신은 종종 천계와 다퉜지만 동쪽 문짝에는 여전히 약했다.
도르가 지도 위에 낡은 돋보기를 올려놓았다. “녹슨 플랫폼은 원래 수송역이 아니네. 재난이 일어났을 때 구조 요청을 모아 전달하던 경유점이었지. 그 기능이 사라진 뒤에도 길이 남았다는 소문을 들었네.”
“그럼 이 열차는 왜 지금 움직인답니까?”
“누군가 마지막 정차 시한을 연장하는 걸 멈췄을 수도 있어.”
방 안이 조용해졌다. 재하는 천계가 정한 기한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일을 뒤집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추측일세. 기록을 봐야지. 자네도 이제 알잖나.”
그 말이 재하에게는 마음에 들었다. 아직 세상의 비밀을 풀 열쇠가 자기 손에 있다는 생각보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할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든든했다.
지도에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더 있었다. 녹슨 플랫폼에서 출발하는 길이 가시골까지 이어지는데, 중간중간 마을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흔한 낡은 지도라면 잉크가 흐려졌을 테지만, 이 지도는 이름을 적어 두었던 종이 부분만 얇게 도려낸 것 같았다.
도르는 손톱으로 빈자리를 훑었다. “이 선로가 처음 놓이던 시절에는 작은 역마다 사람이 있었네. 편지가 도착하면 역무원이 이웃 마을에 알렸지. 나중에 신계의 수송 계약이 모든 역을 하나의 관리자 아래 묶었어.”
“하나의 관리자가 있으면 편하지 않습니까?” 재하가 물었다.
“운임을 계산하는 사람에겐 그렇겠지. 하지만 산사태가 나서 역이 막혔을 때 마을 사람이 바로 옆마을로 뛰어갈 수 있던 길은 사라졌어. 절차를 몰랐으니까.”
재하는 가시골의 첫날을 떠올렸다. 폐허 신전에 덜렁 혼자 떨어졌을 때 그에게는 기적도, 신도도, 길을 알려 줄 사람도 없었다. 시스템은 친절하게 숫자를 보여 줬지만 정작 밤에 아픈 아이를 어떻게 돌볼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릴리를 만나고 나서야 사람이 먼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릴리는 지도 모서리에 연필로 메모했다. ‘역의 건물보다 역무원의 연락망 확인.’ 에반은 그 옆에 작은 별을 그렸다.
“그거 광고 문구로 써도—”
“안 돼요.” 릴리가 대답했다.
“끝까지 들어 주지도 않는군요.”
모과는 쉼터 창고에서 여분의 장갑과 종이를 가져왔다. 그녀는 지도에 적힌 거리보다 구조 장비의 무게를 먼저 계산했다. 물통을 여섯 개 싣고도 들것이 들어갈 공간이 있는지 확인하자 카르도가 감탄했다.
“우리 보급관으로 오지 않겠나?”
“월급은 얼마 주시는데요?” 모과가 물었다.
카르도는 당황했다. “월급?”
“그럼 안 갑니다.”
도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전쟁신은 한참 고개를 숙이더니 수송 명세서에 ‘노동 대가 별도 협의’라는 칸을 추가했다. 사람을 모집하는 데는 거창한 명예보다 사소한 현실이 중요했다.
출발하기 전 노아가 현관에서 재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기차가 못 멈추면 어떻게 해요?”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신님은 하늘로 날아갈 수 있잖아요.”
“내가 날아가서 열차가 멈추는 건 아니잖아.”
노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종이배에 바퀴 네 개를 그려 넣었다. “그럼 멈출 데가 없으면 만들어 주세요.”
재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린아이의 말은 기술 설명서보다 간단했지만, 어쩌면 이번 사건에 가장 필요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는 종이배를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주머니에 넣었다.
카르도는 철비항에서 구조 화물차를 두 대 구해 왔다. 사람을 억지로 태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꾸린 자원 수송대였다. 가시골 사람들은 담요와 물통, 이동식 신호등을 실었다. 릴리는 의료 도구를 확인했고 세리아는 공동 경유실 기록 관리자로서 열람 허가서를 마련했다. 에반은 자신의 이름이 붙지 않은 안내 전단을 열두 장 인쇄했다.
