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세계 공동 경유실은 하늘 위에도 땅 아래에도 있지 않았다. 세리아가 보여 준 지도에는 네 개의 세계가 둥근 종이 가장자리에 붙어 있었고, 가운데에 작은 문 하나가 있었다. 종이를 뒤집으면 문도 함께 뒤집혔다. 에반은 이것이 경유실의 위대한 중립성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 모두에게 공정하다는 뜻이죠.”
“그럼 길을 왜 못 찾는데?” 재하가 물었다.
“공정하게 모두가 못 찾는 겁니다.”
릴리는 그를 한 번 노려봤다. 에반은 입술을 다물었다. 신전에서 가장 먼저 배운 금언은 필요 없는 농담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금언을 지킨 적은 별로 없었다.
일행은 가시골의 오래된 역터에 도착했다. 철로는 오래전에 걷혀 있었고, 자갈 사이에서는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한쪽에는 공사가 중단된 승강장과 사다리 없는 시계탑이 서 있었다. 노엘이 황동 시계를 승강장 바닥의 작은 홈에 내려놓았다. 세 바늘이 잠깐 같은 방향을 가리키자 공기가 접히듯 흔들렸다. 그 안에서 표지판 하나가 나타났다.
[복수 세계 공동 경유실: 운용 시험 방문자 입구]
[행선지 지정 전 이동 불가]
[경유실은 생명 구조를 보증하지 않음]
재하가 세 번째 문장을 읽었다. “들어가기 전에 손님에게 겁주는 서비스인가요?”
“그곳은 운송시설이지 구조대가 아닙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경계부터 분명히 하는 쪽이 낫습니다. 문제는 이용자가 동의하지 않은 화물을 싣기 시작할 때죠.”
문을 통과하니 네 갈래 복도가 나왔다. 하나는 마른 눈가루 냄새가 났고, 하나는 녹슨 기름 냄새가 났다. 세 번째에서는 짠 바람이 불었고 마지막 복도에는 아무 냄새도 없었다. 복도의 끝은 모두 같은 넓은 접수대로 이어졌다. 커다란 시계 네 개가 천장에 매달려 각기 다른 시간을 알렸다. 탁자 위의 진동판은 손님이 들어설 때마다 번호를 울렸다.
“신격 번호를 제출하십시오.” 창구 안쪽의 사람이 말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밤색이었고 손에는 잉크 얼룩이 묻어 있었다. 명패에는 ‘임시 기록 관리자 우아’라고 적혀 있었다. 우아는 재하의 얼굴보다 먼저 동행자의 수를 세었다. 일행 여섯 명 가운데 공식 신격은 재하와 카르도뿐이지만, 릴리와 세리아와 노엘과 에반이 모두 자기 이름으로 서명할 권리를 가진 방문자라고 하자 그녀의 표정이 달라졌다.
“동행인을 소유물로 등록하지 않겠다고요?”
“동행인들이 제 물건도 아닌데 왜요?” 재하가 되물었다.
우아는 오히려 그 질문에 놀란 것 같았다. “여기서는 보호 명목으로 대리 서명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그러면 같은 방문증으로 묶이죠.”
릴리가 접수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 방식은 누가 원하면 나갈 수 있나요?”
“대표자가 허락하면요.”
“그럼 보호가 아니네요.”
우아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르다 개인 출입증 여섯 장을 꺼냈다. 출입증에는 각각 다른 귀환 경로가 적혀 있었다. 재하는 자기 이름 아래에 또 다른 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도 대표 서명란.’ 그는 그 칸에 사선을 그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이름으로 왔습니다.”
“공란으로 두면 접수가 지연됩니다.”
“그럼 지연 사유를 써 주세요. 타인의 선택을 대신할 권한이 제게 없다고.”
우아는 잠시 재하를 보았다. 그러고는 도장을 찍었다. 사소한 소리였는데 이상하게도 여섯 명 모두 숨을 고르게 쉬었다.
접수대의 한쪽에는 방문자들이 길을 잃었을 때 적는 신고서가 쌓여 있었다. 재하는 그 중 ‘귀환로 확인 실패’라는 항목이 유난히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아는 퇴근한 뒤 집에 돌아가는 것조차 한 번씩 허가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재하는 통로의 방향을 못 찾는 것과 돌아갈 권리를 허락받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했다. 우아는 그 말을 듣고 신고서를 분리해 보관하기 시작했다.
