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골 신전의 새 간판은 바람이 불 때마다 왼쪽으로 조금씩 기울었다. 글씨는 반듯했다. ‘가시골 쉼터와 기록 보관소. 믿어도, 믿지 않아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간판을 고정한 못이었다. 릴리는 세 번이나 망치를 들고 올라가려 했고, 세 번 모두 모과에게 제지당했다. 주민회의에서 지붕과 간판 수리는 목수의 책임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신이 못 하나 박는 것도 규정 위반이야?” 윤재하가 물었다.
“못 박지 말라는 게 아니라, 지난번처럼 벽 안에 있던 소리관까지 같이 깨지 말라는 거죠.” 모과가 대답했다.
“그건 신성한 구조 조정이었는데.”
“수리비도 신성하게 내셨고요.”
재하는 반박하지 못했다. 신전 앞마당에서는 어린 노아가 나무판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람 셋이 손을 잡고, 그 위로 커다란 눈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는가 싶었지만 가시골은 아직 가을이었다. 노아는 눈송이가 아니라 ‘낙하하는 별’이라고 주장했다.
그때 세리아가 독립 창구에서 가져온 얇은 판을 책상에 펼쳤다. 차분한 얼굴과 달리 판 위의 글씨는 불길했다.
[동일 서명 기법 확인: 14건]
[종결 11건 / 현재 효력 유지 3건]
[원 승인자: 검증 불가]
“이 숫자를 새 신도 모집 실적으로 착각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열네 명이 알아서 저를 믿어 주면 기분은 좋겠죠.” 재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지난번에 한 명 믿어 준 덕분에 소송만 몇 번을 했는지 생각하면, 이건 신도보다 고소장 숫자 같아요.”
세리아는 판을 뒤집었다. 세 계약은 각각 별도의 세계를 거쳐 운용 중이었다. 도요 고원에는 ‘겨울등 보호 협약’, 철비항에는 ‘비상 대리인 배치 협약’, 유리해에는 ‘심해 구조 호출 협약’이 있었다. 서명 방식이 같다는 점 외에는 서로 관련이 없어 보였다. 각각의 상세 수혜자 명단은 가려져 있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멈출 수 있는 건?” 릴리가 물었다.
“신규 대상자 자동 편입 기능의 정지 요청입니다. 그런데 계약 원장을 열 권한은 복수 세계 공동 경유실에 있고, 거기서는 담당 신격을 지정하라고 합니다.”
“담당자는 누가 되죠?”
세리아가 재하를 보았다. 재하도 세리아를 보았다. 에반은 벽 쪽으로 의자를 조금 밀었다.
“왜 나를 보는 건데?” 재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전례가 좋지 않아서요.” 릴리가 답했다. “당신은 서류에 서명하면 세상을 구한 줄 알고, 서명하지 않으면 세상을 버린 줄 알잖아요.”
그 말이 아팠다. 그보다 아픈 것은 대체로 맞는 말이라는 점이었다. 재하는 계약서의 열람 창을 닫고 먼저 시간을 확인했다. 도요 고원의 다음 자동 갱신은 하루 뒤, 철비항은 사흘 뒤, 유리해는 아홉 날 뒤였다. 사람을 찾기 전에 신호가 사람을 강제로 찾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동결은 세 계약 모두?”
“아직은 안 됩니다.” 세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갱신 기능이 난방 배급, 구조 인력 호출, 해저 경보와 묶여 있습니다. 전체를 한 번에 끊으면 실제로 누군가 다칠 수 있어요.”
“자동으로 사람을 붙잡는 나쁜 계약인데, 끊으면 사람도 다친다니. 계약 만든 사람 진짜 못됐네.”
에반이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그 설계를 처음 납품할 당시에는 재해에 대비하는 목적이라고 들었—”
“그 뒤는 변론 시간에 해.” 릴리가 잘랐다.
릴리는 가시골 쉼터의 아궁이 옆에 놓인 노아의 작은 장화를 떠올렸다. 그 아이에게 겨울등은 계약서에 찍힌 글자가 아니라 밤중에 발이 시리지 않은 집의 온도였다. “사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데려가는 건 막아야 해요. 하지만 난방까지 끊는 방법이라면 저는 반대할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에반은 변명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재하는 그 말도 회의록에 남겼다. 자기와 같은 편에 선 사람도 해결 방법에는 반대할 수 있었다.
세리아는 검토표 맨 위에 제목을 새로 썼다. ‘정지할 기능’과 ‘유지할 기능’. 두 칸은 비슷해 보였지만, 그 가운데 선 하나가 실제 사람들의 밤을 가르고 있었다.
에반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요즘 그의 명함에는 ‘기적 마케팅 전문가’라는 문구 대신 ‘전직 계약 설계자, 사실 확인에 협조 중’이라는 긴 설명이 적혀 있었다. 글씨가 작아져 명함의 쓸모가 거의 없어졌다.
