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 보관함에 들어간 귀가 통행증은 다음 날 아침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종이는 그대로 있었다. 글씨만 없어졌다. 윤재하의 이름과 귀가 조건, 발급 기관의 번호가 모두 백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종이가 도망쳤군요.” 에반이 말했다.
“농담할 일이 아닙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무서우니까 농담하는 겁니다.”
보관함의 잠금은 훼손되지 않았고, 접근 기록에도 이상이 없었다. 누군가 훔쳐 간 것이 아니라 발급 원본의 내용이 바뀌면 사본도 자동으로 바뀌도록 만들어진 문서였다. 리안은 오래된 장치를 살펴본 뒤 설명했다. 이 종이는 보관해야 할 증거로 적합하지 않았다. 발급자에게 계속 연결된 화면과 같은 물건이기 때문이다.
“변경 전 내용을 확보했나요?” 재하가 물었다.
“네. 어제 수기로 옮긴 기록과 별도 인증값이 있습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내용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새로운 증거입니다.”
재하는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종이까지 알아서 계약을 수정한다니. 한국에서 버그를 고치던 시절에도 이런 프로그램은 출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귀가 통행증의 발급 경로는 외부 관찰 보조국에 있었다. 그곳은 공동 경유실에서 멀지 않았지만 일반 방문객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건물이었다. 창에는 두꺼운 회색 유리가 끼워져 있었고, 입구에는 ‘후보자 보호를 위한 접근 제한’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작게 ‘모든 후보자의 보호 여부는 부서가 결정한다’는 문장이 있었다.
“보호를 받는 사람에게 자기 보호 방식을 정할 권리는 없나요?” 릴리가 물었다.
세리아는 조사 허가증을 내밀었다. 조사 범위는 윤재하에게 발급된 통행증과 제삼자 자료 접근 시도에 한정되었다. 담당자는 오랫동안 서류를 살폈지만 결국 그들을 들여보냈다.
안쪽 사무실은 예상보다 평범했다. 서류 더미와 먹다 남은 식사, 눈이 충혈된 직원들. 아무도 천둥을 치거나 검을 들고 서 있지 않았다. 재하는 그 사실에 잠시 당황했다. 몇 달 동안 자신을 억울하게 만든 시스템의 배후라면 무시무시한 신이 나타날 거라 상상했기 때문이다.
담당 국장 브렌은 매우 피곤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재하가 들어오자 앞에 놓인 문서를 접었다.
“조사 대상은 통행증 한 장입니다. 기관 운영 전체로 확대하진 말아 주십시오.”
“저희도 허가된 범위만 확인할 겁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재하는 브렌을 똑바로 바라봤다. “왜 지구로 가는 통행증을 받으려면 신격 수탁을 확정해야 하죠?”
브렌은 잠시 망설였다. “후보자가 중도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안전 절차입니다.”
“누구의 안전인가요?”
“다른 세계의 안정적인 신격 공급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 고향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붙잡아서 신격 공급을 유지하겠다는 거네요.”
브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하는 그 침묵을 승낙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규정 원문을 요청했다. 허가 범위 안에서 열람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규정의 본래 문장은 이랬다. ‘신격 후보가 원할 때 자신의 원래 세계에 관한 공인 자료를 독립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접근은 승계 수락 여부와 연동하지 않는다.’ 아래에는 후대에 덧붙인 ‘계약 유지 기간 보장’ 조항이 있었다. 신격 수락이 확인되기 전까지 귀환 자료를 보류하라는 내용이었다.
“왜 원래 규칙을 바꿨습니까?” 재하가 물었다.
브렌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저는 이 부서를 맡은 지 얼마 안 됐습니다. 그 규칙은 오래전부터 있었어요.”
“직접 만든 책임을 묻는 게 아닙니다. 지금 그걸 계속 적용할 건지 묻고 있어요.”
브렌은 창밖을 바라봤다. 직원 몇 명이 서류를 옮기고 있었다. 각자의 업무를 수행할 뿐, 자신이 무엇을 막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는 여전히 망설였지만, 결국 문서를 하나 꺼내 놓았다. ‘후보 자료 독립 열람에 관한 옛 예외 조항’. 부서 내부에선 거의 쓰지 않는 규정이라고 했다.
“이걸 쓰면 원본 자료를 볼 수 있습니까?” 릴리가 물었다.
