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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145화
PAYLUA ORIGINAL · 제145화

145화. 인간 윤재하의 서명

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029자

오프라인 책장
“윤재하 님의 서명이 확인됐습니다.” 공동 경유실의 신격 등록 담당자가 자신 있게 말했다. 윤재하는 종이를 받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서명란에는 분명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옆에 적힌 문장이 문제였다. ‘긴급 구조 요청에 응답한 사람은 필요에 따라 장래의 모든 요청을 수탁한다.’ “제가 왜 이런 걸 쓰겠어요?” “기록상 승인된 문서입니다.” “종이가 있다는 것과 제가 썼다는 건 다르죠.” 담당자는 난감한 얼굴이었다. 재하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이 창구를 만든 이도, 최초의 응답 문장을 비틀어 사용한 이도 눈앞의 직원은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도 없었다. 세리아가 독립 감정 보고서를 요청했다. 전날 도착한 개인 열람 제한 정정의 결과였다. 이제 재하는 신격 수락에 새로 서명하지 않고도 과거 자신에게 붙은 서명 인증의 생성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원본 내용은 필요 범위만 제공되고 다른 후보의 정보는 가려졌다. “원본 필체는 없군요.” 세리아가 말했다. “지구에서 쓰던 전자 서명 방식입니다.” 리안이 설명했다. “사람이 실제로 이름을 손으로 쓴 것이 아니라, 기계가 특정 행동을 서명으로 변환했어요.” “그 행동이 뭔데요?” 리안이 항목 하나를 확대했다. [행동: 현장 구조 요청에 대한 메시지 전송] [원문: ‘확인하겠습니다. 사람부터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주세요.’] [변환된 승인 범위: 추가 요청 영구 수탁] 재하는 가슴이 철렁했다. 저 문장은 자신의 말투와 닮아 있었다. 누군가 위험하다고 연락하면 흔히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그 문장을 입력했는지조차 아직 모른다. 어쩌면 당황한 사람에게 보낸 문자였을 수도, 누군가 대신 적은 문장이었을 수도 있었다. “단지 비슷한 말투라는 이유로 제가 보냈다고 확정할 순 없어요.” 담당자는 머리를 긁었다. “그건 그렇습니다. 다만 시스템이 본인 응답으로 분류했습니다.” “그 시스템을 누가 검증했는지부터 묻는 중입니다.” 세리아가 대답했다. 감정실은 서명 생성 과정을 단계별로 재현할 수 있었다. 입력은 타인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통보였다. 프로그램은 그에 대한 긍정적 반응을 ‘협조 의사’로 번역했고, 협조 의사를 신격 후보 선정에 사용할 수 있게 변환했다. 마지막에는 ‘무한 기한 동의’라는 표제가 붙었다. 중간 단계 어디에도 확인할 대상에게 계약 내용을 다시 보여 주는 화면은 없었다. 에반은 조용히 자신의 공책을 펼쳤다. 한때 자신이 만들던 자동 광고 계약도 비슷하게 생겼다. 작은 체크박스 하나에 여러 항목을 묶었다. ‘소식 받기’에 동의하면 신제품 광고, 제휴사 판매, 장기 연락까지 자동으로 허락한 것으로 처리했다. 그는 그 방식이 편리하고 수익성이 높다고 믿었다. “이건 그런 수준도 아니네요.” 에반이 말했다. “동의 화면조차 없어요. 행동을 보고 동의한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카르도가 주먹을 쥐었다. “그럼 이런 서명은 무효가 아닌가?” “법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자발적 선택과 강제 수탁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자료는 이미 확보했어요.” 재하는 계약의 다음 장을 읽었다. 자신이 신이 된 뒤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일의 책임을 ‘후보가 인수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아래 자그마한 문장이 숨겨져 있었다. ‘수탁 당시 인격 지속 여부와 무관하게 효력 유지.’ “제가 죽으면 더 편한 계약이군요.” 재하가 말했다. 릴리가 표정을 굳혔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죄송해요. 농담이 너무 셌네요.” 그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천계의 계약은 신이 되기 전의 인간을 보호하려 만든 것이 아니었다. 기계를 운용하는 기관이 누군가의 선의를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구조였다. 자신이 사고를 당한 원인이 이것 때문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고가 난 뒤 자신의 말을 빌려 신격을 강제 승계했다는 정황만은 무거웠다. 감정 절차 중간에는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낯선 시범 장치 앞에 모였다. 