회의 전 재하는 계약 목록의 첫 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낱말 하나가 자꾸 걸렸다. ‘보호 대상’이라는 말이었다. 대상이라 부르는 순간 그 사람에게 묻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릴리는 사람을 대상으로 부르는 일이 언제나 잘못은 아니지만, 이름을 가린 채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다. 세리아는 그래서 보고서에 '당사자 동의 확인 여부' 칸을 새로 만들었다. 작게 추가한 칸 하나로 지금까지 분명하지 않았던 질문이 생겼다. 누구를 돕는가, 그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가. 재하는 그 질문이 이번 여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반은 자기 노트에 작은 글씨로 적었다. '마케팅 대상이 아니라 대화할 상대.' 그 문장을 보고 릴리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는 회의실 벽에 붙은 운영표를 다시 확인했다. 빈칸이 있으면 다음 회의에서 사람들과 상의한다는 문장이 있었다. 그 문장에 가장 큰 동그라미를 쳤다.
주민회의가 열렸다. 모과는 세리아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계약을 멈추러 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여기 신전은 누가 열죠?”
도르가 손을 들었다. 그는 전임 신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뺏긴 사람도, 새 신전의 주인이 된 사람도 아니었다. 지금은 마을의 숙식 지원표를 관리하고 있었다.
“나는 문 여는 법을 압니다. 하지만 장부는 모르니 모과가 살펴줘야겠지요.”
“그럼 재하가 없을 때 치료소에서 쓰는 물품 인수는 제가 맡겠습니다.” 릴리가 말했다. “대신 치료 결정은 치료사가 하도록 적어 주세요.”
사람들은 이상할 만큼 평범한 일을 하나씩 정했다. 장작 보관, 우물 점검, 급식 목록, 긴급 연락 담당. 어떤 신도 위대한 선언을 하지 않았는데 신전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였다. 재하는 이 회의가 자기 환송식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카르도는 마당에 세워 둔 무거운 창을 들고 왔다. 창끝에 피가 묻어 있지는 않았다. 대신 포장용 끈이 감겨 있었다.
“수로를 막아 주던 사람들에게 보내는 나무 지지대다. 다음 배달 때 실어 주기로 했다.”
“전쟁신이 운송업까지 하십니까?”
“물류선이 끊기는 것도 전쟁에서는 흔한 문제라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도는 부대를 데리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외교 분쟁을 부를 수 있다며 자신은 소수의 호위와 현장 지원 인력만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동안 배웠던 것을 적어 놓은 듯한 대답이었다.
해 질 무렵, 노엘이 먼 길을 걸어왔다. 회수소의 정복 대신 낡은 외투 차림이었다. 중앙 회수소는 그의 증언 때문에 조사를 시작했고 그는 임시 직무 정지를 통보받았다. 그렇다고 한쪽 진영의 무조건적인 동지가 된 것은 아니었다. 노엘은 경유실 출입 업무에서 자신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계의 회수 명령 기록뿐이라고 분명히 했다.
“도와주면 복직에 불리할 수 있습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그럴지도요. 그래도 계약을 일괄 정지했을 때 생기는 사고를 현장에서 본 적 있습니다. 그걸 보고만 있기는 어렵습니다.”
노엘은 작은 황동 시계를 꺼내 보였다. 바늘이 세 개였다. 하나는 고원에서, 하나는 항구에서, 마지막 하나는 바다 밑에서 보내는 신호를 따라 움직였다. 바늘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돌았다. 기계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 세 세계가 서로 다른 주기로 자동 호출을 실행한다는 증거였다.
“이 시계는 시간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사람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불려 갈 수 있는 시점을 알려 줍니다.”
릴리는 시계를 보는 대신 창문 밖을 보았다. 노아가 마을 아이들과 나무공을 차고 있었다.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이가 어디론가 이동해야 한다면 그건 구조가 아니었다.
재하가 시계를 받아 들자 오래된 신성 창이 반응했다.
[무상의 약속: 외부 계약 3건과 일치하지 않는 신앙 관계]
[신규 신도 획득 가능성: 계산 보류]
[제공 가능한 기본 권능: 없음]
“신으로서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정보군.”
“그런데 마지막 줄은 없네요.” 에반이 말했다.
“뭐가?”
“‘계약에 손대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말뜻을 이해한 재하가 고개를 들었다. 시스템이 허락한 것도, 금지한 것도 아니었다. 이름을 가진 당사자가 직접 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누가 대신 결정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 시작을 신의 권능이 아니라 행정의 빈틈과 현장의 안전 점검에서 찾기로 했다.
밤이 깊어질 무렵 복수 세계 공동 경유실에서 접수 확인이 왔다. 담당자 대신 세 건 모두의 운용 현황을 열람할 수 있는 ‘공개 운용 시험’ 자리가 비어 있다고 했다. 특별 권한 없이도 가 볼 수 있지만, 시험 중 발생한 사고의 책임은 신청자에게 돌아온다는 문구가 따라붙었다.