“제 이름이 없는 홍보물은 심장이 아픈데요.”
“악마도 심장이 있습니까?” 재하가 물었다.
“계약서에 따라 있습니다.”
녹슨 플랫폼은 북쪽으로 두 시간 떨어진 황무지에 있었다. 역사라고 부르기 어려울 만큼 작았다. 무너진 지붕 두 개, 반쯤 땅속으로 잠긴 시계탑, 어느 쪽으로도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철길. 마른 풀 사이로 검은 반짝임이 흘렀다. 재하가 레일에 손을 대려는 순간 손끝이 푸른빛에 밀려났다.
[신격 접근 제한.]
[사유: 오래된 수송계약에 따라 수취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자.]
“수취인이 돼서는 안 된다니. 탑승 금지도 아니고.”
“누군가 신이 임의로 우편물을 받아 가지 못하게 막았다는 뜻일 수 있죠.” 세리아가 답했다.
역무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에는 한 남자가 창문에 이마를 대고 선로를 보고 있었다. 굵은 손가락과 눈썹 끝의 흰 흉터가 눈에 띄었다. 그는 재하 일행을 보더니 의자를 하나 밀었다.
“늦지 않게 왔군. 내가 하율이오. 임시 역무 담당.”
“임시로 얼마나 하셨는데요?”
“스물여섯 해.”
“그 정도면 정규직으로 전환해 줘야 하지 않나요?”
하율은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이 오래가진 않았다. 그는 낡은 장부를 펼쳤다. 매 페이지 끝에 같은 표기가 있었다. ‘발송 완료, 도착 증빙 없음.’
“열차가 싣고 다니는 건 종이만이 아니오. 요청이 제자리에서 무효 처리되지 않았다는 증거도 함께 실었지. 역들이 없어지고 수신자가 바뀌면서 선로는 계속 돌아가는데, 배달은 멈췄소.”
“그럼 우선 원본 목록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일부만. 편지를 보낸 사람의 동의 없이 이름을 줄 순 없으니까.”
하율이 꺼낸 것은 번호만 적힌 얇은 종이였다. 001부터 040216까지 이어지는 목록 사이에 붉은 점이 찍힌 구간이 있었다. 재하는 그 점들이 무엇인지 물었다.
“현재도 위험 신호가 살아 있는 항목이오. 옛날 요청이라도 현재의 위험과 연결돼 있을 수 있지.”
“몇 건인데요?”
“열세 건. 이곳에서 확인 가능한 것만.”
릴리는 즉시 의료 가방을 열었다. “위치를 확인할 수 있나요?”
“정차해야만 일부가 드러납니다.”
정오를 기다리는 동안 역에서는 예상 밖의 소동이 벌어졌다. 하율이 쓰던 낡은 종이 고장 나 버린 것이다. 종을 쳐야 열차에 정차 의사를 알릴 수 있는데, 손잡이가 빠져 버렸다. 재하는 신성으로 손잡이를 다시 붙이려고 했지만 하율이 만류했다.
“이 신호는 누가 울렸는지 기록하는 장치요. 신격으로 붙이면 수신권이 같이 생길 수 있소.”
“그럼 고치는 건 어떻게 합니까?”
“옆 창고에 같은 규격의 부품이 있을 거요. 찾아봐야지.”
카르도가 군용 도구함을 열자 모과가 챙겨 준 작은 못 봉지가 나왔다. 재하는 자신이 아침에 못을 챙긴 이유를 뒤늦게 이해했다. 다만 못은 너무 짧았다. 하율이 웃었다.
“이건 못이 아니라 핀이 필요하네. 그래도 와 줘서 고맙소.”