신격 번호가 없는 손님용 의자에는 줄이 그어져 있었다. '임시 대기 대상'이라는 표시였다. 재하는 바닥을 닦던 작업자가 그 의자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잠깐 쉬셔도 되지 않나요?” 재하가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제 이름은 손님 명부에 없거든요.” 우아는 시설 규정을 뒤져 보더니 그 의자가 사실 모든 이용자에게 개방된 공간이라는 조항을 찾아냈다. 어느 날 안내표 하나가 잘못 붙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표지를 떼어 내자 작업자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천계에서 큰 기적을 보아 온 카르도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물을 건넸다. 누군가의 위치를 회복하는 데에는 거창한 판결이 필요 없는 경우도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는 누군가 무거운 수레를 끌고 지나갔다. 수레의 바퀴는 낡았지만 운송 직원은 통행 규정을 꼼꼼히 지켰다. 길을 잘못 들면 자신의 근무 시간이 다른 세계의 책임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재하는 웃을 수 없었다.
그때 복도 안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눈 냄새가 나는 길의 운송대 위에 낡은 모직 외투가 실려 왔다. 외투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외투의 목 부분에는 푸른 표식이 붙어 있었다.
[도요 고원: 겨울등 관리 의무자 신규 지정 완료]
“사람이 없는데 의무가 완료됐다고요?” 카르도가 물었다.
“대상이 오기 전에 역할을 예약하는 방식입니다.” 우아가 답했다. “중앙에서 지정하고 현장에서 수락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에반이 운송대 아래의 작은 레일을 살폈다. 그가 갑자기 굳었다. 빈 외투의 안감에 박힌 부호는 자신이 예전에 설계한 추천 알고리즘의 구버전 표시였다. 추천 명단에 사람 이름이 없으면 결원이 발생했다고 간주하고, 결원 발생 시 주변인의 관계를 조사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구조대 대기자를 찾으려고 만든 기능이었어요.” 에반이 말했다.
“실제로는?” 재하가 물었다.
“명단에 없던 사람도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로 데려올 수 있게 된 겁니다.”
운송대의 외투에서 가느다란 실이 뻗어 나와 지나가던 청소 직원의 손목에 감겼다. 직원은 그것을 처음에는 먼지라고 생각했는지 털어 냈다. 실은 떨어지지 않았고, 그의 출입증에서 글씨가 바뀌었다.
[근접 지원 가능 인력 발견]
[도요 고원 임시 배치 준비]
재하는 실을 끊으려 손을 뻗었다. 신성 창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타인의 계약이고, 강제 헌납의 확정 증거가 없으며, 해당 직원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아직 모르는 상태였다. 권능이 발동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대신 그는 직원에게 물었다.
“당신, 도요 고원으로 가기로 했습니까?”
직원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 층 청소를 끝내야 합니다. 아이가 저녁에 기다리고 있어요.”
그 대답이 기록되자 우아가 접수대의 오래된 응급 단추를 눌렀다. 기계가 떨렸지만 실은 느슨해지지 않았다. 에반이 지도를 펼쳤다. 실은 운송대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직원의 ‘가까운 사람’이라는 신분표에 묶여 있었다. 강제로 잡아당기면 지원자가 다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나쁜 기계가 참 공들여 나쁘군.” 카르도가 중얼거렸다.
세리아는 직원에게 자기 이름으로 거절 기록을 남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직원이 떨리는 손으로 ‘이동을 거절한다’고 쓰자, 우아가 접수대에 직접 도장을 찍었다. 그러자 실의 빛이 옅어졌다. 하지만 한 가닥은 여전히 운송대로 이어져 있었다.
“거절이 취소 명령으로 연결되지 않아요.” 우아가 말했다. “오래된 계약에는 거절을 받는 창구와 실행 장치가 따로 있거든요.”
에반은 사무실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 연결 부분을 내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엔 차단선을 두 개나 더 넣었다고 기억해요. 지금은 하나밖에 안 보여요.”
“누가 빼 버렸다는 건가요?”
“아니면 예전 설계가 복사되면서 누락된 거죠. 어느 쪽이든 확인해야 합니다.”
재하는 접수대에 놓인 문서를 천천히 읽었다. 자동 배치를 취소하기 위해 직원의 과거 근무 내역과 가족의 위치까지 제출하라는 항목이 있었다. 그는 그 부분을 접어 가리고 우아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취소가 가능한지 물었다. 우아는 잠시 계산하더니 수동 중단 절차를 찾아냈다. 세리아가 현장 확인자로, 노엘이 회수 이력 확인자로 서명했다. 각각 자기 본 일만 책임지는 서명이었다.
운송대가 멈췄다. 직원은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세계로 옮겨질 뻔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릴리는 그를 데리고 창문 있는 휴게실로 갔다.
우아가 말했다. “이런 오류가 있었다는 신고는 여러 번 있었어요. 그런데 반송을 마치면 기록이 종결로 분류됐습니다.”
“종결이라뇨?”
“이동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사고도 없었다고요.”
재하는 아찔했다. 자신이 사람을 한 명 구했다며 자랑할 일이 아니었다. 같은 일이 오늘 몇 번이나 발생했는지, 누가 여전히 운송대에 실려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했다.