원본 시스템이 어떤 판단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세리아는 시험용 문장 셋을 제시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알려 주세요.’ ‘지금 여기로 가겠습니다.’ ‘더 자세히 확인하겠습니다.’ 어느 문장도 평생 누군가를 위해 일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치는 세 문장 모두에 같은 답을 내놓았다. [자발적 협조 확정] [장기 수탁 적합] “이게 왜 다 같은 결과죠?” 릴리가 물었다. 기술 담당자는 설정 화면을 열었다. 원래 문장은 각기 다른 범위를 갖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라는 말은 문을 열어 두는 의사이고, 지금 가겠다는 말은 한 번의 행동을 하겠다는 약속이다. 확인하겠다는 말은 정보가 더 필요하다는 뜻에 가깝다. 그러나 추천 알고리즘은 이 세 문장을 모두 ‘부정적이지 않은 답변’이라는 하나의 분류로 뭉뚱그렸다. 그 분류는 다시 ‘일반적 협조’로, 일반적 협조는 ‘향후 요청 수탁’으로 넘어갔다. 에반은 그 과정을 보며 표정이 굳었다. “제가 예전에 만든 광고 분류도 비슷했습니다. 불만을 내지 않은 사람은 상품에 만족한 것으로 표시됐고, 만족한 사람에겐 추가 상품을 추천했죠.” “불만을 내지 않았다고 좋아하는 건 아닌데요.” 노엘이 말했다. 회수인으로 일하던 그는 이번엔 증인석에 앉아 있었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에반이 답했다. “알면서도 지표가 잘 나오니까 그냥 뒀죠.” 재하는 에반에게 더 물어보지 않았다. 과거의 잘못을 털어놓는 일이 실제 피해를 회복시키는 일을 대신할 순 없었다. 에반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어떤 추천 규칙이 사람의 말을 바꾸는지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었다. 시험용 기계에서 다음 항목을 살펴보던 중 세리아는 가장 위험한 기능을 발견했다. 후보가 동의를 보류하면 프로그램은 며칠 뒤 다시 그 후보의 과거 행동을 검색했다. 따뜻한 말 한 번, 손을 내민 기억 한 번만 있어도 보류 상태를 승인 상태로 바꿀 수 있었다. 이 기능은 사람이 정말 원하는지 묻지 않고 기계가 원하는 답을 대신 찾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보류는 보류여야 해요.” 릴리가 말했다. 세리아는 그 말을 감정 기록에 적었다. 법전 문장보다 짧은 그 원칙이 지금까지 수많은 계약에서 무시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감정실 밖에서는 신격 승계에 찬성하는 신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재하를 붙잡고 물었다. “그대가 거절하면 가시골의 신앙 공급은 누가 책임지는가? 신도가 신을 선택할 수 있다면 신도에게 무엇을 약속받겠는가?” 재하는 대답하기 전에 상대의 말을 다시 생각했다. 걱정에는 실제 이유도 있었다. 어떤 작은 마을은 신의 기적 없이 겨울을 나기 어렵고, 갑자기 신격이 사라지면 필수 공급이 멈출 수 있다. 그런데 그 불안을 이유로 다른 사람의 동의를 빼앗는다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위험을 뒤로 미룬 셈이었다. “계약 없이도 공급을 유지할 방법을 먼저 만드는 게 맞겠죠. 신이 정말 필요하다면 누군가 자발적으로 맡을 수 있게요.” “그렇다면 아무도 맡지 않겠다고 하면?” “그 이유부터 들어야겠죠. 일을 맡는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잡는 시스템이라면 아무도 맡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신은 입을 다물었다. 쉽고 시원한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하는 이제 쉬운 답이 늘 옳지는 않다는 걸 알았다. 그날 저녁 감정실 담당자가 작은 사과문을 가지고 왔다. 자동 분류 기록이 실제 서명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문제를 확인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최종 책임 판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재하는 사과문을 공개해 다른 후보를 보호할 근거로 사용해 달라고 요청했고, 대신 개인 식별 정보는 삭제해 달라고 했다. 자신이 영웅처럼 이름을 남기기보다 같은 피해를 겪는 사람이 다시 나오지 않도록 하는 데 쓰고 싶었다. 릴리는 귀가하기 전에 감정실의 문을 오래 바라봤다. 처음엔 신의 판단을 받는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기계의 판단도 검증받아야 하는 곳이었다. 재하가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처음 저를 믿었을 땐 이런 서류가 하나도 없었죠.” “네. 그런데도 제 마음이 어땠는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맞아요. 그걸 누가 대신 쓴 종이로 바꿀 순 없죠.” 담당자는 시험 결과를 출력하며 “정상 작동”이라는 도장을 찍으려 했다. 재하가 이를 막았다. 기계가 설계대로 움직였다고 해서 그 설계가 옳다는 뜻은 아니었다. 세리아는 도장을 ‘기능 재현 확인’으로 바꾸었다. 