그들은 세 사람이 함께 보관함을 뒤져 적당한 금속 핀을 찾았다. 하율이 직접 손잡이를 고정하고, 릴리는 멀리 떨어져 종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했다. 그 작업을 하는 사이 황무지 너머에서 작은 빛이 반짝였다. 한때 이 역에 물건을 보내던 상인들이 쓰던 반사경이었다.
“아직도 여기 오가는 사람이 있군요.” 재하가 말했다.
“가끔 있지. 나한텐 역의 주인이 누구냐보다, 지나가는 사람이 길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오.”
그 말에 재하는 손끝을 내려다봤다. 엄청난 기적을 쓰지 않았는데도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이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다. 종 하나를 고치는 데도 손이 여럿 필요했다. 어쩌면 검은 열차 역시 그렇게 해야 멈출 수 있을 것이다.
기차가 도착한 것은 해가 머리 위에 올랐을 때였다. 먼저 바람이 멎었다. 그다음 황무지의 모든 그림자가 한쪽으로 길어졌다. 굽이진 철길 끝에서 검은 기관차가 고개를 내밀었다. 창문에는 사람의 얼굴 대신 희미한 주소와 지워진 글자들이 비쳤다. 객차 열두 량은 모두 잠겨 있었다. 맨 뒤 차량에만 둥근 유리창이 하나 붙어 있었다.
하율이 출발 신호를 높이자 열차는 멈췄다. 정확히는 정거장 앞을 지나가는 속도를 포기했다. 선로 위에서 바퀴가 돌고 있는데도 이동하지 않았다. 세리아의 시계가 한 번 거꾸로 움직였다.
“시간을 빌려 정차하는 기관차야.” 하율이 말했다. “오래 못 버텨요.”
재하가 플랫폼 경계선을 넘으려 하자 검은 빛이 무릎 앞에 섰다. 그는 억지로 힘을 쓰지 않았다.
“하율 씨, 신격만 막히는 거 맞죠?”
“옛 계약상 우편물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존재를 막소. 신이라고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등록 화면은 구별을 못 하더군.”
“또 낡은 분류기네.” 에반이 중얼거렸다.
릴리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정거장 바닥의 하얀 띠 앞에서 멈추더니 하율에게 물었다.
“우편물을 받으러 들어가는 게 아니라, 안에 위험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제 이름으로 출입 신청할 수 있나요?”
하율은 그녀에게 낡은 동판 하나를 건넸다. ‘현장 확인자. 수신권 없음. 언제든 철회 가능.’ 릴리는 읽고 서명했다. 재하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입술을 깨물었다. 릴리의 결정을 신이 대신할 이유는 없었다.
에반도 뒤를 따르려다 동판을 받고 얼굴을 찌푸렸다.
“악마는 왜 분류가 ‘기타 불명’입니까?”
“행정에 의견이 있으면 별도 창구로.” 하율이 답했다.
“신도 악마도 관료를 못 이기는군요.”
객차의 첫 문이 열렸다. 찬 공기와 함께 우편봉투 한 장이 날아왔다. 봉투에는 주소 대신 짤막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붉은 다리 밑에 여섯 사람이 있다. 물이 차오르기 전에 알려 달라.’
릴리가 봉투를 집어 드는 순간 검은 글씨 아래 작은 시각이 나타났다.
[발송 시각: 3년 전]
[마지막 위험 갱신: 17분 전]
이미 지나간 요청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는 그 사고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재하는 플랫폼 바깥에서 외쳤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부터 알아봅시다. 그리고 누구에게 알릴지, 그 지역 사람들에게 물어보고요!”
하율이 낡은 시계를 보았다. 정차에 남은 시간은 여덟 분. 열차 속 열세 개 붉은 점 가운데 하나가 더 밝아졌다.
그때 두 번째 봉투가 문틈에서 떨어졌다. 첫 번째보다 훨씬 작았다.
‘신에게는 보내지 마세요.’
릴리의 손이 멈췄다. 재하도 그 문장을 읽었다. 자신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비로소 조금 이해되었다. 누군가 이 편지들을 신에게서 숨겨 두었던 것이다. 신앙으로 바꾸지 않고, 구조 요청으로 남겨 두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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