“가능합니다. 다만 가공하지 않은 자료는 다른 사람의 정보가 섞여 있어 직접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럼 개인정보를 가리는 검증 절차를 거치면 되죠.” 세리아가 말했다.
브렌은 길게 숨을 쉬었다. “절차를 밟으면 시간이 걸립니다.”
“시간이 걸리는 것과 못 한다는 건 다르니까요.” 재하가 답했다.
그들이 부서를 나올 때 한 직원이 조용히 우아를 불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업무 화면의 설계상 결함을 신고하고 싶다고 했다. 우아는 즉시 독립 제보 창구를 안내했다. 그 사람의 진술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어느 누구도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보조국의 내부 점검 과정에서 리안은 사라지는 통행증의 형식을 더 자세히 확인했다. 발급자만 원본을 바꿀 수 있다면 이용자는 어느 시점에 무엇을 받아들였는지 입증하기 어려웠다. 그는 시험용 빈 문서에 ‘통행료 없음’이라고 적고, 원본을 ‘통행료 있음’으로 바꾸어 봤다. 몇 초 뒤 사본의 글씨도 함께 변했다. 문서의 겉모양은 그대로인데 내용만 달라졌다.
“이런 종이는 영수증으로 쓰면 안 되겠네요.” 모과가 통신관 너머에서 말했다. 그녀는 마을 창고 장부가 저절로 바뀐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났다.
“맞아요. 그래서 변경 전후 내용을 비교할 수 있는 독립 기록이 필요합니다.” 리안이 답했다.
그들은 같은 내용을 종이와 금속판, 보관 기록에 따로 남겼다. 종이 한 장은 브렌의 사무실에, 다른 하나는 독립 감찰실에 보관했다. 보관 장소가 나뉘었다고 완전히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 하나의 원본을 바꿔 모든 사람이 같은 잘못을 믿게 되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브렌은 처음엔 그런 절차가 조직의 업무를 방해한다며 불평했다. 그러나 외부망 기록이 잘못 바뀌면 자기 부서도 책임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지적을 듣고 태도가 달라졌다. 그는 직원들에게 기존 통행증의 변경 이력을 새 방식으로 남기라고 지시했다. 재하는 브렌이 갑자기 선한 인물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안전을 함께 생각하게 된 것뿐이었다. 그 역시 제도의 일부로 작동할 수 있었다.
점검을 마친 뒤 재하는 브렌에게 질문했다. “이 통행증을 받아 실제로 고향에 돌아간 사람이 있습니까?”
브렌은 난처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관측을 통해 고향의 장면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귀환한 사례가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 그렇게 안내해 주세요. 가능성까지 부정하자는 게 아니라 실제로 확인된 것만 말하자는 겁니다.”
브렌은 지시서를 적었다. 광고 문구는 바꾸고, 기존 이용자에게는 제공 서비스의 성격을 다시 안내할 계획이었다. 그 작업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 것이다. 재하는 비용 때문에 진실을 미루는 것보다 지금 바로 정정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릴리는 재하에게 물었다. “지구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하면 정말 돌아가실 거예요?”
재하는 발을 멈췄다. 이 질문은 천계의 행정관이 묻던 질문과 달랐다. 정답을 제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건네는 말이었다.
“모르겠어요.” 그가 솔직히 대답했다. “가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고, 거기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잖아요. 지금은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릴리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지금은 모른다고 하세요. 제가 노아에게도 그렇게 가르쳐 줘야겠네요.”
“왜요?”
“어른들은 자꾸 뭐든 바로 답하라고 하니까요. 모르는 상태에서도 기다려 주는 법을 아이들이 배우면 좋겠어요.”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는 첫 신도라는 이유로 자신의 선택을 대신 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 점이 고마웠다. 그는 언젠가 지구로 돌아갈 길이 확인된다면 가장 먼저 사실을 따져 보고, 그다음 필요한 사람들과 이야기할 것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선택을 미리 영원한 계약으로 써 둘 필요는 없었다.