재하는 종이를 세리아에게 내밀었다. “책임이라는 말이 너무 넓지 않아요?”
“넓습니다. 그래서 동의하기 전에 책임 범위를 바꾸라고 요구해야죠.”
다음 날 새벽까지 네 사람은 문구를 다시 썼다. 실수로 물건을 깨뜨렸을 때의 책임, 현장 규정을 어겼을 때의 책임, 다른 사람이 이미 만든 위험까지 떠맡는 책임을 구분했다. 끝내 경유실은 ‘검증 전 기존 사고의 책임은 전가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였다.
“세상에. 서류를 고쳐서 통과하는 길이 있네요.” 재하가 감탄했다.
릴리가 웃었다. “이제야 사람 말을 조금 배우셨네요.”
출발하기 전날 밤, 재하는 신전 뒤쪽의 창고를 혼자 둘러봤다. 오래전에는 기도용 향로와 봉인된 공물함이 있던 자리였다. 지금 그곳에는 부러진 의자와 수리용 판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쓰는 우비가 놓여 있었다. 작은 물건들이 신전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 줬다. 누군가 기도하며 두고 간 물건은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는지 확인했고, 주인을 찾지 못한 것은 별도 목록으로 관리했다. 더는 신에게 바쳤다는 이유로 아무 물건이나 신의 것이 되지 않았다.
도르가 등잔을 들고 들어왔다. “이 창고는 내가 전임 신일 때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네.”
“그때에도 허가 없이 가져가면 벌 받았나요?”
“그때는 무서워서 아무도 묻지 않았지. 나는 그걸 존경이라고 생각했네.”
도르는 먼지가 쌓인 공물함을 가리켰다. 그 안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족의 병을 낫게 해 달라며 남긴 작은 동전과 손수건이 있었다. 그는 손수건에 쓰인 이름을 읽고 오랫동안 침묵했다. 어떤 사람은 살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이미 먼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모두 찾아내 돌려주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도르는 돌아올 사람의 이름을 기다리는 목록에 적었다.
“당신이 돌아오기 전에 이것부터 해 보려네.”
“저 없어도 할 수 있어요.”
“그래야겠지.” 도르가 웃었다. “그 말을 듣고 싶었네.”
복도에서는 노아가 릴리에게 편지를 읽어 주고 있었다. 노아는 아직 어려운 글자는 몰랐지만, ‘누구의 이름’과 ‘무슨 일’이라는 칸만은 틀리지 않았다. 마을의 새 공용 안내표를 그리면서 글자 대신 그림을 썼기 때문이다. 그는 화살표가 세 개 달린 그림을 내밀었다. 첫 번째는 따뜻한 집, 두 번째는 삽을 든 사람, 세 번째는 바다에 떠 있는 배였다.
“신님, 이 세 군데에 다 가세요?”
“아마 그럴 것 같아.”
“그럼 배 타는 데서는 물에 빠지지 마세요.”
“신이잖아. 그 정도는…”
재하는 말을 멈췄다. 노아가 진지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다고 쉽게 약속할 일이 아니었다. “안전 수칙부터 읽을게. 그리고 위험하면 전문가 말을 듣고.”
“좋아요.” 노아가 도장을 찍었다. 어린아이가 만든 도장이었는데 종이 위에는 작은 우산이 나타났다.
재하는 그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하늘의 신들이 권능 계약을 서명하라고 요구할 때보다, 어린아이가 안전 수칙을 지키라고 요구할 때 책임이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 어떤 세계에 들어가든 자신이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인 척하지 않기로 했다.
떠나는 날, 재하는 신전 문에 새 쪽지를 붙였다. ‘잠시 자리 비움. 쉼터는 정상 운영.’ 그 아래에 작게 적었다. ‘신의 부재는 서비스 중단 사유가 아닙니다.’
모과는 마지막 문장을 보고 혀를 찼다.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신전 수리비도 신께 청구했을 텐데.”
“그건 아직도 제 부담인가요?”
“못 박다 벽 부순 건 본인이잖아요.”
웃음이 번졌다. 그러나 공동 경유실에서 도착한 두 번째 통보는 그 웃음을 오래 두지 않았다.
[유리해 해저 구조 호출 협약]
[다음 자동 호출까지: 09일 05:59:59]
[신규 대리 구조자 추천: 대상자 의사 확인 불가]
아홉 날. 오늘보다 늦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긴 시간은 아니었다.
재하는 서류를 챙기고 황동 시계의 세 번째 바늘을 보았다. 처음 신이 되었을 때는 신도를 얻으러 길을 나섰다. 지금 그가 향하는 곳에는 누군가의 믿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거절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앙은 숫자가 아니라 관계라는 말을 배웠으니, 이번에는 그 말을 움직임으로 보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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