휴게실에서는 뜻밖의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청소 직원의 출입증이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직후였다. 경유실의 다른 직원 두 명이 찾아와 그가 업무를 지연시켰다는 사유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직원은 아직 손이 떨리고 있었고 릴리는 그가 당장 서류를 처리할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설명했다.
“지연이 발생한 건 맞잖아요.” 한 감독관이 말했다. “그럼 지연 사유를 적어야죠.”
“그분이 일부러 늦춘 일이 아닙니다.” 우아가 답했다. “자동 배치 장치가 청소 시간 중에 강제로 작동했습니다.”
감독관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부서는 청소 업무만 봅니다. 운송 장치는 다른 부서에서 관리해요.”
재하는 그 말이 너무 익숙해 잠시 말문을 잃었다. 어디에서나 한 사람이 맡은 일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은 중요했다. 하지만 경계 바깥에서 생긴 문제를 계속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한다면, 가장 약한 사람이 모든 비용을 떠안게 됐다.
세리아가 사고 번호를 가리켰다. “청소 업무 지연의 직접 사유는 경유실 운송 시스템의 오작동입니다. 그 사유를 적는 데 직원의 잘못을 인정할 필요는 없어요.”
우아는 마침내 사유서 칸에 '시설 오류에 따른 업무 중단'이라고 적었다. 감독관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안전 보고서가 발행돼 관련 부서로 자동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고치려고 했던 것은 세상을 움직이는 위대한 진리가 아니라, 보고서의 책임 항목 하나였다.
잠시 후 직원이 릴리에게 종이컵을 건넸다. 따뜻한 차였다. “아까 고맙습니다. 저는 여기서 일한 지 오래됐는데 오늘처럼 제 말을 끝까지 들어 준 사람은 처음이에요.”
릴리는 손사래를 쳤다. “아무도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게 아닙니다. 당연히 확인해야 할 일이었죠.”
직원은 웃었다. “당연한 일을 누가 해 주면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그는 자신이 청소하며 모아 둔 작은 기록을 보여 줬다. 운송대 근처에는 자주 빈 외투나 이름표가 떨어졌고, 관리자들은 매번 분실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분실물은 대개 물건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대신하는 표식이었다. 그는 그런 표식이 나타난 시각과 위치를 수첩에 적어 두었다. 어떤 표식은 도요 고원의 자동 모집 시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걸 봐도 되나요?” 세리아가 물었다.
“안에 제 업무 메모도 있어서 필요한 부분만 복사하고 싶습니다.”
세리아는 동의했다. 우아는 시설 기록과 대조할 수 있는 항목에만 번호를 붙였다. 누구도 수첩 전체를 압수하지 않았다. 재하는 그 광경을 보며 오래된 계약을 고치는 첫 번째 단서가 높은 자리에 있는 신이 아니라 매일 바닥을 닦는 사람의 관찰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우아는 그제야 공개 운용 시험의 목적을 설명했다. 시험 방문자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 현장 운용을 살펴볼 수 있지만 사람의 신분 기록에는 접근할 수 없다. 반대로 시설 안전 로그는 누구든 열람할 수 있다. 재하는 그 제안에 동의했다. 한 사람의 삶이 문서 제목 아래 숨는 일이 없도록, 피해자 명단 대신 시스템의 동작을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첫 번째 운용 기록을 열었다. 거기에는 도요 고원의 날씨보다 더 이상한 항목이 있었다.
[겨울등 공급이 중단될 경우 예상 난방 공백: 17시간]
[그 기간 자동 대리 배치 인원: 최소 9명]
[배치 대상자 사전 동의 기록: 없음]
“이걸 그냥 끊으면 사람들이 얼어 죽을 수도 있군.” 카르도가 말했다.
“그렇다고 사람 아홉 명을 가져다 꽂을 수도 없고요.” 재하가 답했다.
경유실의 첫날, 일행은 세계를 하나도 옮겨 다니지 못했다. 대신 한 사람의 불법 배치를 막았다. 우아는 방문증 여섯 장에 사고 번호를 찍었다. 그 번호는 누구의 믿음으로도 바꿀 수 없는, 있었던 일의 흔적이었다.
창구의 네 시계 가운데 도요 고원의 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눈 냄새가 나는 복도에 작은 흰 점들이 내려앉았다. 출입문이 열렸고, 뼈마디가 굵은 노파가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눈을 털어 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겨울등을 멈추려 온 신이 누구야? 멈추기 전에 우리 마을 굴뚝부터 좀 봐.”
재하가 손을 들었다. “저요. 그런데 신은 둘입니다.”
노파는 재하와 카르도를 번갈아 보더니 카르도를 가리켰다. “저 덩치 큰 양반은 장작 패는 데 좋겠군.”
카르도가 매우 드물게 환하게 웃었다. “마침 내가 잘하는 일이네.”
제13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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