가시골에 가까워지자 작은 시장의 냄새가 났다. 갓 구운 빵과 젖은 흙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재하는 지구의 밤거리를 떠올렸다. 그곳에도 비가 온 뒤 빵집에서 풍기는 따뜻한 냄새가 있었고, 늦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그리움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동시에 지금 자신이 돌아가는 곳에서도 누군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한 사람의 삶에는 하나의 장소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재하는 돌아오는 길에 철비항의 니라에게서 짧은 소식을 받았다. 강제 배치된 구조대원들의 근무 기록을 정정했지만, 아직 밀린 보상을 모두 돌려주진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별도의 격려 문구보다 필요한 다음 절차를 물었다. 니라는 장비 보험을 실제 출동 기록과 연결해서 다시 계산해야 한다고 했다. 재하는 전문가를 지정하는 일은 현장 기관의 권한이라는 점을 확인한 뒤, 관련 자료가 공동 경유실에서 안전하게 전달되도록 지원하겠다고 답했다. 두 사람 모두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통신을 마쳤다.
철비항에서 돌아온 회신에는 다음 점검 날짜가 적혀 있었다. 누구의 명령도 아닌 현장 책임자들이 정한 일정이었다. 재하는 그 날짜를 자신의 달력에 참고로 표시하되, 점검을 대신 승인하지 않았다. 현장의 일은 그곳 사람들의 것이었다. 며칠 뒤 니라는 구조대가 실제로 출동할 때 사용할 새 호출 규칙을 시험하겠다고 알렸다. 이름을 내지 않고도 안전하게 도움을 요청할 방법이 있는지 확인하는 훈련이었다. 재하는 그동안 귀환 통행증 문제를 처리하며 배운 확인 절차를 정리해 보내 주었다. 별도의 답을 강요하지 않고 참고만 하라는 내용이었다.
가시골 쉼터로 돌아가자 노아가 종이배를 접고 있었다. 그는 배에 ‘귀가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님은 원래 어디서 오셨어요?”
“아주 멀리 있는 곳.”
“바다가 있어요?”
“있지.”
“그럼 이 배로 갈 수 있어요?”
“이걸론 힘들걸.”
노아는 배를 손바닥에 올려 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어디로 갈지는 제가 정할 수 있어요.”
재하는 그 말에 웃었다. 동네 아이가 복잡한 천계 법전보다 간단하게 자신의 마음을 설명해 준 듯했다. 그는 노아에게 종이배를 물에 띄우기 전에 바닥이 젖지 않게 접는 법부터 물었다. 둘이 한참 씨름하는 동안 모과는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저녁 무렵 재하에게 개인 자료 독립 열람의 첫 승인 통보가 도착했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지구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한 기기의 익명화된 기록이었다. 통신 내용은 일부 가려져 있었지만, 전송 시각과 기기 소유 여부는 확인할 수 있었다.
[18:42 긴급 요청 회신 생성]
[기기 소유자: 윤재하가 아님]
[기기 사용자 확인: 불가]
[응답 내용의 개인 서명 귀속: 오류 가능성 높음]
재하는 그 결과를 오래 바라봤다. 누군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요청에 반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격 수락이라는 계약이 만들어진 근거는 자기 기기에 입력한 서명이 아니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강제 승계 절차를 재검토할 이유가 충분했다.
한편 관측 기록의 다른 부분에는 ‘당사자에게 도착하지 않은 답장’이 있었다. 그 답장은 재하에게 온 것이 아니라 구조를 요청한 현장의 다른 사람에게 보내진 안전 기관의 통보였다. ‘대응 인력이 출동 중입니다’라는 짧은 문구였다. 그 문구는 여섯 분 동안 보류 장치에 걸려 있었다.
재하는 차마 화를 참지 못했다. 처음으로 주먹이 떨렸다. 누군가를 도와주려는 그의 대답은 곧장 신격 모집 자료가 되었는데, 정작 현장에 필요했던 구조 안내는 늦게 도착했다. 시스템은 누가 신이 될 수 있는지보다 누가 살아남아야 하는지 먼저 살폈어야 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릴리가 물었다.
재하는 종이배를 집어 들었다. 노아가 그린 작은 화살표가 배 앞머리에 있었다. 목적지를 표시하는 화살표였다.
“먼저 그날의 구조 안내가 왜 지연됐는지 공개 가능한 범위에서 바로잡겠습니다. 그리고 제 신격은 제가 결정할 수 있다는 걸 확인받겠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다만 누구의 이름을 빌려서도 그 결정을 받고 싶진 않습니다.”
그날 밤 새로 발급된 통행증은 달랐다.
[지구 자료 독립 열람 승인]
[신격 수락 여부: 미연동]
[물리 귀환 허가: 발급되지 않음]
재하는 기뻤지만 과장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얻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삶에 관한 자료를 보기 위해 강제 서명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 작은 차이가 다음 선택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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