작은 문구 정정이었지만 감정서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리안은 다시 시험할 수 있도록 입력 문장과 결과를 모두 보관했다. 에반은 낡은 용어 하나가 기관의 책임을 얼마나 쉽게 가릴 수 있는지 보며 고개를 숙였다. 감정 결과를 받은 직원은 종이를 한 장 더 가져왔다. 그 위에는 후보자에게 설명한 계약 내용이 적혀 있어야 했지만 칸이 비어 있었다. 그는 그 빈칸을 조용히 표시했다. 없던 설명을 있었다고 고치지는 않았다. 감정이 끝나자 담당자는 의외의 질문을 했다. “그럼 윤재하 님은 신격 자체를 거절하십니까?” 재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엔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다. 0명의 신도와 폐허 신전을 떠넘겨 받은 날 얼마나 억울했는지 잊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가시골에는 노아와 모과와 도르가 있었다. 릴리와 에반과 카르도가 자신을 기다린다.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강제로 시작됐다고 해서 지금의 선택까지 누군가의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 질문에 지금 답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다만 정정 절차를 계속하려면—” “그럼 지금은 답하지 않겠습니다. 강제로 승계한 계약을 바로잡는 것과 제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는 따로 판단하고 싶습니다.” 세리아가 문서의 여백에 그 대답을 적었다. 미결정은 승인도 거절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천계가 가장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후에는 가시골에서 온 편지가 도착했다. 우물 수리를 마쳤고, 주민회의가 도르의 옛 기록을 별도 보관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도르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서류보다 겨울 준비가 급하다며 구호 창고에 일하러 갔다. 모과는 현관문 수리 비용을 계산했고, 노아는 수리한 문이 전보다 부드럽게 열리는 걸 계속 시험했다. 재하는 그 일상 보고를 읽다가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신의 신격이 행정상 잘못 배정됐더라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행동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날 늦게 에반이 물었다. “다른 신들이 이 일로 신격 승계 전체가 흔들린다고 겁내는 거 아십니까?” “그럴 수 있죠.” “자발적 응답을 영구 계약으로 바꾸는 방식이 널리 쓰였다면, 앞으로 누구든 자기 서명을 다시 살펴보려고 할 겁니다.” “그게 문제예요?” “천계 입장에서는 재앙입니다. 서명 없는 권력은 쉽게 흔들리니까요.” “그럼 흔들려야겠네요.” 에반은 잠시 웃었다. “예전의 저라면 그 말을 듣고 반대편에 광고를 팔았을 겁니다.” “지금은요?” “아직 어떻게 해야 돈을 벌지 고민 중입니다. 다만 남의 거절을 지우는 돈은 벌고 싶지 않아요.”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구원받은 악마보다 스스로 불편한 장부를 들고 있는 악마가 훨씬 믿음직했다. 그때 수정판의 끝에 새로운 안내가 나타났다. 미확인 서명 생성 경로를 조사하던 감정실이 지구의 원본 기록과 연결되는 짧은 문구를 발견했다. [원문 작성 기기: 본인 소유로 등록되지 않음] [전송 버튼 조작자: 미확인] 재하의 눈이 커졌다. 서명으로 바뀐 바로 그 문장은 자신이 보낸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면 신격 선정 담당자는 무엇을 근거로 그를 선택한 걸까? 모호한 협조 문장조차 그의 것이 아니라면, 그 시스템은 타인의 선의를 묶기 위해 이름표를 아무에게나 달 수 있었다. “다음은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해야겠네요.” 릴리가 말했다. 재하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하다면 그 사람이 스스로 알려 줄 때까지 기다리죠. 먼저 해야 할 일은 제 이름이 왜 붙었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그는 절차상 자신의 이름과 기기 소유 기록이 맞지 않는다는 이의 신청을 제출했다. 세리아는 마침내 실무자들에게 요청했다. 해당 원본이 누구의 것인지 밝히지 않고도, 잘못 귀속된 서명을 정정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 달라고. 그 요청이 받아들여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의 신격 서명은 더 이상 ‘본인이 직접 수락했다’는 간단한 문장으로 설명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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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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